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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제인 영감이

홀리몰리 인도델리

by 초부정수

힘들어 보이는 몸을 소파에 깊이 묻고 담배에 불을 붙였다. 한 모금 깊게 빨아들여 삼키더니 하얀 담배연기를 한껏 머리 위로 품어낸다. 놀란 표정의 여성 점원이 달려와 손짓을 해가며 이곳에서는 담배를 피우면 안 된다고 한다. 영감은 그녀의 한국말은 못 알아들었지만,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는 알고 있다. 그리고 서있는 그녀를 쳐다보는 영감의 입술 사이로 약간은 쉰 듯한, 그리고 약간은 기운이 떨어진 듯한 낮은 목소리가 들려온다. “애쉬 트레이 플리즈 _ Ashtray please..” 담배를 피우면 안 된다는 안내를 무시하고 재떨이를 가져다 달라고 하는 영감의 말에 그녀는 짐짓 놀란 것 같아 보인다.


하얗게 센 약간의 곱슬머리에 기름을 바른 그는 어두운 갈색 피부를 가지고 있다. 피부색과 아주 잘 어울리지는 않는 화려한 색깔의 지그재그 무늬가 들어간 고가의 미쏘니_ Missoni 브랜드 스웨터를 입었다. 점원은 당황한 표정이었지만, 주변에서 재떨이로 쓸 수 있는 은쟁반을 찾아가져다준다. 전혀 주저하는 기색 없이 단호한 영감의 요구에 주눅이 들었거나, 이야기를 해봐야 입만 아플 것 같아 우는 아이 떡 하나 준다는 생각을 했을지도 모른다. “땡큐_Thank you.” 영감은 만족한 듯 고맙다며 가져다준 은쟁반에 담뱃재를 털었다. 무심한 듯 담배를 들고 있는 그의 손가락에는 눈에 띄게 큰 다이아몬드 반지와 종류를 알 수 없는 보석이 박힌 금반지가 몇 개 끼워져 있다.


아마도 2003년 초봄이었다. 그날은 일요일이었고, 외동딸과 함께 영감이 찾아온 곳은 서울 청담동의 갤러리아 백화점 명품관이다. 영감은 소공동의 롯데 호텔에 머물고 있었다. 일요일이라 콜 밴 택시를 하루 빌려 명품 상점이 있다고 소개받은 서울의 로데오 거리에서 딸의 옷을 사주려는 계획이었다. 그리고 점심때쯤 영감이 나에게 전화를 했다.


“알려준 대로 로데오 거리에 왔지만 네가 말한 명품숍을 단 한 개도 찾지 못하겠는데 어찌 된 거야?”


“거기는 사방에 보이는 것이 다 비싼 명품을 파는 곳인데... 택시 기사님 좀 바꿔봐요.”


“기사님이세요? 로데오거리에 명품이 없다는데 무슨 말이에요? 거기 길 양쪽으로 루이비통이나 구찌, 아니면 그냥 봐도 비싸 보이는 물건을 파는 고급 빌딩 같은 것들이 안 보이나요?”


“여기는 문정동 로데오라서 그런 것은 없는데... ”


“문정동 아니고 청담동, 압구정동 로데오로 오셔야 하는데...”


미국의 비벌리힐스_Beverly Hills도 아닌데 서울 여기저기에 굳이 로데오거리라는 것을 만들어 놓아 일이 복잡해졌다.

tempImageUGp8AW.heic 미국 할리우드 로데오 거리 표지
tempImageqdnp1b.heic 서울 압구정동 로데오 거리

영감은 딸을 아주 많이 사랑하는 것 같았다. 출장을 가도 늘 딸을 데리고 다니는 것을 봐도 그렇다. 한국에 오면서도 딸만 데리고 왔다. 인도는 인구도 많지만 사람들이 설탕과 기름진 것을 좋아해서 그런지 당뇨병 환자가 세계적으로도 가장 많은 나라이다. 영감도 역시 당뇨가 심했는데, 미팅 중에도 당이 떨어지면 딸 기티카가 주사기로 영감의 배에 인슐린 주사를 놓아야 할 때도 있었다. 건강이 그리 좋지 않음에도 영감은 늘 담배를 손에서 놓지 않았고, 술은 와인을 즐겨 마셨다. 영감이 금주가라는 소문도 있었지만, 내가 알기로 그는 와인을 많이 마셨다. 기티카는 여느 딸과 마찬가지로 그런 아버지에게 늘 잔소리를 해대곤 했지만, 영감은 그저 귀엽다는 듯이 웃기만 했다.


