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나라가 얼마나 더 망가질지 모르기 때문에
네팔에 간 건
대지진이 끝난 직후였다
네팔에 간 건 대지진이 끝난 직후였다. 사람들은 내게 네팔만큼은 가지 말라고 말했지만 나는 기어코 카드만두행 표를 끊었다. 인천에서 출발해 태국을 경유한 뒤 네팔 공항에 도착했고, 생각보다 훨씬 멀쩡한 공항의 상태를 보며 나는 조금 안심했던 기억이 난다.
특별한 이유가 있어 네팔에 간 건 아니었다. 굳이 까닭을 붙이자면 네팔이 인도와 붙어 있다는 것 정도. 어차피 뉴델리를 가야 하니 겸사겸사 옆 나라를 여행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정도. 아니 실은 다 개소리다. 나는 네팔이 더 엉망진창으로 망가지기 전에 그곳에 가봐야겠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지진으로 인해 부서진 나라. 수도가 가장 큰 타격을 받은 나라. 그래서 볼 거리가 반으로 줄었고 관광객 숫자가 반 토막이 났고 때문에 숙소비가 두 배로 오른 나라. 그 나라가 얼마나 더 망가질지 모르기 때문에. 앞으로 계속 못 가게 될지도 모르기 때문에. 그래서 그나마 갈 수 있을 때 가봐야겠다고, 그렇게 생각했을 뿐이다.
네팔행을 만류했던 사람 중 가장 격하게 만류했던 사람은 당시 사귀었던 남자친구였다. 그는 나를 두 어번 설득하다 결국엔 얼마 간의 돈을 통장에 입금해 주는 식으로 이번 여행을 응원했다. 웬만하면 좋은 데서 자야 해. 지진은 끝난 뒤가 더 위험한 거야. 그러니까 돈 아끼지 말고 꼭 좋은 호텔에서 자. 여유롭게 자란 남자. 무언가를 선택하거나 포기할 기회를 자주 가졌던 남자. 베푸는데 아낌이 없고 주저가 없는 남자. 그와 나는 비슷한 유년을 보냈고 딱히 다르지 않게 살았는데 왜 생각하는 것은 이리도 차이 나는 것일까. 그는 이 돈으로 내가 최고급 호텔에 묵으며 편하게 여행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 것 같았지만 나는 돈이 많아질수록 아끼고 아껴 최대한 오래오래 여행하는 인간이었다. 좋은 곳에서 자고 비싼 것을 먹으며 한 달을 여행하는 대신, 적당한 데서 자고 조금 덜 비싼 것을 먹으며 두세 달을 여행하는 식. 그래도 나는 그가 주는 돈을 고맙게 받으며 꼭 그러겠다고, 걱정하지 말라고 말해주었다. 아마 그는 사무실에 앉아 나의 답장을 받곤 퍽 안심했을 것이다. 우리는 오래 사귀었지만 이리도 서로에 대해 몰랐다. 나는 비자 절차를 기다리며 오늘도 배관이라든가 설계라든가 협력사라든가 하는 단어를 입에 올리고 있을 그의 모습을 떠올렸다.
여행자 거리까지는 택시를 탔다. 반드시 여행자 거리를 가야만 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냥 그렇게 했다. 일종의 관성이랄까. 뉴델리에서는 파하르간즈를, 태국에서는 카오산로드를 가장 먼저 갔던 것처럼. 비슷한 처지에 놓인 어리바리한 여행자들을 보고 있으면 어쩐지 안심이 되었고, 혼자여도 혼자가 아닌 것 같았고, 내 나라 음식이나 최소 내 나라 음식과 비슷한 것이 모여 있는 거리에 서 있다 보면 여행이 조금 더 수월할 것 같다는 근거 없는 긍정을 얻을 수 있었다. 택시 기사는 갑자기 뜬금없는 곳에 차를 세우며 기념품 가게에 한 번만 들리자고 제안했다. 나는 싫다고 말했고 그는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다시 운전을 했다. 이런 식의 제안과 거절은 서남아시아에서 빈번히 일어난다. 귀찮고 번거로운 일이 지속해서 일어나는 건 여행자에게 당연했고, 그것들을 견디는 순간마다 나는 타국에 와 있음을 실감했다.
