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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현지 Oct 14. 2020

15. 라오스에서는 아침마다 코피를 흘렸다

라오스가 왜 좋았냐고 묻는다면


아침마다 코피를 흘렸다


1


아침마다 코피를 흘렸다. 밥을 먹다가 흘리거나, 씻다가 흘리거나 한 건 아니고, 침대에서 일어나 허리를 세우면 물처럼 주르륵 흐르는 식이었다. 처음에는 코피가 아니라 콧물인 줄 알았다. 너무 춥거나 더운 나라에서는 흔하게 그랬다. 비염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두루마리 휴지를 대충 뽑아 왼쪽 혹은 오른쪽 코에 꽂아 10분 정도 있으면 괜찮아지곤 했다. 그래도 안 되면 드라이기를 켜 온풍기 삼아 상체에 가져다 대고 있으면 곧잘 괜찮아졌다. 


그런데 라오스에서는 콧물이 아니라 진짜 피였다. 코에서 액체가 흐르기 시작하면서 갑자기 앞이 안 보였고, 그럼과 동시에 속이 메슥거리면서 구토가 올라왔다. 그러면 나는 재빨리 다시 침대에 누웠다. 개 같은 구역질을 참으며, 코피인지 콧물인지 알 수 없는 것이 옆얼굴을 타고 베개로 흘러내리는 것을 느끼며. 그렇게 한 10분 정도 누운 채 숨만 쉬었다. 그러고 있으면 서서히 시야가 밝아지며 다시 앞이 보이는 것이었다. 정신을 차렸을 때 베개는 이미 피로 젖어 있었다. 젠장, 하필 시트가 흰색이야. 이건 아무래도 물어줘야 할 것 같았다는 생각에 머리가 지끈 했다. 그나마 토는 하지 않아 다행인가.


근데, 나 어디 많이 아픈 건 아니겠지.


이런 10분이 지나고 나면 증상은 말끔히 사라졌다. 코피도 멈췄고 속도 괜찮았다. 그리고 뻔뻔하게 배가 고팠다. 뭐가 잘못돼도 단단히 잘못된 것 같았는데, 그래도 일단은 괜찮은 것 같다고 생각했다. 10분만 지나면 되기 때문이다. 나는 씻고 밥을 먹고 계속 라오스 여행을 했다. 



비엔티안은 일단 너무 더웠다. 수도긴 하지만 그렇게 화려하진 않았고, 그럼에도 수도이긴 하기 때문에 늦은 오후만 되면 아스팔트 바닥에서 복사열이 마구 올라왔다. 그럴 때면 피부가 탱탱히 익는 것 같았다. 그래도 더운 것만 빼면 비엔티안은 괜찮았다. 라오스 사람들은 다정했고 무엇보다 음식이 맛있었다. 비엔티안에는 괜찮은 한식당이 몇 있었는데 그럼에도 너무 자주 들리지는 않았다. 마음에 쏙 드는 현지 식당이 있었기 때문이다. 한국 티브이 프로그램에도 소개된 적 있다는 그 식당은 쌀국수를 파는 곳이었는데 오픈부터 파장하기까지 늘 사람이 많았다. 앉자마자 곧장 음식이 나오고, 먹고 나서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는데도 언제나 대기줄이 길었다. 이렇게 대박적인 식당을 하나 운영할 수만 있다면 인생 정말 살 맛 날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나는 하루에 적어도 한 번씩 같은 곳을 갔다. 많을 때는 아침 저녁으로도 갔다. 도가니 쌀국수는 아무리 먹어도 질리지 않았고 그래서 신기했다.


