지아, 넌 언제 떠날거니?
1
아침에 히란이 물었다.
"지아, 혹시 언제쯤 떠날 예정이야?"
테이블 위에 숙박자 명단이 놓여 있었다. 떠나갈 자와 남을 자들, 새로 등장할 이름들이 액셀 파일 위에 짜 맞춰져 있었다. 각 투숙객의 국적마다 색상이 달라 흡사 테트리스 같기도 했다. 그중 변화가 없는 건 201호뿐이다. 하이랑카에서 제일 따뜻한 방. 뜨거운 물이 잘 나오고, 풍경도 좋고, 작지만 멋스러운 테이블도 있는 방. 하이랑카 테트리스는 내 방 201호를 기준으로 아래와 위로 갈렸다.
히란은 한 번도 내게 떠날 날을 묻지 않았다. 우리는 서로를 오래 볼 사람처럼 대했고, '잘 자'보다는 '내일 봐'라는 말을 더 자연스럽게 했다. 나는 쌀쌀한 바람이 부는 누와라엘리야가 좋았고 따뜻한 사람들이 있는 하이랑카는 더 좋았다. 그래선지 그가 열흘 만에 체크아웃 예정 날짜를 물었을 때 왠지 체온이 1도쯤 낮아졌다. 그가 어딘가 미안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말하지 않았다면 진심으로 서운했을 것이다. 서운하다는 감정이 적절한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말이다.
히란은 며칠 후 유럽 출신 부부가 하이랑카로 올 거라고 말했다. 그들은 누와라엘리야에 열흘 동안 머물 예정이며 전 일정을 하이랑카에서 보내고 싶어 했다. 하이랑카에서 부부에게 내어주기 적절한 방은 201호 뿐이었고, 히란은 그들의 메일에 답신을 해야 했다. 나의 대답에 따라 메일에 적힐 내용도 달라질 것이었다.
나는 그에게 몇 시간만 달라고 했다. 빨리 떠나주거나 혹은 오래 머물러야 했는데 어느 쪽도 결정이 어려웠다. 만일 떠난다면 언제 떠날지, 아니 그보다는 우선 어디로 갈지 정해야 했다. 나는 누와라엘리야에 온 이후 단 한 번도 다음 행선지를 고민해보지 않은 걸 깨달았다. 생각하기가 귀찮았고, 귀찮음을 이겨내야 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에 그냥 '있는'채로 지냈다. 내 뒤에 누군가 줄 선 기분은 생각보다 별로였다. 곧 떠난다고 생각하니 내 것 같던 방이 조금 다르게 보였다. 내일이나 모레쯤은 내 방이 아닐지도 몰랐다. 나는 어딘가 쫓겨나는 기분이 된 채로 카메라와 배터리를 챙겼다. 일단 좀 걷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돌아올 때의 발걸음이 무거울 걸 생각하니 미리부터 울적했다.
2
몸의 중요한 부분이 고장 난 사람처럼 걸었다. 아는 길이라곤 타운으로 내려가는 큰 길뿐이었는데 몸이 알고 있는 길이라 머리는 일하지 않아도 되었다. 문득 애초에 스리랑카에 오래 머물 생각이 없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콜롬보행 비행기를 탈 때도, 해리와 시기리야를 오를 때도, 처음 누와라엘리야에 왔을 때도 맥시멈은 보름이었다. 그리고 그 보름이 며칠 전에 지나갔다는 걸 상기했다. 히란과 친구가 되는 동안, 하이랑카 식구들에게 정서를 기대는 동안 시간은 한 칸 한 칸 빠르게 흘렀다. 나는 인도로 돌아가 남인도 여행을 마저 하고 싶었다. 하지만 계속 누와라엘리야에 있고 싶기도 했다. 솔직히 떠나고 싶지 않은 마음이 더 크다. 그래도 글감을 생각하면 떠나는 게 맞을까. 여행하는 것과 그저 '있는 것'은 다르고, 뭔가 쓸 것을 찾으려면 어쨌거나 어디론가 흘러가는게 나을지 몰랐다.
평소보다 느린 속도로 왼발과 오른발을 번갈아 디뎠다. 슬리퍼 뒤축이 징징거리듯 모래 바닥을 서걱서걱 쓸었다. 한동안 느리게 내리막을 걷는데 누가 허리춤을 톡톡 쳤다. 고개를 내리니 작고 새까만 남자애가 서 있었다. 아이는 눈이 이집트 미라처럼 컸고 쌍꺼풀 선이 굵었다. 그는 낡고 더러운 옷을 입은 채 뭔가 할 말이 있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보통 이런 경우 상대가 원하는 건 높은 확률로 돈일 것이기 때문에 나는 1초 만에 긴장했다.
"왜?"
아이는 대답 대신 손가락을 들어 카메라를 가리켰다.
"사진 찍어 달라고?"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원 포토. 플리즈"
돈이 아니라 차라리 다행이었다.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는 과정과 그걸 쳐다보는 상대의 시선을 견디는 건 언제나 불편하다. 기대하는 눈빛은 손이 따끔따끔할 만큼 부담스럽고, 액수에 대놓고 실망하는 모습은 어김없이 성질을 돋군다. 눈 큰 소년과 돈을 사이에 두고 치사해지지 않아도 되는 건 다행이었다.
"사진만 찍어주면 돼?"
