벵겐과 인터라켄 어디쯤에서 우리는 헤어졌다
갑자기 떠나게 됐지만 챙길 게 많지는 않았다
가방 안에 여권과 지갑을 넣고, 캐리어에는 얇은 패딩과 운동화 한 켤레를 넣었다. 가는 동안 심심할까 봐 책 몇 권을 집어넣고 귀찮지만 그래도 스위스니까 DSLR도 챙겼다. 그러고도 캐리어는 넉넉하게 남았다. 스위스가 덜 위험하면서도 많이 갖춘 나라임은 짐을 싸면서부터 실감했다.
여행을 앞두고도 아주 신나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남자친구와 곧 헤어질지도 몰랐기 때문이다. 우리는 일주일 사이에 두 번 헤어졌고 두 번 화해했다. 취리히로 가는 동안 하루가 지날 테고 그러면 우리는 다시 이별하게 될까. 그리고 다시 사귀게 될까. 그걸 언제까지 반복할까. 끝이 보인다는 걸 알면서도 마침표를 찍지 못하는 건 그 애나 나나 마찬가지였다. 비행기는 이제 막 이륙을 준비 중이었다. 승무원 언니가 핸드폰을 꺼달라고 했다. 그 애로부터 올지 모를 메시지를 벌써부터 두려워하며 전원을 껐다. 어쩌면 아무것도 와 있지 않을까 봐 무서운 것 같기도 했다.
스위스는 너무 좋았다. 한국은 덥지만 스위스는 시원했다. 숨쉬기도 편했다. 마음을 누르는 것들로부터 멀리 떨어진 나는 취리히의 풍경이 참 예쁘다고 생각하며 이것저것을 먹었다. 오래됐지만 예쁜 카페에서 커피도 마시고 레스토랑에서 생각보다 아주 비쌌던 스테이크도 먹었다. 낮에는 대형 마트를 돌며 높은 물가에 놀라거나 한국 식재료에 반가워하며 시간을 보냈고, 퇴근 시간에는 인파에 섞여 느리게 걷는 방식으로 여행자 티를 냈다. 맘에 드는 장소가 나오면 타이머를 맞춰놓고 사진도 찍었다. 비싸게 팔아먹을만한 콘텐츠가 왕왕 나올 것 같았다. 카메라를 가지고 온 건 아주 잘한 일이었다. 각이 안 나올 때는 지나가는 현지인들에게 부탁했다. 스위스 사람들은 겉바속촉이었다. 안 해줄 것 같은 표정으로 다가와 엄청 잘 해줬다. 따뜻한 손길을 가졌지만 웃지는 않았고, 굳은 표정으로도 말은 또 예쁘게 했다. 아주 인상적인 기질들이었다.
취리히 여행을 하는 동안 우리는 한 번 더 헤어졌다. 그리고 베른으로 넘어갈 때 다시 화해했다. 나는 여행에 집중을 했다가 못했다가 했다. 기분에 따라 스위스가 좋았다가도 안 좋았다. 왜 하필 이럴 때 스위스를 온 걸까. 그래도 당장 한국이 아닌 게 다행인 것 같기도 했다. 해결할 것들을 직면할 자신이 아직은 내게 없었다.
우리는 대학교에서 처음 만났다. 각자의 가장 친한 친구가 서로를 소개했다. 나는 한국문학을 공부하는 인문대생이었고, 그 애는 수학 같기도 하고 과학 같기도 한 것을 배우는 공대생이었다. 우리는 1년을 친구로 지내다 연인으로 발전했다. 나와 그 애는 많이 달랐다. 같은 것을 보고도 전혀 다르게 생각했다. 한 번은 초저녁에 뜬 달을 보고 그 애에게 너무 예쁘지 않냐고 물은 적이 있었다. 도서관에서 함께 공부하다 저녁을 먹으러 나왔을 때였다. 아직 밝은데 달이 뜬 것도 신기했고 같은 하늘에 해와 달이 공존하는 것도 낭만적이었다. 그 애는 달을 보더니 흔한 자연현상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저게 상현달일지 하현달일지 궁금해했다. 그때의 벙찐 내 표정을 그 애는 아주 오래도록 기억했다.