라오스는 물가가 저렴했기 때문에 여행에 필요한 것들을 여럿 충전할 수 있었다. 부담스럽지 않은 크기의 샴푸와 린스 치약, 치실, 오버나이트 생리대 같은 것들. 비엔티안은 잠깐만 머무르는 여행자를 위해 딱 며칠만 쓸 수 있을 것 같은 양의 소모품을 많이 팔았다. 물론 현지인들을 위해 한 달은 족히 쓸만한 크기도 있었다. 나는 큰 것은 배낭에 쟁였고 작은 것들은 모조리 보조가방에 넣었다. 접이식 칫솔과 일회용 치약은 버스나 기차로 장거리 이동을 할 때 유용하게 쓸 수 있었다. 쇼핑을 마치고 나서는 곳곳에 있는 밀크티 부스에서 달달한 것을 사 마셨다. 하루는 새까만 타피오카, 하루는 투명한 젤리가 든 밀크티를 마셨다. 한 잔에 천 원도 하지 않는 라오스 밀크티는 웬만히 백화점에 입점해 있는 브랜드 밀크티보다도 훨씬 맛있었다. 이렇게 적당히 산책하고 적당히 더워하다 밀크티를 마시는 것으로 하루를 마감하는 일생을 살 수 있다면, 아마 남은 평생은 라오스에서 보내도 상관없을 것만 같았다.



비엔티안에서는 호텔이 아닌 게스트하우스에서 묵었다. 때문에 여러 여행자들을 만날 수 있었다. 숙소에는 특히 유럽인이 많았는데 그 여자들은 하나같이 내게 관심이 많았다. 아이크림, 틴트, 조그만 헤어드라이기 같은 것들. 특히 틴트는 유럽인들에게 큰 관심을 얻었고 그들은 하나에 만 원도 하지 않는 가격을 듣고는 크게 놀랐다. 언젠가 꼭 한 번 한국을 가야겠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중 몇몇은 눈이 마주칠 때마다 내게 안부를 물었다.


너 괜찮니. 정말 괜찮은 거니. 


아마 아침에 한바탕 코피를 쏟는 꼴을 봐서 그런 것 같았다. 병원은 가본 건지. 여행을 너무 오래 해서 그런 건 아닌지. 적당한 약은 가지고 있는지. 나는 병원을 갈 정도는 아닌 것 같다고. 원래 몸이 튼튼한 편은 아니라고. 정확히 어디가 아픈지 모르기 때문에 먹을 수 있는 약도 없다고 무심히 대답했다. 내가 무심할수록 그들은 다행이라는 표정을 지었다. 사실 나는 그러면서도 조금 걱정했다. '코피가 자주 난다면 뇌 기능에 이상이 생겼을 가능성이 있습니다'라는 말을 블로그에서 읽었기 때문이다. 나는 뎅기열을 앓은 적이 있고 불면을 달고 살며 때문에 잦은 편두통에 시달리기는 하지만, 적어도 코피만큼은 잘 안 나는 인간이었다. 진짜 뇌에 이상이 생긴 건 아닐까. 하지만 진짜 병원에 갈 정도는 아닌 것 같았다. 그러기엔 너무 잘 먹었고 잘 걸었고 잘 쌌다. 여행자에게 병원이란 뭔가, 뭔가 좀 무서운 구석이 있다. 나는 인도와 스리랑카에서 응급실을 가본 경험이 있고 때문에 되도록이면 병원은 내 나라에서만 가고 싶었다. 못 믿어서라기보다는, 아니 못 믿어서가 맞는 것 같다. 부족한 영어 실력과, 얼마나 나올지 모를 병원비와, 국적이 다른 나에게 씌울 바가지 같은 것들을 나는 믿지 못했던 것 같다. 그래서 병원은 최대한 안 가는 쪽으로 선택한 뒤 계속 비엔티안을 여행을 했고 매일 유럽 여행자들의 안부 인사를 들으며 아침을 시작했다. 정말 10분만 지나면 나는 괜찮아질 수 있었다. 




비엔티안이 지루해진 건 아니지만 어쨌든 지역을 옮겨보기로 했다. 수도에만 일주일을 넘게 있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여행자는 비엔티안을 통해 입국했다가 방비엥을 여행한 후 라오스를 떠나는 것 같았는데 나는 그들과 조금 다른 루트를 선택하기로 했다. 방비엥은 액티비티에 미친 자들에게 큰 사랑을 받는 곳이었고, 나는 그런 종류의 활기가 도는 곳은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조금 조용하면서 약간만 시끄러운 곳을 찾고 싶었다. 그런 곳이 어디 있을까. 아무리 생각해봐도 떠오르는 곳이 없었다. 애초에 나는 라오스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는 인간이었다.


