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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현지 Feb 24. 2020

05. 개같이 벌어 자카르타

나는 갑자기 아주 많은 돈을 벌고 싶어졌다


2년 동안 취업 준비를 했지만 상경에 실패했다


내로라하는 회사의 카피라이터가 될 수 있었는데. 자랑스러운 딸이 될 수 있었는데. 취준생에게 뭔가 될 뻔했다는 가정은 의미 없다. 취업은 단계의 문제가 아니라 결과의 문제기 때문에 1차에서 떨어졌든 마지막에 떨어졌든 어쨌든 실패는 실패일 뿐이었다. 바닥난 인내. 떨어진 자존감. 더는 물러설 곳이 없다 판단했을 때, 나는 카피라이터가 되기를 포기하고 대구에 있는 마케팅 회사에 입사했다.


회사는 직원들의 체력을 갈아 넣어 굴러가는 전형적인 지방 소기업이었다. 규모는 작은데 일은 많았기 때문에 사원들은 자주 밤을 샛다. 야근비도 없고 철야를 해도 택시비조차 못 받았지만 모든 사회 초년생들이 그렇듯 잘 몰랐기 때문에 꾸역꾸역 다녔다. 우리 회사는 4층에 있었는데 새벽 두 시까지 운영하는 5층 독서실보다 항상 늦게 불을 껐다. 불 꺼지지 않는 4층 사무실의 정체에 대해 궁금해하는 사람은 5층 독서실 사장님 말고도 많았다.

당시 건물주였던 아주머니는 1층에서 카페를 운영했다. 카페는 감각이랄 것 없이 중구난방으로 꾸며져 있었는데 각 모서리마다 인테리어 컨셉이 달랐다. 입구 쪽에는 여인숙 대기실을 연상시키는 오래된 소파가 놓여있고, 반대쪽에는 SNS에서 유행하는 방 꾸미기 콘텐츠에서나 볼법한 별로 안 비싸 보이는 심플한 탁자가 놓여있었다. 창문 한편에는 아주 비싸 보이는 원목 블라인드가 걸려 있었는데 그 블라인드 옆으로 먼지 앉은 뻐꾸기를 반쯤 토해낸 촌스러운 시계가 1시 30분에서 멈춘 채 손님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하나하나 보면 예쁘지만 모아놓고 보면 되게 이상한 카페에서 우리는 자주 아메리카노를 마셨다. 퀭한 얼굴로 커피를 물처럼 마시는 우리를 보며 사장님을 자주 혀를 찼다. 도장을 열 개 모으면 커피 한 잔을 더 주는 쿠폰은 야근 횟수가 늘어날수록 빠르게 채워졌다.





나는 콘텐츠를 기획하거나 사진을 찍거나 글 쓰는 일을 담당했다. 인물 취재 후 보도기사를 쓰거나 온라인상에 배포될 홍보자료를 만드는 게 주 업무다. 홍보자료는 대부분 글로 제작하지만 가끔 디자인 작업도 필요하기 때문에 포토샵도 알음알음 배웠다. 회사에는 디자인을 담당하는 팀이 따로 있지만 어쩐지 일을 맡기면 화를 냈다. 이게 바로 네 일이라 말할 수 없던 신입들은 울며 겨자 먹기로 그 일까지 했다. 기획팀 사원들이 어설프게 만든 이미지들은 자주 관공서 홈페이지 배너나 정치인들의 온라인 연하장 배경으로 사용되었다. 이때 야매로 배워놓은 포토샵 기술은 훗날 여행 콘텐츠를 만들어 팔아먹는 직업을 갖게 하는 데 큰 발판이 되었다.


정해진 업무를 해내면서 새 프로젝트 입찰 준비까지 맡았기 때문에 아주 바빴다. 신입은 물론이고 대리나 팀장까지 한 사무실에서 밤을 샛다. 별이 지고 해가 뜰 때까지 제안서 회의를 했고 힘에 부칠 때는 회의실 테이블에 담요를 깔고 새우잠을 잤다. 집이 먼 직원들은 퇴근 후 돈을 모아 근처 모텔에서 잤다. 모텔 대실비는 각자의 택시비를 모은 것보다 월등히 저렴했다. 허름한 모텔에서 고작 서너 시간을 보낸 직원들은 왠지 손해 보는 기분에 모텔용 공짜 음료수를 부득불 챙겼다. 우리 팀 탕비실에는 처음 들어본 브랜드의 생수와 비매품 딱지가 빨갛게 붙은 옥수수수염차가 넘치도록 있었다.  


