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빈은 내게 조금 억울하다고 말했다
태국은 두 번 가보았다
태국은 두 번 가보았다. 첫 번째는 푸켓, 두 번째는 방콕. 두 번의 방문 모두 같은 이와 함께였다.
일행과는 방콕 공항에서 만나기로 했다. 나는 비엔티안에서, 친구는 인천공항에서 온다. 태국에 먼저 도착한 건 나였기 때문에 수완나폼 공항에서 반나절을 기다렸다. 기다리는 건 내가 가장 잘하는 일 중 하나다. 수완나폼 공항은 인도를 일곱 번이나 오가며 여러 번 경유했던 곳이기 때문에 익숙했다. 어쩌면 내가 한국을 제외하고 가장 많이 가본 나라는 태국일지도 모르겠다. '방문'의 기준이 '공항까지만'을 포함한다면 말이다.
시간이 되어 게이트가 열렸고 일행들이 나타났다. 내 친구와 그의 남동생이다. 친구의 남동생은 나보다 네 살이 어렸고 우리는 단둘이 인도를 두 달 동안 여행한 적이 있다. 성인 남녀가 60일을 넘게 한 방을 쓰는 동안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말을 믿어준 건 그의 친누나 J뿐이었다. 사람들은 우리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거나 혹은 그와 나 둘 중에 성적인 어떤 결함이 있을 것이라 마음대로 넘겨짚었다. 그런 식의 오해는 혼자 여행 다니는 여자들에게는 흔한 일이었기 때문에 별 느낌은 없었다. 그에게는 어땠을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세 사람은 태국 여행은 공항에서부터 천천히 시작되었다.
나와 친구는 백수였지만(나는 프리랜서라 생각하나 남들은 백수라 불렀다) 남동생은 짧은 휴가를 온 것이기 때문에 방콕 여행 내내 바쁘게 움직였다. 숙소에 짐을 풀자마자 지역 곳곳에 있는 사원을 구경하고, 유명하다는 음식들을 사 먹었고, 부스에서 파는 밀크티를 시도 때도 없이 들이마셨다. 방콕은 너무 더웠고 우리는 셋 다 더운 것이 너무 싫었기 때문에 돌아가며 자주 지쳤다. 너무 싫은 것은 또 있었다. 방콕에는 바퀴벌레들이 너무 많았다. 방콕의 바퀴벌레들은 유난히 큰 주제에 여유까지 넘쳤는데 사람이 오면 재빨리 어둠으로 숨어버리는 한국 것들과 다르게 그것들은 바닥 한가운데서 졸고 있거나 사람의 몸을 타고 기어 올라왔다. 때문이 골목을 걸을 때 우리는 자주 핸드폰 플래시를 켰고 셋 중 하나의 배터리는 늘 금방 방전되었다.
우리는 하루에 한 번은 꼭 마사지를 받으러 갔다. 방콕에는 마사지 샵이 많았지만 실력이 좋은 샵만 골라 갈 수 있었던 건 숙소 사장인 케빈의 도움이 컸다. 케빈은 처음, 로비에 손님처럼 앉아 친근하게 말을 걸었는데 때문에 여행자들끼리만 통하는 특유의 친근감에 이끌려 그와 덜컥 라인 아이디를 주고받았다. 알고 보니 그는 손님이 아니라 직원이었고, 조금 더 알고 보니 일반 직원이 아니라 사장이었다. 그가 사장임과 동시에 실은 변호사였다는 사실은 우리가 라인으로 이틀 넘게 연락을 주고받은 뒤에야 알 수 있었다.
"왜 처음부터 사실대로 말하지 않았어?"
"굳이 자세히 말할 필요는 없으니까. 특히 여행자에게는"
자세히 물어보지는 않았으나 그는 변호사라는 이유만으로 갖가지 추근거림과 말도 안 되는 청탁을 자주 받은 모양이었다. 때문에 고향인 대만을 떠나 방콕에서 사업을 시작하게 된 것은 아닐까. 이 역시 추측일 뿐이다. 그의 말대로 나는 여행자고, 때문에 우리는 서로에 대해 너무 많은 것을 알 필요는 없었으니까.