때문에 숙소 멤버가 추천한 대로 루앙프라방으로 가기로 했다. 루방프라방은 비엔티안에서 버스로 열몇 시간 떨어진 곳에 있었다. 애매하게 대여섯 시간이 아니라 아예 밤을 새워야 하는 거리라 마음에 쏙 들었다. 가는 동안 밤 드라이브를 즐길 수도 있었고 새벽을 지나야 하기 때문에 숙소비도 아낄 수 있다. 야간 이동은 내가 여행 중 가장 좋아하는 순간이기도 했다. 


떠날 날짜를 정하고 프론트 직원에게 체크아웃 날짜를 알렸다. 직원은 이별을 많이 아쉬워했다. 조금 우는 것도 같았다. 여행지에서의 시간은 일상과는 조금 다르게 흐르기 때문에 일주일은 그냥 일주일이 아닐 것이었다. 일주일은 아주 긴 시간이고 우리는 그 사이에 아주 많은 것을 했다. 함께 쌀국수를 먹고 담배를 피우고 진상 손님들을 욕하는 동안 직원은 내게 퍽 의지했던 모양이었다.


울지 마 나 다시 올 거야. 

정말? 한국 가는 거 아니야?

응. 루앙프라방 갔다가 다시 올게 

우와! 근데 왜 다시 와?

도가니 국수 먹으러. 


그녀는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았지만 어쨌든 다시 볼 수 있다는 말에는 퍽 좋아했다. 비엔티안으로 돌아오면 우리는 함께 쌀국수를 먹으러 가기로 했다. 기약이 있는 헤어짐은 슬프지 않았다. 




2


라오스 야간버스 시스템은 말도 안 되었다. 복층 구조의 버스는 복도를 기준으로 양쪽에 두 명씩 한 침대를 쓰는 형태였는데 침대가 좁아도 너무 좁았다. 이렇게 좁은 2인용 침대는 태어나 처음 봤다. 나처럼 혼자 온 여행자는 모르는 사람과 한 침대를 써야 하는데 문제는 상대가 랜덤이라는 점이다. 국적도 성별도 알 수 없는 상대와 온몸을 밀착한 채 12시간을 가야 한다고 생각하니 조금 까마득해졌다. 나는 검표원에게 두 명 분의 돈을 내고 혼자 타겠다고 말했지만 거절당했다. 버스를 타려는 사람은 이미 너무 많았다. 어쩔 수 없어진 나는 재빨리 함께 누울 상대를 물색했다. 터미널은 어두웠기 때문에 혼자 온 여행자를 찾기 어려웠다. 무조건 여자, 되도록 깡마른 사람이면 좋겠는데. 그때 나와 비슷한 처지인 것이 분명한 동양 여자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난감한 표정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우리는 서로 너무 반가운 것이 분명했다. 


"같이 타실래요?"


여자에게 다가가 통성명도 없이 동승을 제안했다. 여자는 바로 승낙했고 우리는 아주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버스에 올랐다. 처음 보는 중국 출신 여자와 나란히 누운 채 버스는 출발했다. 여자가 안쪽, 나는 바깥쪽에 누웠기 때문에 나는 떨어지지 않기 위해 자주 신경 써야 했다. 여자는 베이징에서 태어났고 동갑이라는 정보만 제공한 채 곧장 잠들었고 나는 버스가 덜컹거릴 때마다 그녀의 뜨거운 팔이나 다리, 머리카락 등을 간헐적으로 느끼며 계속해서 북쪽으로 달렸다. 이어폰에서는 소방차의 하얀 바람, 변집섭의 로라, 안치환의 인생은 나에게 술 한 잔 사주지 않았다 등이 연이어 나왔다. 얼른 잠들었으면 좋겠지만 그러지 못했다. 커다랗고 검은 버스에 갇혀 온몸이 흔들린 채 익숙한 음악을 들었다. 서른몇 곡의 노래는 몇 번이고 계속 반복 재생되었다. 



