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답동 울타리 안은 영상의 작은 세계였다
나고 자란 도시인
대구를 제외한다면,
창원은 아마 국내에서
가장 자주 방문한 지역일 것이다
나고 자란 도시인 대구를 제외한다면, 창원은 아마 국내에서 가장 자주 방문한 지역일 것이다. 출장을 밥 먹듯 갔던 서울보다. 경상도 최대 관광지인 경주나 부산보다. 창원 사람들에게는 조금 미안하지만, 6년 전 J를 만나기 전까지 나는 창원이라는 도시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다. 경북인지 경남인지, 전라도인지 충청도인지도 감이 오지 않는 동네. 들어본 적도 없고 가볼 기회는 더더욱 없었던 지역. 그런 창원에 대해, 약간의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창원은 경상남도에 있는 계획도시다. 한때 제일합섬을 중심으로 경상남도를 휘어잡는 산업도시였고, 위치적으로 부산과 근접해 있으며 지금은 마산과 진해와 통합되어 광역시에 맞먹을 규모가 되었다. 마·창·진 세 곳이 통합될 당시 지역 이름을 두고 각 주민들이 얼마나 치열하게 다투었는지는 J의 부모님을 통해 자세히 들을 수 있었다. J의 어머니는 마산에서 나고 나란 토박이였는데 애초에 마창진이 하나로 통합될 때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도시 이름이 '창원'으로 퉁쳐진다고 통보받았을 때는 분한 마음에 여러 번 가슴을 쳤다고 했다. 내 고향이 없어진다니. 마산이 사라진다니. 해당 통보에 분노한 사람은 아주 많았고 그래서 타협점을 찾아 지금은 '창원시 마산회원구 123-4'라는 식으로 표기된다고 했다. 없어졌지만 없어지지 않은. 합쳐졌지만 합쳐지지 않은 채로 마산과 진해와 창원은 조금 불안정하게 함께 하는 중이었다.
창원을 방문했던 이유는 당연히 J 때문이었다. 친한 사람이 나고 자란 도시나 다녔던 학교를 방문해보는 건 내 오랜 취미 중 하나였고, 그것을 아는 J는 흔쾌히 고향집으로 나를 초대했다. J는 마산에서 태어났고 이후 창원 소답동으로 이사해 10대의 대부분을 그곳에서 보냈다. 소답동 본가에 도착했을 때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J네 집은 세단 두 대를 넉넉히 세울 정도의 마당이 있었고, 주택을 중심으로 앞,뒤,옆 텃밭이 있었고, 무엇보다도 집이 아주아주 넓었다. 이 집은 J네 아버지가 직접 설계했다고 했는데 그래선지 일반 아파트와는 조금 다른 구석이 많았다. 실례지만 여기서부터 J네 아버지는 영상, 어머니는 옥선이라 칭하겠다.
영상은 (그의 표현에 따르면) 경상도 시골 중에서도 특히 시골인 의령에서 태어났다. 여러 형제들 사이에서도 특출나게 머리가 좋았던 영상은 어렵지 않게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마산에 있는 한 대학교에 입학했다. 영상은 똑똑한 두뇌를 갖고 태어났지만 안타깝게도 집이 부유한 편은 아니었다. 형제들 사이에서 먹을 것으로 자주 다투었고, 여름엔 더위와 겨울엔 추위와 싸우며 어렵사리 생계를 이었다. 그는 학기 중에도 부모님을 따라 밭일을 거들었고 형들과 동생을 챙겼고 와중에 짬이 나면 스스로를 챙기는 식으로 10대와 20대를 보냈다. 모기와 벌레들이 우글거리는 의령 집에 사는 동안 영상은 자주 상상했다. 만일 돈이 아주 많이 생긴다면 그때는 꼭 내 집을 지어야지. 나와 내 가족들을 보호하는 울타리를 만들어야지. 마당에는 나무를 심고, 그 아래 멋진 차를 세우고, 휴일이면 가족들과 산이며 들로 마음껏 여행을 떠날 거야.