입찰에 성공하면 새 프로젝트를 준비하느라 밤을 샛고, 유찰이 되면 왜 실패했는지 분석하느라 또 늦게까지 남았다. 밤샘 작업이 며칠씩 이어지던 날엔 직원의 부모님으로부터 항의 전화가 걸려오기도 했다. 발신자는 신입 직원의 아버지였는데 그 전화를 받은 게 하필 나였다. 아버지는 이제 막 대학 졸업한 남의 집 귀한 딸 데려다 뭣 하는 짓이냐고 소리를 질렀다. 너희가 무슨 삼성급으로 월급을 주느냐, 하다못해 야근비를 챙겨주길 하냐, 왜 애를 며칠째 안 보내냐며 온갖 고함을 쳤다. 나는 이제 막 대학을 졸업해 삼성만큼 일을 시키지만 야근비는 안 주는 막돼먹은 회사에서 근무하는 따님의 입사 동료라고 인사하며 아버지를 차근차근 달랬다. 


'차라리 진짜 삼성이면 야근비라도 받지요.'


웃기게도 누가 흠씬 회사 욕을 해주니 속이 좀 나아졌다. 조금 보상받는 것 같기도 했다. 물론 진짜로 받을 수 있는 보상이란 아무것도 없었지만 말이다.


내가 다닌 회사의 딱 하나 내세울 만한 장점은 휴가를 편하게 쓸 수 있었다는 거다. 프로젝트가 끝나면 직원들은 긴 휴식에 들어갔다. 말이 휴식이지 본질은 요양에 가까웠다. 직원들은 이 시기에 병원을 오가며 침을 맞거나, 고향에 내려가 엄마가 해준 집 밥을 먹거나, 회사와 연락을 끊고 해외로 날랐다. 연차는 길게 이어붙여 쓸 수 있었기 때문에 짧으면 일주일, 명절까지 활용하면 보름 이상도 쉬었다.




자카르타 여행을 택한 것도 이때쯤이다


당장 사표를 쓰고 싶을 만큼 노동에 빡쳐있었을 무렵, 다행히 준비하던 프로젝트가 성공했고 나는 홀가분한 마음으로 휴가원을 제출했다. 단언컨대 이때 휴가원이 반려되었더라면 높은 확률로 회사와의 연은 끊겼을 것이다. 


인도네시아로 결정한 건 비행기 표가 싸면서도 그나마 덜 흔한 여행지였기 때문이다. 옵션에는 태국이나 대만, 일본도 있었지만 너무 가깝거나 뻔한 나라는 싫었다. 개같이 번 돈을 흡족하게 써 마땅한 나라가 필요했다. 인도네시아는 그 중 적격이었고 내가 좋아하는 인도랑 이름이 비슷한 것도 목적지를 결정하는데 큰 몫을 했다. 인도네시아의 수도가 자카르타라는 걸 처음 인지하며 나는 티켓을 결제했다. 이 정도 돈을 무리 없이 소비하는 느낌은 꽤 좋았다. 직업을 가진 후 처음으로 느낀 돈의 맛이기도 했다. 

자카르타까지 어떻게 갔는지는 기억나는 게 없다. 열흘 치 콘텐츠를 미리 만들고, 만든 결과물을 날짜별로 예약 거는 작업을 하느라 며칠 내내 밤을 샛기 때문이다. 비행기에 타자마자 잠에 빠져 들었는데 눈 떠보니 이미 소카르나하타 공항에 도착해있었다. 기내식을 건너 뛴 최초의 비행이었다. 


숙소에 도착해서는 잠만 잤다. 열여섯 시간 정도 잔 것 같다. 중간에 쉬가 마려워 깼다가 화장실을 다녀와 다시 잤다. 그러는 동안 여러 꿈을 꿨는데 무의식은 현실을 정직하게 반영했다. 꿈에서도 나는 회의를 하거나 클라이언트로부터 걸려온 전화를 받았다. 좆같은 클라이언트는 금요일 퇴근 시간에 일을 던져주고 월요일 오전까지 시안을 보내달라고 했다. 불가능하다고, 심지어 그 일은 우리 과업에 없는 사항이 아니냐 소리치고 싶은 걸 꾹꾹 참다가 잠에서 깼다. 꿈에서조차 을인 나는 너무 싫었다. 비현실에서조차 '안 된다' 말하기 어려운 건 비루했다. 그래도 어쨌든 꿈이니까 좀 다행이다 생각하며 다시 잤다. 세상에 다시 잠드는 것만큼 쉬운 일은 없는 것 같았다. 