불면과 멀미와 싸우는 동안 버스는 서서히 목적지에 닿았다. 핸드폰 배터리가 걱정되어 음악을 껐더니 내부 소리가 너무 크게 들렸다. 이 층짜리 낡은 버스는 코끼리가 숨을 삼켰다 뱉는 것 같은 거친 소리를 냈고, 아침이 되어 잠에서 깬 여행자들은 저희들끼리 웃고 떠드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들은 어느 나라에서 왔는지, 숙소는 어디로 예약했는지, 함께 폭포를 보러 가지 않겠느냐는 등의 이야기를 나누었다. 루앙프라방에 폭포가 있었던가. 옆자리 중국 여자에게 물어보고 싶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여자는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이어폰을 꽂고 그녀만의 고요 속으로 기어들어갔다. 낯선 얼굴로, 제2의 언어를 들이미는 방식으로 그녀의 고독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폭포에 대해 묻기를 포기했다. 생각해보니 폭포 따위는 봐도 안 봐도 그만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모든 것이 심플해졌다. 마음이 편안해졌다. 


정류장에는 트럭을 개조해 만든 라오스식 뚝뚝이 많았다. 버스에서 내린 여행자들은 인사를 하거나 하지 않는 식으로 각자 뚝뚝을 타고 사라졌다. 나는 열두시간짜리 메이트였던 중국 여자와 목례를 한 뒤 헤어졌다. 루앙프라방은 너무 좁기 때문에 아마 다시 만나게 될 것이지만 그렇지 않아도 상관은 없을 것 같았다. 우리는 서로에게 열두 시간 동안 잘 사용되었고 그것으로 나는 된 것 같았다. 




3


루앙프라방은 비엔티안과 많이 달랐다. 건물은 대체로 낮았고 그것들은 하나같이 낡았다. 도로가에 있는 집들은 그나마 나았지만 조금만 골목으로 들어서면 슬레이트를 지붕 삼은 오래된 가옥들이 우수수 나타났다. 곳곳에 무너져 내린 건물도 자주 보였다. 숙소로 향하는 골목에는 재래시장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한 가판들이 늘어져 있었다. 가판 위에는 과일이나 생선, 육포 같은 것들이 마구잡이로 올려져 있었는데 내가 슬리퍼를 끌며 지나갈 때마다 생선 속에 숨어있던 파리들이 화들짝 놀라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그런 매대 앞에서 주인아줌마들은 어설프게 다리를 꼬고 앉아 꾸벅꾸벅 졸았다. 포장이 되지 않아 울퉁불퉁한 골목은 지린내와 비린내가 섞여 났고 때문에 여러모로 걷기에 굉장히 불편했다. 아무래도 숙소를 잘 못 잡은 걸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즈음 바우처에 적힌 이름과 같은 건물 하나가 나타났다. 다행히 지붕이 멀쩡한 예쁜 건물이었다. 


루앙프라방에서는 혼성 도미토리에 묵었다. 그건 정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는데, 신혼여행지로 유명한 지역인 데다 라오스 내에서도 관광지였기 때문에 괜찮은 방은 이미 다 차고 없었다. 남은 1인실은 십오만 원이 훌쩍 넘었다. 언제 떠날 지 알 수 없는 여행자는 하루에 십오만 원을 마음껏 쓸 수 없었다. 안내된 방은 사진에서 보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작은방에 이층 침대 세 개가 빼곡히 있었고 침대와 침대의 좁은 틈 사이로 기다란 락커가 놓여 있었다. 


"하이"


방문을 열자 상의를 탈의한 남자 하나가 반갑게 인사했다. 검은 피부가 유난히 매력적이었다. 나는 확신에 찬 표정으로 대답했다. 