영상의 오랜 계획은 옥선을 만나면서 조금씩 실현되었다. 옥선과 결혼한 후 영상은 조그만 컴퓨터 가게를 차렸고, 때마침 대한민국에 IT 붐이 일기 시작하면서 작았던 가게는 일순간 중견 규모의 회사로 성장했다. 영상과 옥선은 밤낮없이 일했다. 회사가 커질수록 부는 축적되었지만 그만큼 할 일도 쌓였다. 두 사람은 각자 회사의 안과 밖을 지키느라 정신이 없었다. 창원이 산업도시로 크게 주목받고 있을 때라 더욱 그랬다. 영상은 전에 없던 부를 거머쥐었고 더 이상 밭일을 하지 않아도 되었지만 시간이 없기는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여전히 바빴다. 두 사람의 신혼 생활이 어땠는지 자세히는 알지 못하지만 어쨌거나 영상과 옥선은 현재와 미래를 건 사업을 지켜내기 위해 사력을 다했을 것이다. 그렇게 1989년이 되었고 두 사람 사이에 떡두꺼비 같은 딸이 태어났다. 옥선의 아버지는 손녀 딸이 빛나는 꽃처럼 자라길 바라는 마음을 담아 '빛날 진'과 '꽃 영'을 써 진영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영상의 꿈이 실현된 것은 진영이 막 중학교 3학년이 되었을 무렵이었다. 영상은 소답동에 있는 부지를 매입했고 그곳에 넓고 튼튼한 집을 지었다. 땅은 아주 넓었기 때문에 원하는 만큼 집 평수를 늘릴 수 있었다. 영상은 집 바닥에 원목을 깔고 벽면으로는 대리석을 세운 뒤 창살이 튼튼한 창문을 곳곳에 끼웠다. 화장실이 두 개나 있는 집은 당시에 흔치 않았고 영상은 그 흔치 않은 일을 스스로 이루어내며 크게 기뻐했다. 차를 세울 마당을 확보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차는 한 대뿐이지만 혹시 몰라 두 대를 세울 수 있도록 넓게 만들었다. 울타리 안으로는 몇 그루의 나무를 심었고, 나무 아래로는 양파나 파 혹은 분꽃들이 자랄 수 있도록 크고 작은 텃밭도 만들었다. 영상은 더 이상 생계를 위해 농사를 지을 필요가 없었지만 그래도 텃밭을 보고 있으면 왠지 모를 평안을 찾았다. 소답동 울타리 안은 영상의 작은 세계였고, 그 안에서 옥선과 진영과 그의 동생 병환은 세상의 풍파로부터 오래오래 안전할 수 있었다.
소답동 집에 처음 방문했을 때 나는 집의 크기 말고 다른 것에 연이어 놀랐다. 영상과 옥선이 만취한 상태로 나를 맞았기 때문이다.
"어어! 진영이 왔나!"
'진'에 악센트가 들어가는 대구 사투리와 다르게 '왔'에 힘이 들어가는 경남 사투리는 어딘가 많이 낯설었다. 영상은 흰색 러닝셔츠를 입고 한층 격양된 상태로 우리를 안으로 안내했다. 나는 술 냄새를 맡으며 조금은 얼떨떨한 마음으로 영상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았다. 그것은 창원에 대한 나의 첫인상으로 오래오래 남았다.
첫 방문 이후 한 달에 한 번꼴로 소답동을 방문했다. 어떨 때는 기차로, 어떨 때는 버스로 갈 때도 있었지만 가끔은 병환이 차로 우리를 데리러 오기도 했다. 그때마다 영상과 옥선은 술에 취해 창원이나 마산에 대한 이야기를 앞다투어 들려주었다. 두 사람으로부터 들은 그 지역의 옛 풍경은 다음과 같다.
창원에는 바덴바덴과 고구려라는(지금은 사라진) 나이트클럽이 있었다. 직장인들은 퇴근 후 바덴바덴이나 고구려에서 만나 술을 마시거나 춤을 췄다. 노동을 끝내고 마시는 소맥은 달콤했고 그 안에서 경남의 청춘 남녀들은 자주 만나고 헤어졌다. 바덴바덴에 가지 않는 날에는 중앙동에 있는 술집에서 동료들과 회포를 풀었다. 현재는 상남동에 밀려 구시가지 정도로 취급받지만 그때만 해도 중앙동은 대도시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 음주가무가 지겨운 날은 창동에서 영화를 보았다. 창동에는 크지도 작지도 않은 영화관이 있었는데 두 사람은 꼭 입장 전 입구에 있는 땅콩집에 들러 땅콩 한 봉지를 샀다. 땅콩 없이 영화를 보는 건 왠지 절대 해서는 안 되는 일종의 룰처럼 여겨졌다. 영상과 옥선은 땅콩을 오도독 씹으며 영화를 봤다. 옥선은 영화에 집중했지만 영상은 그렇지 못했다. 영상은 옆자리에 앉은 애인을 신경 쓰느라 영화 줄거리를 하나도 이해하지 못했고 이 사실은 두 사람이 결혼 후에도 아주 늦게야 말할 수 있었다고 한다.
