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서현지 Jan 24. 2020

03. 캐나다 워킹홀리데이

캐나다 횡단열차. 나는 캐내디언들의 소통 방식이 기괴하게 느껴졌다




캐나다 횡단 열차는 밴쿠버에서 출발해 5일 뒤 토론토에 도착한다.



오래 걸리지만 비용은 비행기로 가는 것보다 훨씬 비싸다. 

비싸면서도 느린 여행을 선택한 이유는 열차가 로키산맥을 지나기 때문이다. 나는 캐나다에 살면서도 로키산은 못 가봤다. 처음엔 돈이 없었고, 돈이 모인 후엔 좀 더 모으고 싶어 미뤘다. 그렇게 그 예쁘다는 여름 로키를 놓쳤고 그 사실을 뒤늦게야 후회했다. 그래도 이 열차를 차면 설산만큼은 볼 수 있겠지. 겨울 로키도 꽤 볼만하다던데. 5일짜리 횡단열차를 선택한 걸 부디 후회하지 않길 바랐다.


배정된 호차에 올랐다. 히터를 틀지 않은 기차는 바깥만큼이나 추웠다. 숨을 내뱉자 입김이 무럭 나왔다. 자리는 두 사람씩 마주 보는 구조다. 두 사람은 정방향이지만 나머지 두 사람은 등으로 달려야 한다. 내 자리는 그중 창가 쪽. 창가 자리는 훨씬 춥지만 바깥이 잘 보이고, 무엇보다 덜 일어서도 된다. 게으른 데다 오줌 오래 참기에 특출난 재능이 있는 나는 그래서 늘 창가 쪽만 예약한다.



의자 아래에 캐리어를 밀어 넣었다. 청소는 대체로 안 하는 건지 먼지가 훅 올라왔다. 의자 아래로는 종아리부터 발목까지 받쳐주는 간이 받침대가 있지만 맞은편 사람이 타면 무용지물일 것 같았다. 좌석 간격이 좁기 때문에 네 사람이 모두 탄 다면 정자세로 앉아도 무릎이 닿을 것이었다. 그 상태로 5일을 가야 한다. 침대칸도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있더라도 많이 비싸겠지. 이럴 때면 돈 많은 사람들이 아주 구체적인 형태로 부러워진다. 


밴쿠버는 최초 출발지기 때문에 아직은 자리가 널찍하다. 이대로 아무도 안 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받침대를 높여 다리를 일자로 뻗었다. 장딴지가 풀리며 정수리까지 짜릿해졌다. 겨울 날씨에 몸을 웅크리고 있던 탓이다. 옆 칸에 앉은 서양인 남자도 같은 자세를 취한 채 한숨을 쉬었다. 아우 편해라. 눈을 감고 출발을 기다렸다. 지금 밴쿠버를 떠나면 한 달 반이 지난 뒤에야 다시 돌아올 것이었다. 스물다섯 인생, 가장 긴 여정이 시작되기 직전이었다. 





캐나다에서는 반 년을 넘게 살았다. 

내가 살던 빅토리아는 밴쿠버 바로 옆에 있는 섬이다. 그러면서도 미국 시애틀과도 가까워 가끔 해변 끝으로 나가면 미국 신호가 잡힌다. 워킹홀리데이 비자를 받아 빅토리아로 온 한인들은 틈만 나면 시애틀을 다녀왔다. 시애틀은 빅토리아에서 가장 가까운 미국이자 페리로 세 시간 밖에 안 걸리기 때문에 워홀러들의 단골 휴가지가 되었다. 나도 언젠가 일을 구해서 돈을 모으면 시애틀을 꼭 다녀와야지. 단 돈 150만 원을 들고 캐나다로 온 나는 왠지 죽을 때까지 시애틀은 못 갈 것만 같았다. 영어 못하는 동아시아인은 일 구하기가 너무 어려웠다. 

 

빅토리아는 완전 시골은 아니지만 대체로 시골인 동네다. 번화가가 있지만 웬만해선 조용하며 그마저도 여섯시면 대부분의 가게가 문을 닫는다. 배달문화도 없어 밥도 집에서 해먹고, 마트가 멀어 장을 보려면 버스나 자전거를 타야 한다. 자주 라쿤이 도로를 활보하고 특별한 날엔 순록도 만난다. 버스는 아주 천천히 움직이기 때문에 책을 읽어도 멀미가 안 났고, 탑승한 승객이 완전히 착석해야만 버스가 출발하기 때문에 목적지에 도착하기까지 아주 오래 걸렸다. 느린 기사가 모는 느린 버스에서 빅토리아 사람들은 모두 느리게 하루를 시작했다. 그러면서도 아무도 화내지 않았다. 빅토리아는 조금 답답하고 조용한 동네였다. 