케빈의 도움으로 우리는 방콕을 조금 더 잘 여행할 수 있었다. 태국은 여행자들에게 친절했고 맛있는 것이 많았고 그러면서 대부분의 것이 저렴했기 때문에 우리는 여러 가지 것들을 무람없이 즐겼다. 여행자 거리로 불리는 카오산로드는 조금 실망스러웠지만 에까마이는 좋았다. 에까마이는 지인들이 강력하게 추천한 곳 중 하나였는데 그들은 커피 맛과 거리 풍경이 예술이라며 극찬했으나 사실 내가 에까마이를 사랑했던 이유는 망고 때문이었다. 에까마이 거리에는 망고를 잘라 투명 플라스틱 박스에 넣어 파는 가게가 많았는데 한 박스에 100밧(3,600원)밖에 안 하면서도 맛은 기가 막혔다. 태국 망고는 목구멍으로 넘어가기도 전에 입안에서 몽땅 녹아버릴 것처럼 달았는데 더워 죽을 것 같은 순간에도 망고만 한 입 먹고 나면 온몸에 피가 도는 것 같았다. 우리는 틈만 나면 에까마이와 텅러 인근을 배회하며 하루에 한두 번씩 망고를 밥처럼 사 먹었다.
친구의 남동생이 한국으로 돌아가고 난 뒤, 우리는 지역을 옮기기로 했다. 방콕에 이미 일주일 이상 머물렀고 때문에 조금 지루해졌다. 여러 가지 선택지를 두고 우리는 조금 오래 고민했다. 사실 나는 빠이를 가보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라오스에서부터 빈번히 터지기 시작한 코피가 점점 심해진 것이다. 가까운 클리닉센터를 방문하니 의사는 너무 심한 이동이나 운동은 피해야 한다고 단단히 일렀다. 결국 우리는 케빈에게 다음 여행지를 추천해달라고 부탁했다. 케빈은 대만 사람이지만 영어와 태국어에도 능했고 그만큼 이 나라에 대해 잘 알았다. 케빈은 우리에게 후아힌을 추천했다. 후아힌은 방콕에서 기차로 세 시간 정도 떨어진 바닷가인데 태국에서도 유명한 휴양지이며 옛날부터 왕실 사람들이 자주 찾는 여행지라고도 했다. 친구는 '왕실 사람들'에 끌린 것 같지만 나는 '바다'에 꽂혔다. 갑자기 '바다'라는 단어를 들으니 바다가 너무 가고 싶어졌다. 강 말고 바다. 계곡 말고 바다. 바닷가 썬배드에 누워 땡모반을 마시면 너무 행복할 것 같았다. 거기에 내가 좋아하는 송골매나 최백호의 노래를 곁들이면 더더욱 좋겠지. 우리는 곧장 차표를 끊었고 다음 날 케빈의 말대로 몇 시간 만에 후아힌에 도착할 수 있었다.
후아힌에는 태국 현지인보다 외국인이 훨씬 많았다. 그중 나이 많은 서양인이 특히 많았는데 그들은 아주아주 느리게 움직였기 때문에 자주 답답했다. 언젠가 유럽인들 사이에서 평생 모은 돈을 모아 동남아 어귀에서 여생을 보내는 것이 유행처럼 퍼지고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후아힌은 예쁜 바다와 고급스러운 레스토랑, 그리고 숲이 있었고 때문에 돈 많은 유럽인들에게 선택받기에 무척 좋은 듯 보였다. 그 사이에서 몇 안 되는 동아시아인인 나와 친구는 카레나 팟타이, 랍스터, 새우 같은 것들을 먹으며 시간을 보냈다. 열흘 전 회사를 때려치운 친구는 후아힌이 너무 좋아 보였고 글을 쓰거나 사진을 찍는 것이 업인 나에게도 후아힌은 나쁘지 않은 동네였다. 시원한 카페와 맛있는 커피, 예쁜 풍경과 친절한 사람들은 뭔가를 생각하거나 만들어내는 데 도움을 주었고 우리는 그 사이에서 음악을 듣거나 이야기를 하거나 수채화를 그리는 식으로 낮과 밤과 새벽을 보냈다.