이것 말고도 우리는 다른 것이 많았다. 살아온 방식과 삶을 바라보는 시각과 친구를 사귀거나 꿈에 대해 갖는 애착 역시 그랬다. 그래도 같지 않았기 때문에 치명적으로 좋은 부분도 있었다. 말하기를 좋아하는 나에 비해 그 애는 들어주는 데 타고난 소질이 있었다. 그리고 머리가 아주 좋았다. 많은 것을 말하고 금방 잊는 나에 비해 그 애는 듣고 기억하기를 잘 했다. 스치듯 했던 혼잣말도 모두 기억했다. 그 애가 내미는 선물이나 말들에 나는 자주 깜짝 놀라곤 했다. 내가 잊고 있던 순간들마저 그 애에게는 모조리 현재형이었다. 그러면서 내가 싫어하는 건 안 했고 좋아하는 건 어떻게든 해주려 노력하는 애였다. 나는 정말이지 아주 많은 사랑을 받았다. 이런 사람을 다시 만나는 건 아주 어려울 거란 사실은 사귀는 도중에도 그리고 이별이 성큼성큼 다가올 때도 나는 알고 있었다. 그 애의 손을 놓기 어려웠던 가장 큰 이유이기도 했다. 우리는 여러 번의 계절을 함께 보냈다. 안 맞는 시간표를 쥐어짜 같이 교양 수업을 들었고, 도서관에서 과자 하나를 소리 죽여 나눠먹었고, 춥거나 덥거나 황량하거나 화사한 캠퍼스를 가로지르며 서로가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그렇게 수 십 번의 상현달과 하현달이 뜨고 지는 동안 우리는 졸업했다. 그 애는 서울로 떠나고 나는 대구에 남는 방식으로 직장인이 된 건 졸업 후 얼마 뒤의 일이었다.
베른은 오래된 도시였다
낡은 건물들이 모여 거리를 이루고 그 오래된 역사 위로 무수한 인파가 걸어 다녔다. 베른의 구시가지에서 이것저것을 사 먹었다. 잠깐 왔다 사라지는 푸드 트럭에는 쌀국수도 커피도 젤라또도 볶음밥도 있었다. 무거운 마음이지만 관심 가는 것들을 했다. 조금은 신나도 될 것 같았다. 왜냐하면 아직은 이별하지 않았으므로. 베른은 취리히보다 마음 붙일 곳이 조금 더 많아 보였다. 베른의 곰 공원에는 팔자가 늘어진 생명체들이 여기저기 앉거나 누워 있었다. 곰들은 갇힌 것도 안 갇힌 것도 아닌 채 그냥 그 안에 있었다. 사람들은 곰과 멀찍이 떨어진 자리에서 바라보거나 사진을 찍었다. 장미공원에도 올라갔다. SNS에서 지겹도록 봤던 배경이 바로 이곳에서 만들어진 것임을 뒤늦게 알았다. 처음이지만 너무 뻔한 풍경이었기 때문에 금세 시시해졌다. 나는 풍경 보기를 멈추고 모르는 스위스 아저씨와 함께 담배를 태웠다. 담배는 곰공원 앞 편의점에서 샀다. 술과 담배 중 고민하다 후자를 선택했다. 어차피 나는 술을 못 마시는 사람이다. 스위스산 담배는 미친 듯 독했다. 점원한테 소프트한 걸로 달라고 부탁했는데 아무래도 소프트를 다르게 이해한 게 분명했다. 비싸고 해로운 일탈이 끝난 뒤 조금씩 조금씩 걸어 숙소로 돌아왔다. 내일은 벵겐으로 떠나야 할 것이다. 벵겐은 융프라우로 올라가는 길목에 있었다.
직장인이 되고 돈이 생기자 즐길 수 있는 것들이 무람없이 늘어났다. 그 애와 나는 서울과 대구를 각자의 방법으로 즐겼다. 대학 시절의 우리는 쓸데없이 부지런했기 때문에 주말에도 도서관에서 카페에서 빈 강의실에서 공부했다. 자격증도 따고 토익 공부도 했다. 통학 시간을 줄여보겠다고 기숙사 생활도 했다. 일주일에 7일을 만났던 우리는 갑자기 서로가 없어진 일상이 불안하면서도 좋아 어안이 벙벙했다.
