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을 아주 약간만 아는 사람들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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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가를 처음 해본다는 건 약간 걱정되지만 많이 매력적이다. 망쳐버릴 확률이 높지만 어쩌면 잘 해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다 정말 잘 해버리는 날엔 스스로가 기특해 견딜 수가 없다. 내가 나를 칭찬하는 일은 자주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그런 날엔 반드시 기록을 남긴다. 다행히 여행 중엔 이런 식의 글을 쓸 일이 많다. 어쩌면 나는 스스로를 칭찬하기 위해 여행을 떠나는 건지도 모르겠다.
김치를 만들기로 한건 먹을 게 없어서였다. 누와라엘리야에는 많은 먹거리가 있는데 미안하지만 맛있지는 않다. 스리랑카 음식은 짜거나 맵거나 싱거운데 내게 익숙한 짜거나 맵거나 싱거운 맛이 아니기 때문에 자주 당황한다. 다운타운에는 랑카 음식점 외에 양식당도 있지만 어쩐지 전부 백 프로는 아니다. 크림 파스타에 크림 맛이 안 난다거나 치킨버거에 치킨이 없다거나 양송이 수프에서 향신료 맛이 나는 식이다. 웬만한 결핍은 넘겨준다지만 역시 매번 봐주긴 힘든 맛이다. 떠돌기를 멈추고 살기 시작해 더 그런지도 몰랐다. 맛있는 걸 먹으려면 호텔 레스토랑에서 많은 돈을 쓰면 됐는데 그럴 때마다 주머니 사정을 신경 쓰는 것 자체가 피로했다. 뭘 먹을지 고민하는 건 귀찮지만 나는 자꾸 배가 고팠기 때문에 결국 음식을 한 번에 많이 만들어 저장하기로 했다. 다행히 한식 중에는 그렇게 먹기 적당한 음식이 명확하게 있었다.
김치 만드는 법은 지난 동행인 환에게서 배웠다. 환은 김치가 완성되는 과정을 직접 보여줬는데 옆에서 알음알음 거들었던 덕분에 왠지 혼자서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필요한 재료는 모두 마트에서 샀다. 포기 배추와 소금 양파 생강 마늘 등을 사느라 삼만 원 정도를 썼는데 어쩐지 돈을 쓰고 나니 꼭 성공해야 할 것만 같았다.
하이랑카 부엌에는 있는 것보다 없는 게 더 많기 때문에 웬만한 건 손으로 해야 했다. 양파를 까거나 생강 껍질을 숟가락으로 긁어내는데 눈물이 물처럼 흘렀다. 물기를 소매로 훔치다 소매에 있던 매운 내가 눈으로 옮아 더 많이 울었다.
다행히 김치가 뭔지 아는 히란이 거들었다. 히란은 깐 마늘을 절구에 빻는 일을 맡았는데 단 몇 번의 손짓으로 마늘을 즙으로 만들었다. 감도 좋고 힘도 좋은 히란 덕분에 김치는 빠르게 완성됐다. 남은 김칫소로는 오이소박이를 만들었다. 이걸 오이소박이라도 불러도 될지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말이다.
한통 가득 만들어둔 김치는 나 말고도 많은 이들의 끼니를 책임졌다. 의외로 김치를 좋아하는 외국인은 많았는데 그중 최고는 중국인이었다. 도미토리에 묵던 베이징 출신 M은 김치통을 보자마자 정확한 발음으로 '김치'라고 했다. 너무 확실한 김치라 기무치나 킴취가 아닌 게 황송할 지경이었다. M은 한국 드라마에서 김치볶음밥을 봤다며 혹시 만들어 줄 수 있냐고 물었다. 대신 M은 고국에서 가져온 보이차를 꺼내왔다. 세계 어디를 가도 차는 중국이 최고라며 내겐 밑지지 않는 딜임을 어필했다. 히란이 조금 새초롬한 표정을 했다. 실론티의 본거지에서 할 소리는 아니긴 했다.
어설픈 맛이 나는 김치볶음밥을 M과 나눠먹었다. 동갑내기 M은 자전거로 아시아를 여행 중이다. 누와라엘리야로 올라오는 산길 역시 자전거로 이동했다. 6개월째 여행 중인 M은 다리에 붙은 근육만큼이나 영어 실력도 탄탄했고 처음 보는 나와도 많은 말을 섞었다. 이런 식의 만남이 익숙한 것 같았다.
M도 글 쓰는 일을 했다. 음식과 관련한 기사를 써서 신문사에 파는 게 주업이라고 했는데 아마 푸드칼럼니스트인 듯했다. 정확한 발음의 근거를 찾아 고개를 주억이는데 문득 M이 그녀의 글에 나를 등장시켜도 되겠냐고 물었다. 주제가 나인지 내가 만든 김치인지 물으니 둘 다라고 했다. 서현지는 어떻게 그려져도 상관없으나 음식은 조심스러웠다. 김치볶음밥을 먹으며 미각을 예리하게 세웠을 그녀를 상상하니 잠깐 어디든 눕고 싶은 심정이 됐다. 나는 이건 진짜 김치가 아님을, 진짜 김치는 이것보다 몇 배는 좋은 맛이 날 것임을 여러 번 강조하며 허락했다.