"나마스떼"


남자는 눈구멍과 입구멍을 힘껏 확장시키며 물었다. 어떻게 알았지? 나는 딱 보면 안다고 말했다. 그리고 한 마디를 더 던졌다. 힌두교도네. 남자는 흥미롭다는 얼굴을 감추지 않았다. 인도에 가본 모양이지. 가보기만 했겠니, 책도 썼는걸. 와우, 어디 어디 가봤는데. 글쎄 아마 너보다 더 멀리까지 가봤을걸. 나는 뉴델리와 뭄바이, 고아, 벵갈루루, 마두라이, 다즐링, 바르깔라 등을 읊었다. 그럴 때마다 남자는 계속해서 놀랐고 여러 말 끝에 땅끝 마을이자 힌두교도들의 성지인 깐야꾸마리를 언급했을 때는 끝내 소리를 질렀다. 


"미친 거 아니야? 거긴 힌두스탄인 나도 아직 못 가봤다고!"



인도가 너무 좋은 나와 뉴델리 출신인 그는 금방 친구가 되었다. 남자는 어릴 적 인도를 떠나 토론토로 유학을 갔다고 했다. 그래선지 인도인 특유의 영어 발음을 사용하지 않았다.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그의 영어를 들으며 나는 그가 토론토에서 보냈을 시간에 대해 가만히 상상했다. 너무 유색인종이었을 어린 인도 남자의 캐나다 생활에 대해서. 토론토는 나 역시 가본 적이 있는 곳이자 여러 차별을 당한 곳이기도 했다. 남자는 파키스탄 출신 친구와 함께 여행 중이었고 여러 질문이 오고 가면서 우리 셋은 어렵지 않게 친해졌다.


"너네 둘은 어떻게 친구가 됐니. 인도랑 파키스탄은 원수지간인데."


두 사람의 조합은 당연히 신기했다. 인도와 파키스탄은 여전히 내전이 빈번하며 문화도 종교도 달랐다. 두 남자 역시 각자 힌두교도와 무슬림인 것처럼. 나의 물음에 두 사람은 지난한 캐나다 생활을 회상했다. 무수히 놀림당했던 영어 발음에 대해. 날마다 원망했던 까만 피부에 대해. 서남아시아인의 작은 체구에 대해. 몸에서 나던 커리 냄새와 그로 인해 받았던 냉대에 대해. 극심히 앓았던 향수병에 대해.


"안 친해질 수가 없었지. 학교에서 우리 둘만 왕따였거든."


외로움은 국적과 종교를 뛰어넘어 두 사람을 붙여놓았다. 캐내디언들 사이에서 살아남는 동안 겪은 사건들이 하도 많아 두 사람은 자주 몸을 떨었다. 나는 놀라거나 고개를 끄덕이는 식으로 공감했다. 


두 남자는 캐나다에 있는 동안 고향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짓들을 많이 했다고 털어놨다. 이를테면 육식 같은 것들. 캐내디언은 미웠지만 토론토에는 맛있는 게 너무 많았거든. 그래서 돼지고기도 먹고 소고기도 먹었어. 우리나라에선 상상도 할 수 없는 짓이지. 그런데 뭐 어때. 어차피 부모님은 인도에 있고 나는 캐나다에 있는걸. 힌디 대신 영어를 배우느라 그 개고생을 하는데 육식 좀 하면 어때. 안 그래? 나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숙소에는 테라스가 있었고, 우리는 낡은 의자에 나란히 앉아 맞담배를 피웠다. 나는 비엔티안에서 산 에쎄를, 두 사람은 직접 만든 잎담배를 피웠다. 연기의 냄새가 담배와 다소 달랐지만 나는 모르는 척하기로 했다. 



4


힌두스탄 친구와 무슬림 친구가 떠난 후, 방은 곧 다른 사람들로 채워졌다. 말이 없는 자, 많이 너무 많은 자, 그러면서도 쓸데없는 호기심으로 여럿을 불편하게 하는 자들이 마구잡이로 하루 혹은 이틀을 머물다 사라졌다. 다행인지 루앙프라방에서는 코피가 심하지 않았다. 이틀에 걸러 한 번은 지옥의 10분을 보내긴 했지만 앞이 보이지 않는 시간도 점점 줄었고 피의 양도 티 나게 적어졌다. 이유 없이 나타난 증상은 까닭 없이 사라지면서 조금씩 안도를 주었다. 