그런 중에도 나는 케빈과 계속 연락을 했다. 케빈은 나와 말이 잘 통한다고 생각했는지 시도 때도 없이 메시지를 보내왔는데 미안하지만 나는 그가 영어로 하는 유머에 그다지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어쨌거나 영어는 나에게 제2의 언어였고 무엇보다 케빈에게는 남을 웃기는 재능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락을 계속 이어간 건 케빈이 '인생이 몹시 따분하다'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변호사에, 호텔 사장에, 젊고, 돈 많은 사람도 따분함을 느낄 수 있구나. 나는 케빈의 발언이 약간 신기했고 일종의 동질감 같은 것을 느꼈던 것도 같다. 케빈은 우리에게 언제 방콕으로 돌아오냐고 매일 물었고 나는 그때마다 모르겠다고 대답했다. 정말로 우리는 언제 방콕으로 돌아갈지 알 수 없었다. 방콕이 지겨워져 후아힌으로 왔듯, 아마 떠난다면 이곳에 흥미를 잃을 때쯤이 아닐까. 그러다 참지 못하겠는지 케빈이 뜬금없이 물었다.
-내가 후아힌으로 갈까?
파스타를 집어먹다 말고 나는 웃었다. 소심하다고 여겼던 그의 성격에 비해 좀 뭐랄까, 많이 저돌적인 발언이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러지 말라고 답장을 하려다가 문득 호기심이 들었다. 그가 정말 후아힌으로 올지 안 올지. 그래서 고쳐 적은 문장을 그에게 전송했다.
-와 봐. 올 수 있으면.
그리고 이틀 뒤 케빈은 정말로 후아힌으로 왔다. 나는 길 건너편에서 손을 흔드는 그를 보며 약간 아득한 기분이 되었다. 나를 보러 기차를 타고 여기까지 온 남자. 손님인 줄 알았다가 사장인 줄 알았다가 알고 보니 변호사였던 남자. 나보다 어리고 영어를 쓰는 남자. 친구인 줄 알았는데 지금부터는 아닐지도 모를 남자. 그때의 내 감정을 솔직히 말하자면 '그와 사귈 마음은 없지만 그가 주는 관심은 나쁘지 않다' 정도였다. 멀쩡한 남자가 저 정도까지 하는데 싫어할 여자가 세상에 어디 있을까. 사랑받는 기분은 언제나 가슴을 뛰게 하고, 그러는 동안은 왠지 조금 더 잘 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드니까.
케빈의 등장에 친구는 조금 불편해했지만 그래도 우리는 재미있게 놀았다. 케빈은 우리가 모르는 현지 음식을 많이 알려주었고 먹는 방법이나 조금 더 맛있게 먹을 수 있는 조합도 알려주었다. 케빈은 대만 사람이기 때문에 밀크티에는 별로 흥미를 느끼지 않는 것 같았지만 커피는 좋아했다. 내가 바리스타 자격증을 취득한 이력이 있다는 말을 하고부터는 커피 전문점을 지날 때마다 질문도 자주 했다. 이건 무슨 원두야. 손으로 내리는 거랑 기계랑 내리는 건 어떤 차이가 있어. 어떤 커피는 신맛이 나던데 그건 왜 그런 거야. 너는 참 궁금한 게 많구나. 그래서 공부를 잘하는 건가. 나는 잘 알거나 잘 모르는 정보를 영어로 바꾸어 그에게 말해주었다. 가끔 단어가 떠오르지 않으면 파파고 번역기를 쓰거나 친구에게 문장을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다. 유럽에서 살다 온 그녀는 케빈을 조금 귀찮아했지만 그래도 성실히 대화에 참여했다.
케빈은 우리와 같은 숙소 옆방에 묵었다. 때문에 옥상 라운지는 우리의 아지트가 되었다. 케빈과 나는 커피를 마시거나 담배를 피우면서 이런저런 얘기를 했다. 한국 노래나 유명한 연예인, 비슷한 그늘이 있는 한국과 대만의 역사, 중국에 대한 생각, 그리고 각자가 사귀어본 이성의 횟수 같은 것들에 대해. 케빈은 한국어를 조금 할 줄 알았고 나는 한자를 약간 읽을 줄 알았기 때문에 우리는 서로의 이름을 종이에 쓰며 발음법을 알려주었다. 내 한국 이름은 서현지야. 내 대만 이름은 킹 위어웨이야. 케빈은 내 이름을 '형지'로 발음했고 나는 케빈 이름을 '위어웨이'라고 말했는데 그는 내 중국어 억양이 너무 웃기다며 계속 웃었다. 우리 말에는 성조가 있어. 나도 알아. 아는 데 왜 못해. 알아도 못 하는 게 있어 너도 내 이름 이상하게 발음했거든? 왜 내 발음이 어때서. 형지. 형지. 뭐 위어웨이 위어웨이. 우리는 이유 없이 한참을 웃다가 결국 영어 이름을 쓰기로 합의했다. 현지와 위어웨이는 도저히 가까워질 수 없는 언어들 같았다.