나는 마음씨 좋은 집주인을 만나 아주 적은 돈을 내고 오크베이 부촌에 방 한 칸을 구했다. 집도 일도 안 구해져 하루 3만 원짜리 백패커에서 쩔쩔매던 중 극적으로 구한 집이었다. 월세는 일반 워홀러들이 보름치 방세로 내는 금액보다도 적었다. 땅값 비싼 오크베이에서는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집주인 부부는 가끔 장을 보러 가면 내 몫의 식료품도 사다 주었다. 마당에 자라는 작물도 마음껏 먹게 해줬고 자전거를 세울 공간도 마련해주었다. 부부는 밴쿠버로 나가느라 자주 집을 비웠는데 그럴 때면 친구들을 불러다 재미있게 놀라고 꼭 먼저 말해주었다. 집주인 잘못 만나면 워홀 인생 가시밭길이라던데. 돈이 많은데 착하기까지 한 사람과 같이 산다는 건 이런 거란 걸 온몸으로 실감하며 나의 캐나다 워킹 홀리데이는 시작되었다. 




낮에는 이력서를 돌렸고 남는 시간 대부분은 동네 커피숍에서 영어공부를 했다. 

이 나라 대학생들이 방학을 하는 6월이었다. 정말이지 알바가 더럽게도 안 구해졌다. 


"뭔가를 배운다는 건 늘 좋은 일이지."


커피숍에 앉아 있으면 누군가 꼭 말을 걸었다. 돈 많고 할 일 없는 오크베이 노인들은 심심해 죽겠다는 표정으로 옆자리에 슥 앉았다. 그들의 말 거는 방식은 대중이 없었다. 그들은 나를 원래부터 알았던 사람처럼 대했다. 나는 관계에도 절차라는 게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캐내디언들의 소통 방식이 좀 기괴하게 느껴졌다. 보통 인사를 하고, 여기 앉아도 되냐 묻고, 그다음 이름이 뭔지, 캐나다엔 왜 왔는지, 직업은 뭔지, 이렇게 가야 맞는 거 아닌가? 의문을 품든 말든 노인들은 옆자리에 엉덩이를 걸치고 그때그때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했다.


이 옷 어디서 샀니.

너는 참 꽃 같은 얼굴을 하고 있구나.

저 자전거 네 거니? 무릎이 건강해서 부럽네.


나는 의심스러운 얼굴을 하면서도 다운타운 중고 마트에서 샀다고, 혹시 어떤 종류의 꽃인지 물어봐도 되냐고, 이 자전거를 타고 오늘도 이력서를 열 장 넘게 돌렸는데 열 번 다 까였다고 꼬박꼬박 대답했다. 


노인들은 말을 느리게 하면서도 많이 했고 그러면서도 했던 말을 또 했기 때문에 리스닝 연습에 최적이었다. 

노인들은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찰떡같이 알아들었다. 나는 모든 시제를 현재형으로 말했고 대부분 짧게 대답했지만 그 사이에서도 노인들은 어떻게든 유머 포인트를 찾았다. 오크베이 사람들은 평생 고생이라곤 안 해봤을 것 같은 얼굴로 아이처럼 으헤헤 웃었다. 말이 느리면서도 잘 웃는 그들을 보며 나는 모든 캐내디언들이 다 저렇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다. 작은 베이커리에 이력서를 냈다가 '너 동양인이잖아? 네가 여기서 할 수 있는 일이 뭔데?'라는 말을 들었던 날이었다. 


그들과 대화하는 건 자신감을 키우는데 크게 도움이 됐기 때문에 나는 커피를 마시고 싶지 않은 날에도 커피숍을 갔다. 같은 카페를 매일 가는 동안 몇몇 노인들과 안면을 텄다. 노인들은 아직도 일을 못 구했냐고, 오늘도 옷이 예쁘다고, 케이크를 좀 먹겠냐고 알은체를 했다. 


가장 자주 마주친 사람은 빵모자 할머니였다. 빵모자 할머니는 매일 다른 색깔의 빵모자를 쓴 채 카페에 나타났다. 백발에 키가 아주 작은 할머니는 늘 고급스러운 지팡이를 짚고 느린 속도로 걸었다.


"이 동네에서 보기 드문 젊은 아가씨네."


할머니는 어떤 날에는 나를 알아봤지만 어떤 날에는 생전 처음 본 것처럼 대했다. 처음엔 '어제도 봤잖아요'라고 했지만 며칠 후부터는 '모자가 예쁘시네요'라고 대답했다. 그러면 할머니는 백발 위에 올려진 모자를 살짝 고쳐 쓰며 천천히 웃었다. 오크베이는 웃는 것조차 느린 동네였다.

빵모자 할머니는 같은 말을 또 하는 오크베이 노인들 중에서도 특히나 구간반복이 심한 편이었다. 빵모자 할머니가 가장 좋아하는 레퍼토리는 대부분 어린 시절에 관한 것이었다. 