가족을 이루고 부까지 거머쥔 영상은 요트를 두어 대 샀다. 그 무렵 영상은 낚시에 큰 흥미를 느끼고 있었다. 평생 논과 밭에서 자라온 그에게 푸른 바다와 배는 큰 흥분을 일으켰다. 영상은 옥선과 진영과 병환을 데리고 여러 바다로 낚시를 다녔다. 그는 낚시에도 소질이 있었고 때문에 일 년에 몇 번 볼까 말까 하다는 대어를 자주 낚아 들뜬 표정으로 사진을 찍었다. 그는 진영과 병환에게 낚싯바늘에 미끼를 끼우는 법이나 줄을 당겼다 푸는 방법, 그리고 건져내는 타이밍 같은 것들을 자세히 알려주었다. 배 위에서 잡은 것들은 대부분 네 사람의 저녁거리가 되었다. 영상은 예리한 칼로 물고기의 배를 갈랐고 뼈와 살을 살뜰히 발라낸 후 회로 먹거나 매운탕을 끓이는 식으로 식구들의 끼니를 책임졌다. 진영을 처음 만났을 때, 그녀가 물고기 이름을 신기할 정도로 많이 알고 있었던 것, 그리고 회 뜨는 방법까지 상세히 설명했었던 사실을 나는 기억한다. 그건 모두 영상과 옥선과의 뱃놀이가 있었기 때문이리라.
커다랗고 튼튼한 집 말고도 소답동에 대해 자랑할 거리는 더 있었다. 소답동은 어릴 적부터 불렀던 '고향의 봄'의 실제 배경이었다.
나의 살던 고향은 꽃 피는 산골
복숭아 꽃 살구 꽃 아기 진달래
울긋불긋 꽃 대궐 차린 동네
그 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
머리가 기억하지 않아도 입이 알아서 부르는 이 노래는 이원수라는 사람이 지은 노래인데, 여기에 대해서는 마산 토박이인 옥선이 신나게 설명해 주었다.
"원래 내 알라 때만 해도 소답동은 으-음청 잘 살던 동네였그든. 지금은 쪼매만 동네 같애도, 원래는 여가 창원 쩨일로 부촌이었다카이. 한옥집도 많고 사이사이로 복숭꽃도 을매나 많았다꼬. 그래가 우리가 굳이 소답동으로 이사를 안 왔나."
고마 그때 소답동이 아니라 상남동으로 갔어야 했는데,라는 말을 우스갯소리처럼 하며 옥선은 남은 소주를 들이켰다. 옥선은 술에 취할 때마다 팔용동이나 상남동으로 이사 가지 않은 것을 후회한다고 자주 말했지만 그래도 나는 그녀가 소답동에 대해 말할 때만큼은 진심을 다해 웃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름도 예쁜 소답동. 고향의 봄의 배경이 된 곳. 한때 부촌이었던 곳. 그리고 영상의 세계가 있는 곳. 그곳에서 나는 삼겹살도 먹고 매실 장아찌도 먹고 진영이나 병환이와 마룻바닥에 드러누워 아는 형님이나 미스터 션샤인 같은 드라마를 보며 평온한 시간을 보냈다.
6년이 지난 지금, 창원은 한 대구 여자의 또 다른 본가가 되었다. 이제 나는 진영 없이도 마산시외버스터미널에 내려 소답동까지 갈 줄 알았고, 경남 택시 아저씨들의 난폭한 운전솜씨에 익숙해졌으며, 팔용동이나 도계동, 중앙동에 있는 몇몇 커피 전문점이나 맛집들을 알았다. 요즘은 마산이라 불러야 할지 창원이라 불러야 할지 모를 곳에 있는 창동에 관심이 생겼는데, 창동은 현재 내가 쓰고 있는 단편소설의 배경으로 자주 등장한다. 창원에 내려갈 때마다 나와 병환은 차를 타거나 공용자전거인 누비자를 빌려 세로수길과 용지호수 일대를 돌아다닌다. 용지호수는 대구에 있는 수성못보다 크고 조용하다. 봄이 오면 예쁜 벚꽃이 피었고 가을이나 겨울이 되면 나름의 스산함으로 운치를 만들어 냈다. 아직 진해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때문에 '창원'에 대해 다 안다고는 말하지 못하지만. 어쨌거나 창원은 너무 귀엽고 사랑스러운 동네기 때문에 섣불리 다 알아버리고 싶지 않은 동네로 내게 남아있다.
올가을이 가기 전, 영상의 차를 타고 옥선과 진영과 병환과 함께 북면에 있는 미나리 삼겹살을 먹으러 가자고 해야겠다. 나는 J네 가족이 아니지만, 그래도 네 사람은 나를 반겨줄 것이다. 소답동은 원래 그런 곳이고, 영상네 가족은 취한 듯 취하지 않은 듯 언제나 즐겁고 따뜻하게 사는 사람들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