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으로 하는 빨래와 손으로 먹는 밥

맨손으로 밥 먹는 사람들 사이에 앉아 포크를 사용했다

by 서현지



빨래를 하기로 했다. 배낭에 밀린 빨랫감이 한가득이다.

여행 할 때는 빨래 타이밍도 잘 맞춰야 한다. 덜 마른 옷감은 무게가 어마어마한데다 물기 있는 채로 배낭에 넣었다간 반드시 쉬었다. 빨래에도 곰팡이가 필 수 있다는 사실을 나는 여행 하는 동안 처음 알았다. 옷감이 애매하게 덜 말랐을 때 벌어지는 일이다. 한 번 곰팡이 핀 옷은 재빨리 버리지 않으면 멀쩡한 옷까지 못 입게 되기 때문에 무척 성가시다. 그래서 오래 머물고 싶은 지역을 만날 때까지 빨래는 최대한 미뤄두었다가 환경이 됐을 때 재빨리 해치우는 쪽을 택한다.


빨래를 너무 오래 못 할 때는 한 번 입었던 옷을 도로 꺼내 입기도 한다. 좀 찝찝하긴 하지만 두 번 까지는 견딜만하다. 그러기 싫은 날엔 새 옷을 사 입는다. 어느 나라든 저렴한 옷가게는 있고 잘 찾아보면 중고샵도 많다. 어쩔 때는 중고샵에서 대박 예쁜 빈티지 원피스를 건질 때도 있다. 쇼핑을 하면 옷도 생기고 기분도 좋아지기 때문에 나는 서슴지 않고 빨래를 미룬다. 어쩌면 나는 새 옷을 사 입기 위해 빨래를 미루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속옷은 열심히 빤다. 팬티는 자기 전에 손빨래했고 브래지어도 최소 이삼일에 한 번은 빨았다. 패드가 달린 브래지어는 아무리 쥐어 짜도 물기를 완전히 제거하기 어렵기 때문에 마른 수건으로 꾹꾹 눌러줘야 한다. 탈수 작업에 사용된 수건은 축축이 젖기 때문에 창가에 널어 이틀 정도 말린다. 수건은 딱 두 개만 가지고 다니기 때문에 젖은 수건이 마를 때까지 남은 하나를 사용한다. 그 하나로 몸도 닦고 머리도 닦고 발도 닦는다. 조금 더럽지만 괜찮다. 서현지가 이만큼 더럽다는 건 서현지만 아는 비밀이고 이 정도 비밀은 누구에게나 있다. 여행 중에는 뻔뻔하게 사는 법을 다양한 각도에서 체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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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로 세탁 세제를 사용하지만 없으면 비누나 폼클렌징도 괜찮았다. 샴푸나 바디워시도 가끔은 쓰지만 거품이 많이 나 헹굴 때 힘들기 때문에 되도록 자제한다. 세제는 마트에서 구입할 수도 있지만 웬만하면 구멍가게에서 파는 일회용 세제를 쓴다. 베낭 무게를 늘리지 않기 위해서다. 일회용 세제를 대여섯 개쯤 사다 배낭에 쟁여두면 최소 보름은 쓴다. 필요할 때마다 똑똑 뜯어 양동이에 푼 뒤 세탁물을 넣고 10분쯤 발로 밟아주면 끝이다.


빨래를 밟는 것은 단순하고 반복적이며 지루하기 때문에 나는 의식적으로 딴생각을 한다. 떠올리는 것들은 그때그때 다르다. 대부분은 며칠 전에 만난 사람들이나 그때 했던 말들, 후회되는 행동, 그때로 돌아간다면 그 말 대신 이 말을 해야겠다, 같은 것들이다. 기억 소환하는 일을 계속 하다 보면 감각이 서서히 흐려지며 머리가 몽롱해지는데 이때 정신을 한 번씩 붙잡지 않으면 높은 확률로 중심을 잃고넘어졌다. 그래서 발빨래를 할 때는 반드시 세면대나 수건걸이를 단단히 붙들어야 한다. 아직 빨래를 하다 다친 적은 없지만 혹시 일어날지 모를 일을 상상하며 나는 자주 몸을 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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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게임은 탈수부터다. 여름 옷은 그나마 나았지만 후드티나 겨울 바지는 이야기가 달랐다. 두꺼운 세탁물은 물기가 한 방울도 없을 때까지 꽉꽉 짜야 하는데 이 과정에서 나는 자주 손톱을 다치거나 손목을 삐끗했다. 이런 순간이 오면 문명의 혜택으로부터 돈까지 써가며 멀어져온 걸 왕왕 후회하기도 한다.


다행히 하이랑카에는 세탁기가 있었다. 손님 대여용은 아니지만 슬쩍 히란에게 말해 허락을 받았다. 히란은 나를 많이 챙겼다. 아마도 서양인들 사이에서 소외감을 느낄까 봐 염려하는 것 같았는데 마음은 고맙지만 딱히 그렇지는 않았다. 나는 누구하고도 잘 지내지만 아무도 없으면 더 잘 지냈다.


세탁기는 본관과 별관사이를 이어주는 복도에 있었다. 약간 동전 노래방 같은 냄새가 나는 복도에는 양파 망, 깎다 만 감자, 치우다 만 쓰레기 같은 것들이 조금씩 굴러다녔다. 세탁기 옆에는 섬유유연제로 추정되는 액체가 담긴 커다란 통이 있었는데 색이 너무 형광펜 색깔이라 대충만 봐도 건강에 몹시 해로울 것 같았다.