두 명의 여자가 나타난 건 며칠 후였다. 시끄러운 이스라엘리들 사이에서 고통의 밤을 보낸 다음 날 아침이었다. 유난히 행동이 조심스러운 여자 하나와 조금 여장부 같은 여자 하나가 차례로 방으로 들어왔다. 누가 봐도 일본인이었고 두 사람 모두 배낭 대신 캐리어를 끌고 있었다. 먼저 들어온 여자는 나를 보고 목례했고, 뒤이어 들어온 여자는 약간 고개를 갸웃 거리더니 쾌활하게 인사했다.


"니하오?"


코피가 나지 않은 얼굴을 매만지며 나는 대답했다. 곤니찌와. 여자는 갑자기 반가워 죽겠다는 얼굴로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마구 쏟아내기 시작했다. 무슨 뜻인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모조리 일본어였다. 불필요한 상황을 최소화하기 위해 나는 얼른 말을 끊고 다음 말을 했다. 


쏘리, 와타시와 칸코쿠진데쓰.


조심스러운 여자는 일본인 특유의 간드러지는 억양으로 에에-? 했고, 여장부는 재빨리 사과를 건넸다.


"미안합니다. 중국 사람이라고 생각했스므니다"


여장부와 나는 서로의 언어를 비슷한 수준으로만 할 수 있었다. 거의 못한다는 뜻이다. 때문에 우리는 영어로 소통하는 것에 암묵적으로 동의했다. 조심스러운 여자의 이름은 아야, 안 조심스러운 여자의 이름은 세 글자였다는 것 말고는 기억이 나지 않기 때문에 적당히 나미꼬라고 칭하겠다. 


아야와 나미꼬는 영어를 아주 잘 했다. 거의 외국에 살다 온 수준으로 발음이 좋았고 내가 대충만 말해도 너무 잘 알아들었기 때문에 대화하기 편했다. 두 사람은 같은 대학에 다니는 동기라고 했는데 단짝이라고 하기에는 성격이 너무 달랐다. 아야는 매사에 조심스러웠고 때문에 질문을 하거나 대답을 할 때도 손가락 끝을 만지작거리며 뜸을 들었다. 나미꼬는 반대였다. 궁금한 게 있으면 바로 질문했고 실수했다고 여겨지면 망설이지 않고 사과했다. 때문에 나미꼬는 한국인과 일본인 사이에서는 조금 예민할 수 있는 말들을 자주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나미꼬가 훨씬 편했다. 나미꼬는 좋고 싫음이 분명했기 때문에 의사결정에 있어 불필요하게 에너지를 낭비할 필요가 없었지만 아야는 달랐다. 아야는 우리의 의견에 무조건 좋다고 말해놓고 막상 일이 벌어지면 뒤에 가서 불평을 했다. 



두 사람이 처음 온 날, 나는 새로 뚫어 놓은 까오삐약 국수 전문점을 소개했다. 아야와 나미꼬가 라오스에서만 먹을 수 있는 음식을 경험해보고 싶다고 했기 때문이다. 불행히도 까오삐약은 두 사람의 입맛을 사로잡지 못했다. 라임과 향신료 맛이 너무 강해 일본인이 먹기에 부적절했던 모양이었다. 두 사람은 음식을 많이 남겼고 나에게 조금 미안해했다. 이때 나미꼬는 '내 입맛에는 안 맞네, 미안"이라며 웃었고, 아야는 '너 아니었으면 라오스 국수를 못 먹어볼 뻔했어, 고마워'라고 예쁘게 대답했다. 그리고 다음날 어떤 유럽 여자가 내게 말을 걸었다.


"저기, 네 친구가 하는 말을 들었는데 라오스 국수가 그렇게 쒯이라며? 정말이니? 난 오늘 시도해보려고 했는데 괜히 고민되네."