우리는 서로의 소재가 되는 것에 합의했지만 어딘가 내 쪽이 크게 손해 보는 기분이 되었다. M의 손에 의해 탄생한 서현지와 김치와 한국은 어떤 모습일까. 궁금하지만 영원히 모르고 싶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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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치를 좋아하는 사람은 중국인 말고도 많았기 때문에 김치통은 빠르게 비었다. 김치는 스리랑카 사람과 캐나다 사람도 좋아했고 일본인들에겐 거의 사랑받았다. 어떤 이스라엘리는 몰래 김치를 꺼내 먹다 걸리기도 했다.
김치를 포크로 찍어 먹거나 물에 씻어 먹는 사람들 틈에서 나는 몇 번이나 김치에 대해 설명했다. 이렇게 우리 것에 대해 말하는 순간마다 나는 내가 한국인임을 실감한다. 김치는 싸이나 방탄소년단보다는 덜 유명하지만 어쨌거나 당장 배를 불려주었기 때문에 적어도 하이랑카 저택에서는 케이팝보다 사랑받았다.
하이랑카 식구인 히란과 매니저와 주방 이모님도 김치를 좋아했다. 아, 나는 하이랑카에 살기로 결심할 무렵부터 이모님을 엄마라 불렀다. 그건 누군가를 매번 익스큐즈미라 부르기 미안해서였고 무엇보다도 그녀와 좀 더 가까워지고 싶었기 때문이다. '저기요'나 '이모님'이라는 호칭은 어쩐지 여기 있는 사람을 저어기 있는 사람처럼 느끼게 했다. 호칭을 엄마로 정한 이유는 그녀가 진짜로 나를 딸처럼 대했기 때문이기도 하고 좀 신기하겠지만 우리말 '엄마'는 스리랑카 말로도 '엄마'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녀가 돌보는 저택에 살고 있으니 엄마라 못 부를 것도 없었다. 다행히 엄마는 엄마라 불리는 걸 좋아했다. 그녀는 엄마라 불릴 때마다 어딘가 부끄럽지만 기쁜 표정으로 도-터(daughter) 하고 대답했다.
김치는 천주교인인 히란과 불교 신자인 매니저와 힌두스탄인 엄마 모두에게 상관없을 음식이었다. 매니저와 엄마는 종교 때문에 가리는 음식이 많았는데 다행히 김치는 식구 중 누구에게도 괜찮았다. 엄마는 여전히 세탁실에서 혼자 밥 먹는 게 더 편한 듯했지만 그래도 내가 김치로 요리를 하는 날이면 꼭 한 테이블에서 같이 먹었다.
뭔가를 나눠 먹는다는 건 퍽 좋은 일이었다. 음식을 함께 먹는다는 건 시간과 공간을 나누는 일이기도 했다. 나는 엄마까지 완벽히 네 가족이 모여 식사하는 날이면 왜 식구라는 단어가 '먹을 식' 자와 '입 구' 자로 이루어졌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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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나는 한국을 아주 약간만 아는 사람들과 김치볶음밥을 양껏 나눠먹은 후 산책을 나섰다. 이제는 타운으로 가는 길 말고도 여러 길을 더 알았다. 나는 하루에 최소 한 시간은 꼭 걸었는데 그때마다 카메라로 누군가를 찍거나 처음 보는 음식을 사 먹거나 가보지 못한 곳으로 갔다가 길을 잃는 방식으로 시간을 보냈다. 이렇게 동네를 한 바퀴 걷고 온 날이면 누와라엘리야가 조금 더 이쪽으로 온 느낌이 들었다. 더 좋은 글을 쓸 수 있을 것 같기도 했다.
어쩐지 윗길로 걷고 싶은 날이었다. 윗길은 오르막이지만 타운 쪽보다 조용했기 때문에 몸이나 마음이 좋지 않은 날에 자주 선택했다. 부른 배를 손으로 퉁기며 걷는 동안 많은 풍경이 천천히 지나갔다. 가끔은 사람이나 개나 염소도 보았지만 곁을 스치는 것들의 대부분은 소리나 온도나 혹은 색깔이었다. 나는 공기를 양껏 흡입하거나 나무색이 예쁘다고 생각하거나 이어폰에서 나오는 음악을 따라 부르면서 위로 위로 걸었다.
누와라엘리야에는 꽃이 많다. 길가에 핀 빨강 사루비아를 보며 서로 꿀을 빨겠다고 짝꿍과 싸우던 초딩시절을 떠올리며 부끄러워하고 있던 중 어디서 목소리가 들렸다.
"한국 사람이다!"
시선이 향한 곳엔 웬 까만 스리랑칸 하나가 양팔을 세차게 흔들고 있었다. M의 김치만큼이나 너무 진짜의 한국말이었다. 외국인이 한국말을 너무 잘하면 왠지 무서운 기분이 든다고 생각할 무렵 소리의 근원이 이쪽으로 달려왔다. 그가 입고 후드티에는 왠지 익숙한 건설사 이름이 내 나라말로 적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