"그 동네는 참 좋았어. 아마 캐나다에서 제일 예쁜 동네일 거야."


빵모자 할머니는 캐나다 재스퍼에서 태어났다. 재스퍼는 아름답고 평화로웠다. 할머니는 재스퍼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후 토론토로 넘어가 학교를 다녔고, 이후 남편을 만나 빅토리아에 정착했다. 


"토론토에는 아주 많은 것이 있었지. 하지만 재스퍼만 못했어. 재스퍼처럼 예쁘지도, 너그럽지도 못한 동네였지. 그곳에서 나는 오래 공부를 했단다. 재스퍼가 그리워 나는 매일을 울었어. 아마 인생에서 제일 힘든 시기였을 게다."


할머니는 재스퍼의 설산과, 사람과, 바람과, 그곳에서 보낸 가족들과의 시간을 이야기할 때마다 말이 빨라졌다. 가끔은 어려운 단어를 썼지만 그래도 나는 알아들을 수 있었다. 많은 것을 깜빡하는 할머니였지만 재스퍼와 관련한 이야기만큼은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매번 똑같이 말했기 때문이다. 빵모자 할머니는 죽기 전에 재스퍼에 꼭 한 번 다시 가고 싶다고 했다. 왠지 '가면 되잖아요'라는 말이 쉽게 나오지 않았다. 그건 왠지 돈이 해결해 줄 수 없는 문제인 것 같았다. 

재스퍼 스토리의 마무리는 항상 비슷했다.


"나는 네가 부럽구나. 너는 언제든 재스퍼에 갈 수 있잖니."


빵모자 할머니는 영어도 잘 하고 돈도 많은 무시당할 일 없는 백인이지만 그럼에도 나를 부러워했다. 그때마다 나는 '아 할머니, 저 지금 코앞에 있는 시애틀 갈 돈도 없다니깐요. 지금 한국 돌아가야 될 판이에요. 일이 안 구해져서요!' 라고 대답했다. 할머니는 웃었다.  


"너는 기운이 아주 좋은 사람이야. 너는 뭐든 해낼 거야. 나를 믿어보렴."


으, 맨날 똑같은 소리. 

나는 볼멘소리를 하면서도 속으로 가만히 생각했다. 나는 정말로 뭐든 할 수 있는 사람일까. 진짜로 나는 기운이 좋은 사람일까. 할머니는 대체 내가 왜 부러운 걸까. 그러고 보면 살아갈 시간이 많다는 건 돈이 많은 것보다 확실히 나은 일일지도 몰랐다. 나는 알바조차 못 구하는 처지였지만 그래도 내 상황이 썩 나쁘지는 않은가 생각해보았다. 캐나다에서 와서 처음으로 했던 희망적인 생각이었다. 




2



열차는 레일 위를 천천히 달렸다. 밴쿠버의 모습은 빠르게 사라지고 거기서 거기인 것 같은 하얀 풍경이 이어졌다. 세상의 눈이란 눈은 온통 캐나다에만 내리는 것 같았다. 그러는 동안 옆 사람과 앞사람이 타고 대각선 자리까지 사람이 채워졌다. 백인들은 눈인사는 했지만 서로 대화는 하지 않았다. 열차 안이라서인지 그냥 말하기가 싫은 건지는 알 수 없었다. 확실히 빅토리아 사람들과 도시 사람들은 달랐다. 나는 이제 한 달 넘게 여행할 돈도 있고 시애틀 이야기도 할 수 있고 영어 쓸 용기도 생겼지만 정작 대화할 사람이 없었다. 오크베이 할머니들이었다면 분명 옆에서 뭐라도 떠들어주었을 텐데. 이 상태로 5일이나 가야 하다니. 스마트폰이랄 것도 없는 2011년 겨울이었다.  


기차 식당칸


유일하게 말하거나 들을 수 있는 시간은 밥 먹을 때다. 열차에는 식당칸이 있는데 티켓을 사면 제대로 된 한 끼를 먹을 수 있었다. 식당칸은 좁기 때문에 아무나 마구잡이로 합석해서 먹었는데 음식을 앞에 두고 마음이 너그러워진 사람들은 모르는 이에게 마구 말을 걸었다. 

저녁을 먹으러 갔다가 한 독일인 부부를 만났다. 조금 전에 열차에 올랐다던 그들은 내가 코리안인 걸 듣자마자 방금 너희 나라 대통령이 사망했다고 알려주었다. 너무 놀라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들은 그것 때문에 사람들이 충격에 빠졌다고, 뉴스에 온통 그 소식 밖에 안 나온다며 유감을 표했다. 우리나라 대통령이 죽다니. 대체 왜. 잠시 멍하게 있는 동안 그들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미스터 김이 죽다니 정말 놀라운 일이야."