티셔츠와 겉옷 몇 개, 한국에서 산 바지 두 벌과 수건을 세탁기 안으로 쑤셔 넣었다. 이불빨래용 세탁기라 옷감을 다 넣고도 공간이 넉넉했다. 동행이 있었다면 모아서 같이 돌려도 좋았으련만. 혼자 여행하다보면 이런 비효율적인 순간이 자주 찾아온다. 물높이와 세탁 강도는 수동으로 조절하면 되었다. 뚜껑에 LG 마크가 커다랗게 붙어있었지만 어쩐지 한국 것과는 사용법이 달랐다. 나는 모든 설정을 '중간'으로 맞춘 뒤 작동 버튼을 눌렀다. 설정을 대충 하면 빨래도 대충 되겠지만 대충대충 사는 것은 편했기 때문에 나는 자주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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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탁기가 돌아가는 동안에는 기계가 해줄 수 없는 것을 했다. 여행 중에 산 저렴한 옷들은 대부분 물 빠짐이 심하기 때문에 따로 골라 손세탁을 해줘야했다. 옛날에는 빨래 분리작업을 깜빡해 자주 옷을 버렸는데 그 때문에 수건이나 티셔츠는 자주 얼룩덜룩했다. 이번에는 인도 뉴델리에서 산 파란색 코끼리 바지를 빨아야 한다. 세면대에 바지를 쑤셔 넣고 꾹꾹 누르자 조그만 세면대에 파란색 인도가 꽉 찼다.


노동을 끝내니 배가 고팠다. 아침은 빵으로 대충 먹었는데 스리랑카 빵들은 밀도가 낮고 푸석해 돌아서면 배가 고팠다. 점심메뉴는 파스타로 정했다. 마침 어제 사둔 파스타면과 토마토 소스가 있었다. 요리 준비하는 소리를 듣고 히란이 다가왔다.


"지아. 점심 만들어?"

"응. 나가기 귀찮아서."


히란은 마늘과 양파를 빌려줄 테니 스파게티를 약간만 나눠 달라고 제안했다. 그는 커다란 주방을 가졌지만 요리는 잘 못 하는 것 같았다. 주방이모가 삼시세끼를 챙겨주지만 그는 계속해서 뭔가를 먹거나 먹고 싶어했다. 그러면서도 키 크고 날씬했다. 제안은 바로 승락했다. 마늘이랑 양파는 토마토 스파게티와 잘 어울리는 재료였고 무엇보다 이걸 핑계로 같이 밥을 먹을 수 있을 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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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요리를 시작할 때에 맞춰 주방이모님도 식사 준비를 시작했다. 히란과 매니저의 점심 식사를 차리는 것은 그녀의 업무 중 하나다. 가스레인지가 작았기 때문에 요리하는 동안 이모님과 손이나 발이 자주 닿았다. 이모님의 손은 겉으로는 거칠어 보였는데 막상 닿으니 엄청 부드러웠다. 그러면서 따뜻하기까지 했다. 여전히 주방이모님은 나를 어려워했다. 그래도 이틀 지났다고 이제는 웃기도 하고 먼저 말도 걸었다. 이모님의 말은 한국어도 영어도 아니지만 어쩐지 나는 알아들을 수 있었다. 내가 알아듣는다는 것을 이모님도 아는 것 같았다.

요리를 마치고 테이블에 앉았다. 히란은 커리 접시와 스파게티 접시를 양손에 하나씩 들고 씩 웃었다. 하얀색 이빨이 잇몸에 빼곡했다.

히란과 매니저는 각각 내 오른쪽과 맞은 편에 앉았다. 이모님은 자리에 없었다.


"히란. 이모님은 어디 갔어?"

"응, 그분은 항상 혼자 식사해"

"왜?"

"나도 모르지."


히란은 으쓱 어깻짓을 한번 하곤 밥을 먹었다. 매니저는 앉자마자 이미 맨손으로 밥알을 뭉치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이모님이 왜 밥을 함께 먹지 않는가에 대해 관심이 없어보였다.


복도로 나가보니 이모님이 세탁기 옆에 쭈그린 채 식사를 하고 있었다. 이모님의 작은 등을 세상을 동그랗게 짊어지고 있었다. 슬쩍 다가가 들어가서 같이 밥 먹자고 손짓했다. 이모님은 손사레 쳤지만 그래도 팔을 잡고 일으키니 슬그머니 일어나셨다. 이모는 테이블의 가장 끝, 우리와 가장 먼 모서리에 간신히 걸터 앉았다. 하이랑카를 오픈한 이후 이모님과 함께 밥 먹는 건 오늘이 처음이라며 히란이 말했다. 그녀가 혼자 밥 먹는 이유를 유추해보며 파스타를 먹었다. 떨어져 앉은 거리만큼 이모님은 우리와는 조금 멀리 있는 사람 같았다.


맨손으로 밥 먹는 사람들 사이에 앉아 포크를 놀렸다. 커리에 고기를 넣지 않는 사람들. 날림 쌀을 손으로 뭉칠 줄 아는 사람들. 얼굴을 매일 보지만 밥만큼은 같이 먹지 않는 사람들 사이에서 음식은 천천히 천천히 줄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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