호텔 밖으로 나간 건 허리가 아플 만큼 자고 난 뒤였다. 그리고 배가 너무 고팠는데 나는 잠드는 데도 에너지가 필요하다는 걸 처음 알았다. 한국에서 챙겨온 컵라면이 있지만 그걸론 부족했다. 좀 더 양질의 것을 먹고 싶었다. 무엇보다 이제 바깥이 궁금해졌고 일단 돈을 쓰고 싶었다. 크기와 질감이 어색한 지폐를 주고받는 건 비로소 여행이 시작되었다는 가장 확실한 근거일지 몰랐다. 호텔 바깥으론 인파가 뜸하게 지나고 있었다. 호텔은 시내에서 떨어진 곳이자 공항 근처였다. 좀 더 노는 것처럼 놀려면 타운으로 가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나는 만 오천 원이 넘는 택시비를 들여 시내로 이동했다. 중간에 돈을 내야 하는 톨게이트도 지났다. 고속도로를 탄 것 같았다. 기사는 내릴 때 톨게이트 비를 두 배로 불려 말했지만 모른 척 계산했다. 실랑이를 하고 있기에 자카르타의 시내는 지나치게 매력적이었다. 어서 빨리 택시에서 내려 인파에 섞이고 싶어 죽을 것 같았다. 인도인과 비슷하지만 다르게 생긴 사람들이 인도의 것과 다르지만 비슷한 모양의 음식을 먹으며 거리에 앉아 있었다. 히잡을 둘러쓴 무슬림 여자는 작은 보폭으로 종종 거리를 지나고 그 여자 옆으로 코코넛 주스를 파는 상인이 호객을 했다. 건물 벽 곳곳에는 화려하게 생긴 여자가 웃고 있는 포스터 위에 왠지 무슨 뜻인지 알 것 같은 인도네시아어가 화려하게 적혀 있었다. 



맛있는 냄새를 풍기는 고기 꼬지 수레와 벌이 날아다니는 과일 수레 사이에는 고양이가 눈을 가늘게 뜨고 낮잠을 잤다. 거리에 고양이는 아주 많았다. 어른 고양이도 있고 아기 고양이도 있고 아주 비싸 보이거나 한국에서도 많이 본 것 같은 흔하게 생긴 고양이도 있었다. 고양이들은 인파 사이를 겁 없이 막 지나다녔는데 가끔은 동냥하는 홈리스들 사이에 누워 애교도 떨었다. 너무 마음에 드는 거리에서 나는 잠으로 하루의 절반을 날린 걸 후회하며 밥을 먹었다. 자카르타에서 처음 먹은 밥은 나시고랭이었다. 약간 간이 덜 된 간장밥 같은 맛이었다. 입안에서 찰기 없이 마구 돌아다니는 쌀알을 혀로 쫓으며 다음은 어디로 갈지 고민했다. 식후에 마시는 콜라는 너무 맛있었다. 


바깥은 아주 더웠지만 그래도 걷는 건 좋았다. 자카르타에는 바타비아라는 엄청 유명한 커피숍이 있는데 루왁 커피를 마셔보기엔 최적의 장소라며 파워 블로거들이 열심히 홍보하고 있었다. 나는 바이럴 마케터들의 꼬임에 기꺼이 넘어갈 마음의 준비를 하며 바타비아로 걸었다. 걷는 동안 아주 비싸 보이는 건물과 다 쓰러져가는 판잣집이 번갈아 나타났다. 뚝뚝꾼들이 간간이 호객을 하거나 팔찌나 목걸이를 파는 아이들이 불쌍한 표정으로 맴돌다 사라졌다. 음악도 듣고 싶고 거리의 소음도 듣고 싶어 이어폰을 한쪽만 꽂고 열심히 걸었다. 음악은 버블 시스터즈가 부른 '하늘에서 남자들이 비처럼 내려와'를 한 곡 반복했다. 시디플레이어 세대에서 MP3 세대로 넘어가는 끝자락에 들었던 곡이다. 야자 시간에 교복 안쪽으로 이어폰을 통과시켜 몰래 들었던 무수한 음악 중 가장 신나는 곡을 선택해 박자에 맞춰 신나게 걸었다. 고개를 끄덕이며 리듬을 타는 우스꽝스러운 동아시아 여자를 보고 사람들은 피식피식 웃었다. 누구는 반갑게 손 인사를 해주기도 했다. 모르는 사람들에게 비웃음을 사거나 볼거리가 되어주는 방식으로 자카르타 여행은 조금씩 재미있어졌다. 



카페는 광장 한가운데 있었다. 만국기가 휘날리는 바타힐라 광장에는 여러 인종의 사람들이 비눗방울을 불거나 사진을 찍거나 자전거를 탔다. 인도네시아인도 있었지만 자카르타에 사는 사람들 같지는 않았다. 바타힐라 광장은 머물러 살기보다 잠깐 왔다 사라지기에 적합한 장소였다. 외국인이 아주 많기 때문에 약간 이태원 같기도 했다. 그 가운데 있는 바타비아 카페는 대충 봐도 명소일 것 같은 모습이었다. 블로그를 검색하지 않았더라도 오가며 한 번쯤은 들렀을 법 했다. 