갤러리아 백화점 명품관의 여성복 코너는 일요일이지만 꽤 한산했다. 평소에도 백화점이나 패션에 별 관심이 없던 나는 아내에게 쇼핑을 좀 도와달라고 부탁했고 이제 영감의 외동딸 기티카는 아내와 함께 청바지와 셔츠 등을 둘러보는 중이다. 기티카는 청바지 한 개와 셔츠 한두 개가 마음에 들었는지 고르는데 30분 도 채 걸리지 않았다. 여자들의 쇼핑 시간 치고는 너무 짧아 당황스럽기까지 했다. 원래 두어 시간은 둘러보고 또 두어 시간은 입어보고, 또 그다음 주에 가서 다시 똑같은 일을 하는 것이 여자들인 줄 알았는데 내가 틀렸다. 물건을 고른 딸이 더 살만한 것이 없다고 하자 영감은 은쟁반을 가져다준 여성 점원에게 계산을 하며 현금을 지불했다. 청바지 한 개가 당시 가격으로 200만 원이 넘었고 셔츠와 스웨터의 가격도 대략 그 수준이었다. 순간 결혼할 때도 집사람에게 200만 원짜리 옷은 사주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담배를 꺼달라고 한 점원이나 재떨이를 가져달라고 한 영감이나 모두 서로 무례하다 생각하고 있다는 것에 또 한 번 놀랐다.


그런데, 왜 굳이 서울의 한 거리 이름을 로데오라고 했을까? 리처드 기어와 줄리아 로버츠 주연의 영화 "귀여운 여인_Pretty Woman"이 아메리칸드림을 배경으로 깔며 보여준 할리우드의 로데오 거리에서 따온 이름이라는 것은 알겠지만, 청담동 로데오는 코리안 드림과 별 관련이 없어 보인다. 우리나라는 이미 세계 최고 수준의 도시화를 이루고 있고 사람들은 도시의 거리를 따라 이동하고 소통하며 살아가기 때문에 도로와 지역의 명칭은 때로는 중요하다. 사람들의 생각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재단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서울의 을지로, 충무로를 아직도 일제 강점기의 명칭이었던 황금정통, 본정통이라고 부른다면 일본에 대한 감정이 지금과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그것이 좋은 방향이건 그렇지 않은 방향이건 그렇다는 것이다. 경부선, 상행선, 하행선과 같은 명칭도 우리는 흔히 사용하지만 그 명칭들은 한 세기 전의 비민주적인 사회의 잔재라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경(京)이라는 한자에 대한 설문해자의 설명은 사람이 만들어 놓은 높은 언덕(人所爲絶高丘也)인데, 오래전에는 왕과 귀족이 살던 서울이라는 뜻으로 사용되어 경도(京都)니 경성(京城)이니 하는 단어로 표현되었던 것이다. '삼공의 출졸(윤세영 저)'의 어느 부분에는 이런 내용이 나온다. '경부선(京釜線)이라는 명칭은 서울과 부산을 잇는 고속도로와 철도를 일컫는 것이지만 왕조시대의 경도를 말하는 것인지 일제 강점기의 경성부를 이르는 것인지 알 수 없다. 상행선과 하행선 역시 같은 맥락으로 만약 통일이 되어 원산이나 함흥에서 서울로 오는 차편을 상행선으로 볼 것인지 하행선으로 볼 것인가?' 서쪽에서 동쪽으로 흐르는 서울 청계천의 구역 또한 조선 시대에는 웃대와 아랫대로 구분되어 물이 시작하여 맑은 쪽, 즉 서쪽은 웃대로 고관대작들의 집들이 있었고, 중랑천으로 흘러들어 가는 동쪽은 아랫대로 하위계층인 농민들이 살던 지역이었다. 상행이니 하행이니 하는 말들 역시 지리적인 사실에 근거한 것이 아닌 사람들의 사고방식에 의한 것임을 알 수 있는 좋은 예이다. 최근에 군산 출장을 다녀왔는데, 사람들이 흔히 근대화 거리라고 부르는 지역이 있다. 정식명칭은 근대문화유산거리이지만, 사람들은 무심히 그저 근대화 거리라고 한다. 일제 강점기 시대에 만들어진 곳으로 적산가옥들과 일본식 건물들이 세워져 있는 곳이다. 마치 조선의 근대화는 일본에 의한 것이라는 느낌을 주기에 충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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