아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기대에 찬 얼굴로 히- 웃는데 묘한 땀 내음이 났다. 아이다운 냄새라고 생각했다. 렌즈를 올려 찍을 준비를 하자 아이가 두 발짝 떨어진 곳에서 어색하게 웃었다. 서남아시아 아이들은 항상 먼저 찍어달라 해놓고 막상 렌즈 앞에서는 웃는 법을 잊은 사람처럼 웃는다. 그래서 여러 번 고쳐찍어야 겨우 나쁘지 않은 한 장을 건진다. 눈 큰 아이도 마찬가지다. 아이는 찍힌 사진을 보더니 몸을 배배 꼬았다. 좋은가 보다. 누군가에게는 카메라에 찍혀보는 것 자체가 귀한 경험일 수 있다는 걸 안 지는 몇 년 안 됐다. 세상엔 내 머리로는 이해되지 않는 많은 것들이 있고, 여행은 그 이해의 가치 기준을 나에서 너로, 그로, 또는 그녀나 그들로 옮기는 법을 가르쳤다. 내 울타리 안에서 눈 큰 소년은 웃었다.
한 가지 문제가 생겼다. 사진 찍는 걸 보고 동네 아이들이 몰려든 것이다. 여자아이 남자아이, 그리고 그들의 동생과 그 동생의 동생들이 달려왔다. 동네가 작다 보니 모이는 속도가 어마하게 빨랐다. 아이들이 모일수록 시끄러워졌고 소란해질수록 인원이 불었다. 나는 셔터를 한 번 누를 때마다 찍힌 결과물을 보여줘야 했는데 나중엔 인원이 너무 많아져 찍기는커녕 가만히 서 있기도 힘들었다. 작은 아이들은 내 팔에 매달리거나 내 발을 마구 밟으며 기어올랐는데 맨살에 밟히니 너무 아팠다. 이러다간 넘어지거나 카메라를 떨어뜨릴 것 같았다. 나는 'STOP!'을 외치며 뒷걸음질 쳤는데 나중엔 지나가던 어른들까지 합세해 말려도 소용이 없었다.
불어나는 아이들 사이에서 휘청이다 겨우 틈을 발견하곤 냅다 집 쪽으로 달렸다. 아이들이 소리를 지르며 쫓아왔다. 좀 큰 애들은 이미 나를 앞질렀지만 어쩐지 붙잡지는 않았다. 헤벌쭉 웃고 있는 걸 보니 즐기는 것 같았다. 농락당하는 기분으로 계속 달리고 달렸다. 느려터진 외국인과 까맣고 시끄러운 아이들을 바라보던 동네 할머니들이 크게 웃었다. 헐겁게 신은 슬리퍼가 경박한 소리를 내며 땅바닥을 딸딸 때렸다. 가쁜 숨에 목구멍이 따갑게 쓸렸다.
"그만 따라와! STOP!"
하이랑카가 보이자 냅다 현관 안으로 몸을 틀었다. 아이들은 어쩐지 저택 마당까지는 따라 들어오지 못했다. 작은 애들이 멋모르고 쫓아오려 해도 큰 애들이 엄한 표정으로 막아섰다. 충분히 들어올 수 있을 것 같은데도 그랬다. 잠깐 멈춰 뒤돌아보니 아이들이 입구에 멈춰 서서 목청껏 소리를 질렀다.
"원 포토! 플리즈!"
다들 나만큼이나 숨이 가쁜 것 같았다. 작은 아이 몇몇은 울었는데 나는 그 때문에 지은 죄도 없이 미안해졌다. 소란스러움에 히란이 입구로 달려왔다. 어른 스리랑칸이 나타나자 아이들은 겁먹은 얼굴로 뿔뿔이 흩어졌다. 히란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도 그랬다. 작고 마른 아이들 앞에 그는 유난히 커 보였다. 그중 깡마른 여자애 하나가 골목 끝에 서서 찢어지게 소리쳤다.
"마이 브라더 원 포토! 투모로우! 투모로우!"
여자애 옆에는 제 누나보다 더 마른 남자애가 울고 있었다. 투모로우. 내일. 내일이라. 왠지 귀에 박히는 말이었다. 떠나는게 숙명인 여행자에겐 조금 쓸쓸한 말이기도 했다. 남매는 내가 집안으로 사라질 때까지 계속 그 자리에 있었다.
3
소파에 앉아 있는데 히란이 할 말이 있다며 다가왔다. 주방은 딸기 토스트를 만들어 먹는 유럽인들로 한창 시끄러웠다. 나는 그가 건넨 찻잔을 받아들며 뭔데, 물었다. 홍차가 예쁜 색을 내고 있었다. 그는 내게 방을 비우지 않아도 된다고 말했다. 유럽 부부에게 메일이 하나 더 왔는데, 요구하는 게 너무 많아 결국 거절했단다. 히란은 내게 있고 싶은 만큼 있으면 된다고, 신경 쓰게 해 미안하다고 했다. 나는 홍차를 홀짝이며 말했다.
"걱정 마. 나 여기 더 있을 거야."
내가 말해놓고도 피식 웃음이 났다. 어차피 결정은 진작에 했는지도 모른다. 히란도 웃으며 왠지 그럴 거 같았다고 했다. 아침보다 얼굴이 편해 보였다. 아마 내 얼굴도 그럴 거다.
나는 떠날 날을 기약하지 않음으로써 이곳에 살아보기로 했다. 언젠가 떠나기야 하겠지만, 그래도 그전까지는 '사는' 사람으로서 하이랑카에 존재하기로 했다. 남기로 결정하자 비로소 모든 것이 제 자리에 놓인 기분이다. 로비도, 테라스도, 201호도 모두 보기 좋은 위치에 있었다.
따땃한 이불 속으로 몸을 뉘는데 불현듯 투모로우 남매가 생각났다. 내일도, 내일의 내일도 여기에 있을 나는 어쩐지 투모로우 남매에게 꼭 원포토를 선물해주고 싶어졌다. 두 사람이 서 있던 자리를 떠올리며 눈을 감았다. 투모로우. 원포토. 까랑까랑한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