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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현지 Feb 10. 2020

04. 캐나다 워킹홀리데이2

단풍국에서도 기승전 알바 잘못



캐나다에 있는 동안 나는 열심히 일했다


집주인 덕에 월세는 아주 조금만 냈지만 먹거나 입는데도 돈이 필요했기 때문에 쉬지 않고 몸을 움직였다. 

일은 한식당과 일식당에서 했다. 한식의 뚝배기나 일식의 야끼 철판은 알바생들의 야들야들한 손가락이나 팔뚝을 자주 구워 먹었다. 불에 덴 부위는 엄청 아프고 상처도 크게 남기 때문에 한 번 다쳐본 알바들은 불 다루는 업종을 꺼렸다. 그래도 나는 가게를 바꾸지 않고 계속 같은 곳에서 일했다. 일단 일 구하기가 너무 어려웠고, 어쨌든 힘든 일을 하면 많이 벌 수 있기 때문이다.


한식당에서는 다양한 메뉴를 팔았다. 비빔밥이나 찌개, 감자탕이나 제육볶음은 물론이고 짜장면이나 짬뽕, 우동도 취급했다. 손님의 절반은 한국 사람이고 그 손님의 절반은 어리고 돈 없는 유학생이었다. 다운타운에는 만 원으로 밥과 국물, 반찬과 차까지 제공되는 식당을 찾기 어렵기 때문에 학생들은 가성비 좋은 몇 곳을 찍어두고 거기만 찾아다녔다. 그 리스트에는 내가 일한 한식당도 포함이었다.





캐나다에서는 뭐든 추가하면 돈을 받았다. 소스나 밑반찬에도 추가금이 붙었다. 물은 수돗물을 컵에 따라 무료로 제공하지만 정제된 통이나 병에 든 물을 원한다면 추가금을 지불해야 한다. 거기다 음식에 붙는 세금과 서버들의 팁은 별도기 때문에 제대로 된 한 끼를 먹으려면 만 오천 원을 훌쩍 넘는다.


내가 일했던 한식당 사장님은 학생들을 배려해 리필 반찬에 추가금을 받지 않았다. 반찬은 김치나 나물, 감자조림 등을 제공했는데 몇 번이고 계속 리필이 가능했기 때문에 어떤 학생은 도시락 통을 가져와 몰래 나물을 싸가기도 했다. 반찬이 무한 제공되니 악용하는 손님도 적지 않았다. 네 명이서 찌개 두 개를 시키곤 반찬으로 배를 채우는 경우도 빈번했다. 도가 지나치다 싶은 날에는 단 돈 500원이라도 추가금을 받자고 건의해봤지만 사장님은 고개를 저었다.


"우리까지 그러면 돈 없는 학생들은 어디서 밥 먹니. 

한 끼로 하루 종일 버티는 애들이 얼마나 많은데."


유학까지 온 학생들이 돈 없어 굶주린다는 게 이해되지 않았지만 그래도 시키는 대로 했다. 사장님 인심 덕분에 감자도, 나물도, 김치도 매일매일 밑빠진 독에 붓는 물처럼 훌쩍훌쩍 사라졌다.





알바를 많이 해봤기 때문에 캐나다에서는 좀 수월할 줄 알았는데 딱히 그렇지는 않았다. 외국 손님들은 동양인들을 빈번히 무시했고, 한국 손님은 같은 한국인이라는 이유로 대접받기를 바랐다. 

2011년 당시 손님들은 거의 왕이었다. 때문에 알바들은 잘못하지 않아도 자주 고개를 숙였다. 손님이 착각한 것도 알바 탓, 날씨가 궂은 것도 알바 탓, 맘에 드는 반찬이 없는 것도 기승전 알바 탓. 몇몇 진상들은 한국에서 하던 갑질을 캐나다에서도 했기 때문에 고달픈 순간이 자주 찾아왔다. 그래도 버틸만했다. 캐나다 시급은 한국의 세배였고 적어도 사장님이 우리 편이었다. 


한 번은 중년의 한국 손님이 찾아와 미네랄워터를 주문했다. 나는 추가금이 붙는 메뉴라고 설명했고 동의하에 서빙했는데 계산할 때가 되니 손님은 같은 한국인끼리 정 없이 물값까지 받아야겠냐고 소리 질렀다. 네가 그렇게 융통성이 없으니 캐나다에서 한식 서빙이나 하는 거라고. 세상 천지에 물값 받는 한식당이 어디 있냐고. 한참 멍멍멍 소리를 듣고 있는데 사장님이 나오셨다. 어처구니없게도 손님은 사장이 나타나자 바로 입을 다물었다. 언제 그랬냐는 듯 아이고 타국에서 고생하신다며 인사도 건넸다. 얼마나 어이가 없던지. 대체로 국적을 불문하고 멍멍이들은 사람을 봐가며 짖는 것 같았다. 