그 애가 빠져나간 자리를 나는 일과 동료와 취미생활로 채웠다. 내 시간이 온전히 내 것인 것 같은 느낌은 나쁘지 않았다. 회사를 다니면서 심리상담사와 학교폭력예방상담사 자격증을 땄다. 커피 바리스타 과정도 수료했다. 열심히 살던 관성은 직장인이 돼서도 유효했다. 그러는 동안 그 애는 안국과 종로를 마음껏 누볐다. 친구도 금방 사귄 것 같았다. 원래 성격이 좋은 애였다. 그 애의 하루는 내가 잘 모르는 일과 친구와 술로 채워졌다. 남의 말을 잘 들어주는 성격은 남자들끼리도 통하는 듯했다. 각자 바쁘게 사는 동안. 그 애가 몇 개월이나 해외로 연수를 다녀오는 동안. 하루 두 번의 전화가 한 번으로 줄어드는 동안. 통화가 카톡으로 대체되는 동안. 카톡 답장이 늦어지는 걸 대충 이해해주는 동안. 이별은 징검다리 건너듯 어쩌면 성큼성큼 우리에게 걸어오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벵겐에서 올라가는 기찻길은 너무 예뻤다
쨍한 하늘과 눈이 따가울 정도로 밝은 연두색은 무슨 짓을 해도 카메라에 다 담을 수 없을 것 같았다. 만년설 아래로는 하얗고 큰 짐승들이 뛰어다녔다. 초원 위에는 드문드문 작은 움막이 있었는데 그 안팎을 사람이나 개가 종종걸음으로 오갔다. 포토샵 포인터로 콕 찍어 소중히 담아 가고 싶을 정도로 고운 색감이었다. 시야를 채우는 위아래 모든 것들이 대단했다. 기차는 산맥을 돌아 천천히 올랐다. 알프스의 냉기가 훅 들어왔다. 추웠지만 창문을 닫자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승객들은 창문 밖으로 몸통을 내밀고 사진을 찍었다. 이 기차는 원래 그러라고 만들어진 듯 창문이 상하로 쉽게 열렸다. 삐삐머리를 한 외국인 여자가 문밖으로 상체를 내밀고 팔을 뻗었다. 그녀의 남자친구가 여친의 인생 샷을 건져주기 위해 십분 애를 쓰고 있었다. 어떤 구도의 사진이 나올지 훤히 알 것 같았다. 스위스는 뭔가를 전시하기에 너무 적절한 배경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이만큼이나 잘 놀고 있다고. 내가 이만큼이나 좋은 곳에 있다고. 또 내가 이만큼이나 행복하다고. 그리고 여자가 만족할만한 사진을 건진 뒤 의자에서 내려오는 동안, 알프스 풍경에 놀란 승객들이 연신 감탄을 자아낼 동안, 스위스 벵겐에서 융프라우로 올라가는 그 어디쯤의 장소에서 그 애와 나는 완전히 헤어졌다. 손바닥에 선명하게 전해지던 핸드폰의 온도를 나는 아직까지도 또렷이 기억한다. 빌어먹게도. 그 좋은 스위스에서. 빌어먹게도 말이다.
이후 나는 조금 아팠고 불면을 앓았고 언어로 설명하기 힘든 허무를 견디느라 몸과 마음이 닳았다. 아마 그 애도 그랬을 것이다. 우리는 어느 쪽도 너무 잘못하지 않았다. 그 애와 나는 예를 다한 연인이었고 주고받은 이야기와 공유한 시간이 무수한 친구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애와 나는 헤어졌다. 믿음을 가장해 태만한 애정을 보내는 동안. 각자의 변화를 방관하는 동안. 20대였던 우리가 30대가 되는 동안. 둘 중 어느 한쪽도 서로에게 적극적이지 않았던 까닭으로.
스위스가 오롯한 행복으로 남은 것은 훗날의 일이다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하는 동안 짬을 내어 구경했던 취리히. 무작정 걷다 발견한 곰공원. 어설프게 피워 물었던 담배. 마주할 현실이 아득했던 베른의 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무 예뻤던 벵겐과 인터라켄과 알프스의 호수. 시간은 약이었고 많은 것이 나았으며, 비로소 나는 우리가 헤어진 곳이 한국이 아니라 스위스여서 다행이라 생각했다. 우연히라도 지나칠 일이 없는 곳. 그래서 불쑥불쑥 네 생각이 날일이 없는 곳. 이별마저 우리는 너무나 예쁜 곳에서 훌륭히 잘 해내었다고.
이제야 나는 그 애에 대한 글을 쓸 용기가 생겼다.
그리고 말하고 싶어졌다.
사랑에 게으른 애인이라 미안했다고. 벚꽃 피는 교정을 함께 걸어주어 고맙다고. 네가 나에게 보여준 모든 세상이 좋았다고. 불안한 20대를 든든히 잡아준 건 분명히 너였다고. 있는 그대로 예뻐해 주어 감사했다고. 네 삶을 밀고 나가던 밝고 건강한 힘이 앞으로도 네 안에 쭉 유효하기를 기도한다고.
묵은 말들을 쏟아낸 덕분에 오늘은 아주 깊은 잠을 잘 수 있을 것 같다.
스위스가 비로소 스위스로만 남을 수 있을 것 같은 밤이다.
부디 그렇기를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