나는 그 '친구'가 누구인지 물었고 여자는 테라스 쪽을 가리켰다. 테라스에서는 아야가 햇살을 받으며 빨래를 털고 있었다. 


이런 아야의 성격 때문에 나는 그녀가 조금 어려웠는데 그건 친구인 나미꼬도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두 사람은 밥을 먹거나 카페를 가는 등 모든 일정에 나를 포함시켰는데 그때마다 나는 우리의 대화 패턴에 자주 당황했다. 세 사람이 자연스럽게 대화를 하는 게 아니라 내가 질문하면 나미꼬만 대답을 하고, 아야가 질문을 하면 나만 대답을 하는, 그런 식이었다. 세 사람이 함께 있지만 마치 나를 중심으로 둘둘씩 갈라진 것 같은 이상한 느낌이었다. 나는 혹시 두 사람이 싸운 건 아닐까 생각해봤지만 서로 샤워 용품을 나눠쓴다든가 커피 하나에 빨대 두 개를 꽂아 함께 마신다거나 하는 걸 보니 그것도 아닌 것 같았다. 친구인 듯 남인 듯 이상한 관계 속에서 나는 여러 번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야와 나미꼬가 충돌한 건 두 사람이 루앙프라방을 떠나기 전날이었다. 나미꼬는 나를 만날 때부터 한국 담배에 부쩍 관심을 가졌는데 때문에 맞담배에 관대한 나는 테라스로 갈 때마다 그녀를 데리고 갔다. 아야는 흡연자가 아니었지만 그때마다 알아서 따라나왔다. 우리가 마지막 맞담배를 피우던 순간, 두 사람은 갑자기 티격태격하기 시작했다. 일본어였기 때문에 전혀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나는 두 사람이 싸우는 이유가 담배 때문임을 직감적으로 알아차렸다. 나는 싸움이 커지기 전에 어서 방으로 들어가고 싶었는데 나미꼬가 장초를 끄려는 나를 재빨리 말렸다.


"그러지 마. 너한테까지 피해주고 싶진 않아."


나미꼬의 행동에 아야는 곧장 테라스 문을 박차고 나갔다. 문을 너무 세게 닫는 바람에 테라스에 있던 모든 손님들이 깜짝 놀랐다. 정적이 흐르는 공간에서 나는 담배를 끄지도 피지도 못한 채 가만히 나미꼬만 바라보았다. 안 따라가도 되는 거야? 나미꼬는 지겨워죽겠다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몰라, 쟤는 맨날 저래. 미치겠어 진짜. 

나는 아야가 담배 냄새 때문에 그러는 거라고 짐작했으나 전혀 아니었다. 아야는 담배를 피우는 나미꼬의 행동 자체에 화가 난 것이었다. 아야의 논리로는 흡연자들은 하나같이 불량하며 그런 불량한 친구와 함께 여행하고 있다는 사실이 몹시 불쾌하다는 것이었다.


아야는 맨날 그래. 내가 담배를 피우면 친구인 자기까지 싸잡혀 저렴한 취급을 당한다는 거야. 그래서 내가 말했지. 그러면 따라오지 않으면 되는 것 아니냐고. 옆에 있지 않으면 다 해결되는 문제 아니냐고 말이야. 그런데 그건 싫대. 우리는 함께 여행을 왔고, 때문에 자기를 혼자 두면 안 된다는 거야. 혼자 있는 게 너무너무 싫대. 그럼 대체 나더러 어쩌라는 거야? 나는 남 눈을 너무 의식하는 일본이 싫고 그래서 여행을 온 건데, 옆에서 너무너무 일본인인 아야가 저러고 있으니 매번 미칠 것 같아.


나는 함부로 공감할 수도, 적당한 위로의 말도 찾지 못했기 때문에 피우던 담배를 마저 피우기로 했다. 하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억울한 것도 조금 있었지만. 화난 일본인들 사이에서 한국인이 할 수 있는 말은 많지 않았다. 아직 담배가 덜 탄 상태라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5


아야와 나미꼬가 떠난 새벽, 나는 3일 만에 코피를 흘렸다. 