타멜 거리는 사진으로 너무 많이 봤기 때문에 이미 몇 번쯤은 와 본 것 같았다. 조금 넓은 바라나시 같은 느낌. 조금 더 깨끗하고 조용한 파하르간즈 같은 느낌. 그래도 사진과 달랐던 건 아무래도 문 닫힌 가게가 많았다는 것과 간판의 접착이 불안정해 보인다는 것, 여기저기 허물어진 곳들이 많았다는 것이다. 물론 착각일 수도 있다. 원래 자주 문을 닫는 가게일 수도 있고 원래 삐뚜름했던 간판일 수도 있고 지진과는 상관없이 원래부터 낡아빠진 건물이었을 수도 있다. 그러니까 나는 대지진 이전의 이곳을 모르기 때문에, 지금 눈앞에 있는 네팔과 과거의 네팔을 멋대로 상상하고 비교하며 천천히 천천히 호텔로 걸었다.
남자친구가 골라준 임페리얼 호텔의 매니저는 거만한 표정으로 가이드북에 적힌 가격보다 훨씬 더 높은 금액을 불렀다. 거의 두 배에 가까운 금액이었다. 나는 가이드북 '임페리얼 호텔'이 나온 페이지를 펴 이것 좀 보라고, 이게 작년 말에 개정된 책인데 어떻게 그 사이에 이렇게 가격이 뛸 수 있느냐고 따질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네팔의 물가는 원래 자주 바뀐다고, 책에 적힌 금액이 잘 못 된 거라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우리는 지진을 겪지 않았느냐고 말할 것이 뻔했다. 나는 흥정에 소질이 없기도 했고 무엇보다 무척 피곤했기 때문에 달라는 금액을 지불하고 방으로 들어왔다.
4인실 도미토리에는 아무도 없었다. 혼자 있기 싫어서 일부러 도미토리로 잡은 건데. 첫날부터 혼자 자는 건 좀 무서운데. 나는 씻지도 않고 잠에 들었고, 그날 태어나서 가장 지독한 가위에 눌렸다. 부적도 갖고 왔고 소금도 양껏 뿌리고 잤는데도. 어쩌면 부적과 소금이 있었기 때문에 그나마 죽지 않을 수 있었나. 숨도 쉬지 못할 정도로 경직된 상태에서 나는 아마 기절을 했던 것 같은데 눈을 떠보니 이미 아침이었다. 다행히 밤이 지나간 것이다. 나는 죽지 않은 채 다시 배낭을 챙겼고, 그길로 숙소를 옮겼다.
임페리얼 호텔 앞에는 지금은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비슷하게 생긴 호텔이 하나 더 있었다. 프론트에서 가격을 물어보니 전 날 낸 금액의 반값을 불렀다. 어째서 이렇게 싼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싼 것은 어쨌든 좋았기 때문에 며칠 치 방값을 한꺼번에 계산하고 방으로 올라왔다. 숙소비가 저렴한 이유는 곧장 알 수 있었다. 이 호텔은 하루에 딱 두 번, 두 시간씩만 전기가 들어왔다. 아침에 두 시간, 저녁에 두 시간. 자가발전기가 없는 호텔은 전력 공급이 어려웠고 전력이 없기 때문에 순간온수기도 이용할 수 없어 찬물로 샤워해야 했다. 핸드폰이나 노트북 충전도 물론할 수 없었다. 3월의 네팔은 너무 추웠기 때문에 나는 호텔을 옮긴 것을 곧장 후회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임페리얼에서 씻고 나올걸. 머리가 깨질 것 같이 차가운 물로 머리를 감았다. 정말 감기 싫었지만 오늘은 꼭 씻어야 했다. 곧 새로운 여행자가 같은 방을 쓸 예정이었기 때문이다.
머지않아 K가 카트만두에 도착했다. 트래킹을 마치고 돌아온 K는 이미 네팔에 완벽하게 적응한 듯 보였다. 우리는 무리 없이 인사했고 나는 그녀에게 방의 구조와 좆같은 전력 시스템 등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K에게 먼저 연락한 것은 나였다. 포카라에서 트래킹을 마치고 카트만두로 올 예정이라는 그녀의 글을 카페에서 보자마자 곧장 쪽지를 보낸 것이다.