"그러게. 이제 또 어떤 뉴스가 쏟아져 나올지 걱정돼"


나는 미스터 김이 누구냐고, 우리나라 대통령은 이씨라고 말하려다가 조용히 입술을 붙였다. 아무래도 외국인들에게 남한과 북한은 아직 한 덩어리인 모양이었다. 슬퍼하기에도, 아무렇지 않아 하기도 어려운 문제였다. 나는 소식을 전해줘 고맙다고만 했다. 그들의 눈에 비친 내 표정은 어땠을까. 남북 역사에 한 획이 크게 그어지는 동안에도 열차는 계속 동쪽으로 동쪽으로 달렸다. 




졸다가 깨다가를 한참 반복했다. 지금쯤이면 로키산을 지나고 있을 테지만 눈발이 너무 거세 아무것도 안 보였다. 창문 전체가 그냥 하얗기만 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비행기 탈걸. 얼굴에도 슬슬 개기름이 번졌다. 


다리가 참을 수 없을 만큼 저리다고 생각하던 즈음 기차가 멈췄다. 창밖으로 낡고 오래된 역사가 보였다. 기관장은 방송을 통해 이곳에서 한 시간 정도 정차할 예정이며 내부 청소를 위해 전원 하차해줄 것을 부탁했다. 이 역에서 식당칸 식료품도 채우고 화장실 물도 교체하는 모양이었다.


사람들은 한 명씩 바깥으로 나갔다. 나도 옷을 껴입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한참을 구부리고 있던 다리가 비명을 질렀다. 인파를 따라 눈발을 헤치며 역사에 도착하니 선명한 글씨로 역명이 눈에 들어왔다. 


- JASPER


호흡이 잠깐 멈추는 것 같았다. 요일마다 바뀌던 동그란 빵모자가 잠깐 눈앞을 스쳤다. 누군가가 죽기 전에 꼭 오고 싶다던 곳에 함부로 서 있는 기분은 뭐랄까, 벅차고 미안했다. 너무 미안해서 눈물이 와락 날 것 같았다. 역사 뒤로 하얀 눈을 뒤집어쓴 로키산이 우뚝 서 있었다. 


사람들은 역 안에 아무렇게나 눕거나 앉았다. 자리를 못 잡은 사람들은 구석에서 제자리 뛰기를 했고 어린애들은 빽빽 울었다. 내릴 때는 좋았지만 막상 나오고 나니 너무 추웠던 모양이다. 나도 아래턱이 덜덜 떨렸지만 꾹 참고 역을 돌아다녔다. 재스퍼의 무엇이라도 더 눈에 담아 가야 할 것 같았다. 많이 보고 가서 꼭 빵모자 할머니한테 말해줘야지. 재스퍼 잘 있더라고. 로키산이 끝장나게 멋있더라고. 육체가 기억을 놓고 있는 와중에도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오래오래 남을 만하더라고.


역사 구석에는 기념품 부스가 있었다. 부스에는 열쇠고리나 연필, 엽서 같은 것들을 팔았다. 나는 재스퍼 배지와 신생아용 내복을 샀다. 배지는 빵모자 할머니에게 줄 선물이고, 내복은 미래의 내가 낳을지도 모를 아이를 위한 것이었다. 만일 내가 아이를 낳게 된다면 미래에 이 옷을 입혀주며 말해줘야지. 


엄마가 스물다섯 살 때 캐나다에서 어떤 할머니를 만났었단다. 할머니는 엄마에게 너는 뭐든 할 수 있을 거라고, 너는 기운이 참 좋은 아이라고 말해주었지. 할머니가 해준 말은 아주 오랜 세월 동안 엄마를 살게 했어. 재스퍼는 바로 그 할머니가 태어난 동네의 이름이란다 아가. 


나는 빵모자 할머니처럼 느리게 역사를 걸었다. 얼기설기한 바닥의 모양도, 나무로 단단히 엮어 만든 지붕도 눈에 담았다. 여행을 마치고 빅토리아로 돌아가면 할머니한테 자세하게 설명해줘야지. 나는 왠지 먼 훗날 캐나다에서의 행복했던 순간을 설명하라면 주저 없이 지금 이 순간을 떠올릴 것 같다고 예감했다. 아무래도 비행기는 타지 않길 정말 잘 한 것 같았다. 






빅토리아의 어느 구석


빅토리아 이너 하버


집 앞에 살던 고양이


빅토리아 랜드마크



스물다섯의 나


내가 살던 오크베이 집. 집주인과 함께 꾸민 트리.


캐나다 몬트리올


몬트리올 대성당
대성당 내부


스물다섯의 나. 열심히 번 돈으로 여행하는 중.


토론토 나이아가라
캐나다 동부 몬트리올의 저녁




이전 02화 02. 지방러에게 서울이란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