유난히 구토 증세도 심했는데 이러다가는 정말로 침대에 토를 해버릴 것 같아 벽을 잡고 방 밖으로 나왔다. 복도에는 서양 남자 세 명이 서 있었다 .


"헤이, 너 어디 아프니?"


대꾸할 정신도 없이 화장실로 향했다. 세면대를 잡고 잠시 있으니 코피는 멎었지만 속이 너무 안 좋았다. 이제는 정말로 병원을 가봐야 할 것만 같았다. 화장실 밖으로 나왔을 때 세 사람은 여전히 복도에 서 있었다. 


"좀 괜찮아? 병원 가야 하는 거 아니야?"


멀쩡해진 나는 과음 때문이라고 대충 둘러댔지만 아무도 믿지 않았다. 세 남자는 아픈 것이 확실하다고 판단되는 동양 여자를 걱정하기 시작했고 나는 뜻하지 않게 새로운 여행 메이트를 얻었다. 인도와 파키스탄과 일본 친구들. 이만하면 루앙프라방을 떠나도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웃긴 세 영국 남자를 만나면서 일정을 조금 늘렸다. 그들은 나보다 약 열 살이 어렸고 어린 만큼 미친 짓도 잘 했기 때문에 함께 있으면 즐거웠다. 그들 사이에서 웃고 있다보면 아야가 남기고 간 스트레스가 연기처럼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세 영국남들은 팬티 속에 마리화나를 숨기고 다녔는데 때문에 지나가던 개가 갑자기 짖을 때면 자기도 모르게 중요 부위를 두 손으로 감싸며 욕을 했다. 


"오 시발 깜짝이야! 고자될 뻔했네!"


세 사람이 동시에 거기를 잡고 펄쩍 뛰는 모습은 너무 웃겼기 때문에 나는 하루에도 크게 웃을 일이 여러 번 있었다. 병신들. 한국말이었지만 어떻게든 알아먹은 그들은 더 많고 빠른 영어 욕으로 돌려주었다. 그래도 상관없었다. 못 알아들은 욕은 욕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남은 루앙프라방에서의 시간은 그렇게 흘렀다. 세 명의 영국인, 혹은 합류된 누군가와 그룹으로 놀기도 하고 카페에서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루앙프라방은 햇살이 강했고 때문에 빨래가 잘 말랐기 때문에 나는 매일 바삭하게 마른 속옷을 입었다. 와이파이가 느렸지만 아예 안 되는 건 아니었기 때문에 한국에 있는 친구와 통화도 하고, 블로그에 일기도 쓰고 간간히 일도 했다. 담배를 피우며 글을 쓰는 내 옆에서 유럽인 친구들은 마리화나도 하고 이름을 알 수 없는 여러 가지 연초들도 피웠다. 한 공간에서 노동과 놀이가 동시에 진행되었고 와중에 누구는 떠나고 누구는 남으면서 자연스럽게 멤버들은 바뀌었다.


"너 생각보다 오래 머무네."


테라스에서 칼럼을 쓰고 있는데 게스트하우스 직원이 다가와 말을 걸었다. 


응 그렇게 됐네. 

루앙프라방이 마음에 들었나 봐?

글쎄, 그런가


나는 루앙프라방이 좋았다기 보다 여기서 만난 사람들이, 속옷이 잘 마르는 날씨가, 갑자기 짖어주는 개들이, 오고 갔던 언어들이 좋았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냥 흐응- 웃고 말았다. 이제 비엔티안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가서 숙소 친구와 함께 도가니 국수를 먹어야 하는데. 그리고 다음 나라로 이동해야 하는데. 루앙프라방이 엄청 좋은 것도 아니면서 나는 하루 이틀 돌아가는 차표를 알아보는 일을 미루는 식으로 조금 더 그 숙소에 머물렀다.


만일 누군가가 라오스의 어떤 부분이 가장 좋았냐고 묻는다면 나는 뭐라고 대답할 수 있을까. 너무 많은 말을 하거나 혹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할 것 같다. 정말로 그럴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그날의 오후를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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