-제가 혼자 있기 좀 무서워서 그런데, 최대한 빨리 카트만두로 와주실 수 있나요
그녀는 그러겠다고 했고, 예정된 날짜와 시간에 호텔에 도착했다. 나는 K가 '혼자 있기 무서우신 분이 어떻게 네팔까지 오셨어요'라고 물을 것을 대비해 적당한 답변을 준비해두었지만 그녀는 별 다른 것을 묻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자주 가위에 눌린다고. 이따금씩 이상한 것을 듣거나 보기도 한다고. 그래서 굿을 한 적도 있고 여전히 밤이 너무 무섭다고 솔직하게 말하지 않아도 되어서 좋았다. 나보다 3살이 어린 K는 싹싹하게 인사한 뒤 욕실로 들어갔다. 뜨거운 물이 나오지 않는 시간이었지만 그녀는 상관없다고 말했다. 좋지 않은 숙소 환경도, 얼음물 샤워도 뭐든 괜찮다고 말하는 그녀. 히말라야를 올라본 자와 그렇지 않은 자의 차이일까. 나는 20%가 채 남지 않은 핸드폰 배터리를 바라보며 잠깐 생각에 잠겼다. 이럴 줄 알았으면 임페리얼에 있을 때 핸드폰 충전도 할걸 그랬어. 나는 이렇게 지나간 일에 후회를 많이 하는 인간이었다.
K는 포카라로 떠나기 전 이미 타멜 거리를 여행한 적이 있었다. 때문에 맛집을 찾아다닐 필요 없이 그녀가 이끄는 식당에서 밥을 먹고 그녀가 알려주는 커피숍에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셨다. 언니는 왜 네팔까지 와서 트래킹을 안 해요. 그녀가 빨대로 커피를 빨아들이며 물었다. 네팔까지 오면 꼭 트래킹을 해야 하는 걸까,라고 생각했지만 무릎이 별로 안 좋아서,라고 무심히 대답했다. 그건 어느 정도 사실이었고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무릎 안 좋으면 등산하긴 좀 그렇죠. 그래도 카트만두에만 있는 건 좀 아깝다. 전혀 아깝다고 생각하지 않았지만 나는 그렇지, 하고 대답했다. 어딜 가면 반드시 뭘 해야 한다,라는 개념이 없는 나는 이런 류의 대화를 할 때면 조금 답답증을 느낀다. 내가 뉴욕까지 가서 자유의 여신상을 보는 대신 햄버거나 먹으며 골목을 돌아다녔다는 말을 할 때면 사람들은 보통 같은 표정을 지었는데. 아마 K도 그럴까. 높은 확률로 그럴 것 같아 말하지 않았다.
나는 카트만두에서 일주일을 보낸 뒤 뉴델리로 넘어갈 예정이었는데 신기하게 K와 비행 날짜와 시간이 같았다. 서로의 비행기 표를 대조하는 동안 우리는 조금 놀랐고 그러는 동시에 약간 기분이 좋아졌다. 함께 있는 동안 우리는 아마 같은 방을 쓸 것이고, 그러면 K는 방값을 아낄 수 있어 좋을 것이고 나는 잠을 편하게 잘 수 있어 좋을 것이었다. 누군가와 함께 하는 밤이면 나는 가위에 눌리지 않았고 악몽도 꾸지 않았다. 뉴델리 이후은 일정은 확신할 수 없지만 어쨌거나 최소 열흘 정도는 잘 잘 수 있겠지. 그렇게 생각하니 갑자기 여행할 용기가 생겼다. 잘 잘 수 있는 밤이 남아 있는 날들은 좋았다.
K와 나는 여러 관광지를 돌아다녔다. 타멜에서 벗어날수록 무너진 도시의 민낯이 서서히 드러났다. 부서진 사원 위로는 네팔리들이 뭔가를 쌓거나 치우고 있었고 그걸 바라보는 몇몇은 슬픈 표정으로 눈물을 훔쳤다. 무수한 세월을 버텨냈을 빨간 벽돌들은 건물에서 떨어져 나온 채 바닥을 굴렀고 우리는 그것들을 차마 밟을 수 없어 이편으로 혹은 저편으로 치워주며 계속 앞으로 걸었다. 네팔리들은 스트리트를 걷게 해주는 대신 관광객들에게 돈을 받았다. 현지인들은 그냥 다닐 수 있는 보통 거리였지만 외국인들은 만 얼마어치의 돈을 내고 표를 끊으라고 했다. 우리가 내는 돈은 지진 피해 복구 비용으로 사용될 것이라고 영어로 적혀 있었다. K와 나는 지갑에서 네팔 루피를 꺼내 표와 교환했다. 이 과정 없이 몰래 입장하는 관광객도 몇 있었지만 우리는 서로 약속한 듯 묵묵히 지갑을 열었다. K가 그런 사람이라서 좋았고 아마 K도 내가 그런 사람이라 좋은 것 같았다.