케빈은 나와 친구에게 맛있는 것들을 많이 사주었다. 스파게티나 피자, 커피, 밀크티, 그리고 여러 태국 음식들. 후아힌은 방콕보다 물가가 비쌌기 때문에 나는 돌아가며 내자고 말했지만 케빈은 그건 대만 문화가 아니라며 거절했다. 결국 카운터에서 여러 번의 옥신각신 끝에 나는 한 번의 저녁값을 낼 수 있었는데 이 일로 케빈은 어쩐지 상처받은 얼굴을 했고 이 광경을 목격한 태국인 직원은 조금 괴랄한 표정을 지었다. 맛있는 것 외에도 케빈이 우리에게(정확히는 나에게) 해준 것은 많았다. 대신 짐을 들어준다거나, 손 선풍기를 받쳐준다거나, 태국어로 툭툭비를 흥정하거나 주스를 사 오는 것 같은. 그는 우리와 함께 있는 시간이 좋아 보였고 그래서 후아힌에 더 오래 머물고 싶어 했지만 가게 일을 돌봐야 했기 때문에 곧 방콕으로 돌아가야 했다. 떠나는 날 아침, 케빈은 조그만 짐가방을 손에 쥔 채 내게 물었다.
"우리, 방콕에서 다시 볼 수 있는 거지?"
나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케빈과 함께한 3일 동안 나는 정말 그와 사귈 수는 없겠다고 느꼈지만, 그럼에도 다시 보는 것쯤은 어렵지 않을 것 같았다. 어차피 나는 여행자고 그렇기 때문에 곧 한국으로 돌아갈 테고, 그러면 케빈도 자연스레 기억에서 나를 지울 테니까. 함께 있는 동안만 즐거우면 되는 거니까. 여행은 다 그런 거니까.
일주일 뒤 케빈과 나는 방콕에서 다시 만났다. 함께 커피를 마시고, 비를 맞고, 바퀴벌레를 피해 밤 산책을 했고 그로부터 한 주가 더 지난 뒤엔 내가 태국을 떠나는 방식으로 우리는 이별했다. 공항 택시에 오르기 전, 케빈은 내게 조금 억울하다고 말했다. 너는 떠나지만 나는 남아야 하잖아. 너는 가버리면 그만이지만 나는 계속 여기에 남아야 한다고. 그래서 너보다 더 슬퍼야 한다고. 생각보다 케빈은 나를 많이 좋아했던 것 같다. 그래서 미안했다. 받은 만큼의 사랑을 오롯이 돌려줄 수 없는 심정은 이런 것이구나. 나는 과거 내가 더 많이 좋아한 적 있었던 남자들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들도 나처럼 조금 고맙고 많이 미안해했을까. 고마워하긴 했을까. 아니 미안해하긴 했을까. 유리창 너머로 케빈이 손을 흔들었다. 나는 케빈보다 조금 더 오래 오른 손을 흔들어주었다.
태국에서의 에피소드는 분명 이것보다 많았는데 이상하게 생각나는 건 케빈과 후아힌뿐이다. 아시아티크도, 딸랏롯파이도, 골동품 상점도, 방콕의 미친 것 같던 러시아워도, 음악도, 패션도 모두 기억은 나지만 막상 손이 써 내려가는 것은 온통 케빈에 대한 것이라니. 어쩌면 나는 생각했던 것보다 그를 좋아하고 있었던 걸까.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건 아닌 것 같지만. 그때로 다리 돌아간다 해도 그와 어떤 일이 생겼을 것 같진 않지만. 어쨌든 나의 두 번째 태국 여행은 케빈으로 시작해 케빈으로 끝이 났다. 그는 현재 방콕이나 타이베이에서 케빈 혹은 킹 위어웨이로 잘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나에게 후아힌이 아름다웠듯 그에게도 지아가, 현지 혹은 형지와의 그곳이 예쁜 그림으로 남아있기를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