카페 안은 아주 조용했다. 2층으로 연결되는 로비에는 카펫이 깔려 있고 벽면에는 잘못 건드렸다가는 큰일 날 것 같은 그림들이 빼곡히 걸려 있었다. 바닥부터 천장까지 온갖 값나가 보이는 것들이 가득했다. 작정하고 엔틱 컨셉을 잡은 인테리어였다. 음악은 조용한 클래식 위주로 나왔는데 내가 아는 것도 있고 모르는 것도 있었다. 손님이 별로 없는 이유는 메뉴판을 받자마자 바로 알 수 있었다. 음식값이 무지 비쌌던 것이다. 커피 한 잔이 현지인들 한 끼 식사보다 훨씬 비쌌다. 바타비아는 높은 가격을 벽처럼 세워 고급스러움과 고요함을 유지하는 곳이었다. 카페 손님들은 2층에서 사람들을 내려다보며 밥을 먹거나 커피를 마셨다. 밥 값에는 여러 가지 특권과 기분과 공간에 대한 대가가 포함된 듯했다. 비싸다고만은 할 수 없을지 몰랐다. 나는 루왁 커피를 주문했다. 사향 고양이의 입과 위장과 항문을 통과해 나온 원두를 갈아만들었다는 바타비아의 시그니처 메뉴다. 잘 상상되지 않는 맛을 궁금해하며 밥값 이상의 돈을 지출하기로 결정했다.




커피를 기다리는 동안 와이파이를 연결했다. 업무를 인계받은 직원으로부터 메시지가 와 있었다. 휴무 때 받는 업무 연락은 달갑지 않지만 막상 나 없이 회사가 너무 잘 굴러가는 건 어쩐지 싫었다. 나의 부재에 쩔쩔매는 사람을 만나는 건 조금 흡족했다. 직원에게 답신을 보냈다. 그 파일은 어디에 있다고. 그럴 땐 이렇게 대답하면 된다고. 그건 언제까지 어디로 제출하면 된다고. 그녀는 1층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며 야근하는 중이라고 했다. 오래된 소파에 앉아 아메리카노를 마시는 직원과 그녀의 정수리를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을 뻐꾸기를 상상했다. 이틀 전에 나도 앉아 있었던 자리였다. 그녀는 회사에 비상이 터져 당분간 철야를 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소식을 전했다. 동료들에게는 미안하지만 갑자기 일을 안 해도 된다는 사실이 너무 구체적인 기쁨으로 다가왔다. 자카르타에 머물 기간이 일주일도 넘게 남았다는 사실이 무럭 실감 났다. 잘 수 있고 놀 수 있고 지금은 커피만 홀짝이면 된다는 것도 좋았다. 인도네시아는 너무 더웠기 때문에 기뻐하는 와중에도 땀이 났다. 좋아서 어쩔 줄 모르는 사이 커피가 나왔다. 자카르타의 날씨만큼 뜨거운 커피였다. 



창밖을 내려다보며 흙 맛 나는 커피를 호호 식혀 마셨다. 광장에는 자전거와, 솜사탕 파는 상인과, 지폐를 건네는 손님과, 손짓 발짓을 하는 여행객들이 있었다. 노동의 대가로 받은 월급은 인도네시아에서 커피로, 나시고랭으로, 시간이나 공간의 형태로 다양하게 소비됐다. 맞바꾸기에 충분히 가치 있는 것들이었다. 모두 내 스스로 만들어낸 순간이기도 했다. 커피가 너무 맛있다고 느낀 순간 나는 갑자기 아주 많은 돈을 벌고 싶어졌다. 돈이 많다면 현실과 분리될 기회가 자주 생길 것만 같았다. 그건 상상만 해도 기분 좋아지는 일이었다. 어떻게 하면 좀 더 많이 벌 수 있을까. 문득 야근비도 받고 택시비도 꼭 받고 싶어졌다. 계속 돈이 있는 삶을 살면 행복할 텐데. 그것도 가능하다면 아주 많이. 그런 날이 언젠가 온다면 바타비아에 자주 와야지. 하지만 그날은 무척 늦게 오거나 어쩌면 안 올지도 모르기 때문에 나는 루왁 커피를 여러 번에 나누어 천천히 마셨다. 



자카르타에서 먹은 소고기 요리
인도네시아는 수분이 많이 필요한 나라다
바타비아
동남아니까
야시장
카페 바타비아에 아주 자주 갔다
첫날 묵었던 숙소
바타비아에는 커피외에 요리도 판다
묵직한 분위기가 좋다
커-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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