진상은 차고 넘쳤다. 500원 남짓 팁을 주고선 전화번호를 달라던 손님, 짜장면 하나로 셋이서 나눠먹고 앞접시 세 개와 식기 세 세트와 김치 리필 다섯 번을 요구한 뒤 양이 적다고 컴플레인 하던 가족, 식후에 커피 좀 타와보라며 알바들을 다방 레지 취급하던 사람. 진상의 싹이 보이는 테이블에는 어김없이 사장님이 출격했다. 보호받을 틈 없이 불시에 막말을 들은 날 사장님은 두 배로 바빴다. 하루 종일 알바들 눈치를 보며 달래는 역할까지 했기 때문이다. 나가서 간식을 사 온다거나 메뉴에 없는 특별식을 만들어주는 방식으로. 우리는 챙김 받는 느낌이 좋아 일부러 상처받은 표정을 짓곤 했다. 이런 건 사실 진상 축에도 못 끼지만. 그냥 뭐가 짖는구나 하며 넘길 수 있지만. 그래도 반나절 정도는 속상한 연기를 했다. 그러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사장님이 말했다. 


"그래도 화내지 않고 침착하게 잘 대처했네. 고맙다 얘들아."


예쁜 말로 호호 불어주는 느낌은 간지럽고 좋았다. 잘못하지 않은 일에 안 죄송해해도 되는 건 진짜로 신기했다. 사장님이 잘 버텨주었기 때문에 우리는 쓸데없이 고개 숙이지 않았고, 녹초가 되어 퇴근하면서도 다음날 출근이 두렵지 않았다. 그렇게 알바들은 조금씩 자랐다. 제대로 된 사장 밑에서, 책임과 권리라는 건 바로 이렇게 만들고 행사하는 것임을 매일매일 배우면서.





그래도 진짜로 잘못한 일에는 제대로 혼났다. 알바들은 돌아가며 사고를 쳤는데 나는 그중에서도 좀 굵직한 실수를 자주 했다. 


한날은 시금치 알레르기가 있는 백인 손님에게 시금치 든 비빔밥을 서빙하는 대형 사고를 쳤다.


"나는 서버에게 분명히 말했어요. 시금치를 빼달라고."


할 말이 없었다. spinach를 무로 착각했다는 사실을 털어놓으면 더 크게 혼날 것 같았다. 손님이 시금치를 미리 발견했기 때문에 큰 사고는 없었지만 더 이상 이 가게를 믿을 수가 없다며 짐을 싸서 나가버렸다. 이날 사장님은 근무시간 내내 나와 눈을 마주치지 않는 것으로 벌을 대신했다. 굳은 표정으로 내가 가는 동선마다 일부러 피해 다녔다. 죄송하다고 말하고 싶은데 기회를 주지 않았다. 차라리 대차게 혼나는 게 낫겠다 싶을 만큼 겁먹었을 무렵, 사장님이 다가와서 말했다. 


"현지야. 영어 공부 열심히 하자. 

외국에서는 말귀 잘 알아듣는 놈이 최고야."





그날부터 다시 영어 공부를 시작했다. 

야채명을 모조리 영어로 적어 달달 외웠다. 가게에서 취급하지 않는 야채도 몽땅 적고 발음이 자연스러워 질 때까지 연습했다. 최고가 될 생각까지는 없지만 적어도 시금치만큼은 죽어도 안 까먹겠다고 결심했다. 안다고 생각했던 것도 다시 쓰고 듣고 발음하면서 찔끔찔끔 울었다. 왠지 모르겠지만 공부하는 내내 자꾸 눈물이 났다. 


bamboo shoot, cabbage, white radish, bean sprouts, bracken...


외국에서는 말귀 잘 알아듣는 놈이 최고야. 

뭔가가 가슴을 진하게 쓸고 지나간 것 같았다. 


여러 가지 실수 덕분에 나는 캐나다에서 영어 공부를 아주 열심히 했다. 

단어도 외우고 리스닝 연습도 매일 했다. 덕분에 조금 뒤엔 빅토리아 대학교에서 한국어 선생님으로 봉사활동을 하며 현지 친구들도 만났다. 훗날 큰 고생 없이 토익 점수를 만들 수 있었던 것도 분명 캐나다에서의 시간이 있었기 때문이리라. 한식당에서는 나는 많은 것들을 몸으로 통과시켰다. 귀로 듣고 입으로 뱉어낸 수천 가지의 단어와, 꼬박꼬박 벌어낸 월세, 노동의 가치와 잘못의 기준. 사과의 무게와 반성의 의무. 좋은 집주인과 사장님. 사람. 


워킹홀리데이는 인생에 꼭 한 번쯤 겪어볼 만한 것이라 자신 있게 말할 수 있게 되었을 때쯤, 나는 한국행 비행기를 탔다. 스물다섯에서 스물여섯으로 넘어가던 겨울이었다.



여름부터 겨울이 갈 때까지 살았던 오크베이 집
빅토리아 이너하버
그때의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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