우리는 함께 망가진 거리를 걸었고, 밥을 사 먹었고, 택시를 타고 박타푸르나 카탄을 돌아다니며 서로가 예민해지지 않는 선에서 이런저런 것들을 공유했다. 무슨 과를 전공했는지. 형제 관계는 어떻게 되는지. 남자친구는 있는지. 사귄 지는 얼마나 됐는지. 이런 시간이 흐르는 동안 나는 매일을 잘 잘 수 있었다. 불편할 것이 하나도 없는 여행자를 만나는 건 참 어려운 일이기 때문에 순간마다 자주 감사했던 것 같기도 했다.
카트만두 일정이 거의 끝나갈 무렵, 우리는 함께 한식당을 갔다. 카트만두에는 '축제'라는 이름을 가진 한식당이 있었다. 사장님은 네팔리였는데 한국말을 곧잘 했다. 한국에서 5년 넘게 일해본 경험이 있고 이후에도 한국인들을 상대로 장사를 했기 때문에 한국어를 잊지 않을 수 있었다고 했다. 그는 주어와 목적어를 구분해 말할 줄 알았고 외국인들이 그렇게 어려워한다는 은,는과 이,가의 조사 구분도 척척해냈다. 그는 한국어를 처음 공부할 때 한시 일분. 여덟시 팔분. 이런 식의 시간 읽기가 죽기보다 괴로웠다고 했다. 왜 한시 한 분이나 여덟시 여덟 분은 안 되는 거예요. 외국인을 상대로 한국어를 가르쳐본 적이 있는 나는 그의 말에 공감하며 웃었다. 그래도 대단하다고. 한국어가 세계에서 가장 배우기 힘든 언어 3위인 건 아냐고. 당신은 그 어려운 언어를 단 5년 만에 습득한 것이라는 칭찬도 아끼지 않았다. 그러면서 내가 한국인이라 다행이라고. 무수한 의성어와 의태어, 존댓말과 반말, 표준어와 사투리와 일본어와 한자가 마구잡이로 섞인 언어를 날 때부터 자연스럽게 익힐 기회를 가졌던 내가 참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여행 중에는 참 별것 아닌 것에 안도하고 기뻐하고 감사하게 된다. 이런 순간들 때문에 내가 여행을 놓지 못하는 걸까. 정말 그럴지도 모르겠다고 여기며 그가 만들어준 라면과 김치전을 열심히 먹었다. 네팔리가 만든 김치전은 죄송하지만 우리 엄마가 만든 것보다 훨씬 바삭하고 맛있었다.
네팔은 여기저기가 망가져있었고, 문 닫힌 가게 많았고, 때문에 조금 위험해 보였지만 우리는 별일 없이 여러 날을 잘 보냈다. 스카프 값을 바가지 쓴 것을 제외하면. 무너진 건물 때문에 중간중간 길을 잃은 것을 제외하면. 그러니까 어쩔 수 없었던 길고 짧은 위기들과 짜증들을 모두 제외하면 우리의 여행은 별일이 없었다. 히말라야를 올라본 여자와 그럴 생각이 전혀 없는 여자의 카트만두 여행은 남은 네팔 루피를 어떻게 하면 좀 더 알뜰하게 잘 사용할 수 있을까에 대한 고민을 마지막으로 조금씩 정리되고 있었다. K는 앞으로 네팔은 올 일이 없을 것 같으니 몽땅 기념품을 사는 데 쓰겠다고 했고, 나는 왠지 모르겠지만 최소 한 번은 네팔에 더 올 것 같아 남은 루피를 아끼겠다고 말했다. 히말라야에 오를 생각도 없으면서. 네팔에 더 보고 싶은 게 남은 것도 아니면서. 왠지 이 돈을 갖고 있어야 다시 여기에 올 핑계가 생길 것만 같았다.
공항으로 가는 길. 타멜 거리로 올 때와 반대편 도로를 달리며 나는 바깥 풍경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부서지거나 그렇지 않은 건물 사이로 네팔리들은 참 열심히도 돌아다녔다. 키가 크고 마른 사람. 키가 작고 마른 사람. 까만 사람과 조금 덜 까만 사람. 남자와 여자와 노인과 아이. 모든 것이 망가진 사이에서도 그들은 여기에서 저기로 저기에서 여기로 바쁘게 움직였다. 나는 문득 네팔에 오기를 잘 했다고 생각했다. 비싼 숙소비와 커피값과 음식값을 꼬박꼬박 지불하기를 잘 했다고. 검표원의 눈을 피해 티켓값을 내지 않는 행동을 하지 않길 잘 했다고. 조금 불편했지만 어쨌거나 이곳에서 일주일을 보내기를 참 잘 했다고 생각했다. 이 기분이 최대한 오래가기를 바라며 공항으로 향했다. 타멜 거리가 등 뒤로 조금씩 멀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