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계천 로망스
도보로 서울 거리를 쏘다니다가 돌아가기 쉽다는 단순한 이유로 데이비드는 서울 시내 한 복판에 있는 호텔로 숙소를 옮겼다. 물론 택시를 탈 수도 있지만 오랜만에 돌아온 때문인지 그저 더 걷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오늘은 주말이어서 어제 함께 막걸리 파티를 한 필립과 이안이 오후에 새로 투숙한 호텔로 오기로 했다.
“밥은 먹었냐?” 필립과 이안이 호텔 커피숍으로 들어서며 아는 체를 한다.
미국과의 시차 탓인지 데이비드는 아직 이른 아침에 굳이 종로까지 가서 해장국을 먹고 왔다.
“당연히 잘 찾아 먹었다. 오랜 전통 있는 해장국 집에 갔었지. 예전에 엄앵란이 새벽 촬영 마치고 찾던 집이라고 하더군.”
“그런 유명한 해장국을 먹고 호텔 커피숍에서 해장국보다 비싼 커피 마시고 있었군!”
“리필된다고 여기. 그리고 음악도 좋고. 일단 앉아라. 커피는 내 방으로 달고 한 잔씩 하셔”
데이비드는 공연히 자신이 사회적 관습에 맞지 않는 일을 한 것은 아닐까 싶어 핑계를 댄다. 그저 해장국 먹고 싶어서 다녀왔다고 해도 되었을 텐데, 말이 길어졌다.
“ 음악이 좋구만. 이게 라트라비아타_La Traviata 전주곡이지?”
이안이 끼어들어 해장국 이야기는 그쯤에서 멈출 수 있어 다행이었다.
“그런 것 같네. 한국에서는 라트라비아타를 춘희(椿姬))라고 하지 아마?”
이안 덕분에 해장국과 호텔 커피 사이의 애매한 화제에서 벗어난 데이비드가 말을 거든다.
“그래. 일본 사람들이 붙인 이름인데, 우리가 그대로 가져다 쓰면서 굳어진 것이란 말이지. 일본인들이 이야기하는 춘희의 뜻은 [동백꽃 공주_ 椿姫 (つばきひめ, Tsubaki-hime)]이고, [동백꽃 아가씨_La Dame aux Camélias]라고 하는 제목의 프랑스 소설을 소재로 한 오페라이니 적당한 제목이라 할 수 있지. 하지만 한국에서의 춘(椿) 자는 동백나무가 아니라 참죽나무거든. 완전히 서로 다른 식물이란 말이야.”
필립은 춘희라는 제목이 늘 마땅치 않다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네 말은 낭만(浪漫)이라는 단어와 같은 맥락이라는 뜻이네. 일본어로는 의미가 있지만 우리말로는 아무런 의미가 없거나 적절하지 않은 표현인데도 그저 무의식적으로 당연하다는 듯이 쓰고 있는 것들...” 이안은 낭만이라는 단어의 모순에 대해 이야기하던 필립이 떠올랐다.
“뭐 그냥 그렇다는 말이다. 이제 와서 새삼 제목을 바꿀 필요가 있나 싶기도 하고. 다만, 그 의미를 알면 오페라의 내용이 더 잘 이해된다는 것이지. 그래도 춘희보다는 그저 라트라비아타라고 하는 게 맞는 것 같아. '길에서 벗어난'이라는 의미로 당시 사회 분위기를 알 수 있어서 동백꽃 공주보다는 적절하지 않나 싶다.”
“그런데 대체 동백꽃과 창녀가 무슨 관련이 있는 거냐? 여주인공 비올레타가 창녀 아닌가?”
“데이비드 너는 꽤 많은 한국어를 아는데 약간 이상하기도 해. 창녀라고 하기는 좀 그렇고, 정부(情婦), 영어로는 Courtesan 정도라고 하면 비슷하려나? 하여간, 우리 식으로 하면 조선시대 황진희 같은 기생이 오히려 더 잘 어울릴 것 같네. 그리고 동백꽃은 인터넷에서 뒤마 피스_Alexandre Dumas fils의 소설을 찾아보면 그 이유를 알 수 있을 거다. 참고로 명품 브랜드 샤넬_Chanel의 창업자인 코코 샤넬도 장교가 후원을 해주던 Courtesan이었고, 샤넬 브랜드의 로고도 동백꽃을 형상화한 것이라면 이해가 좀 더 잘 되려나?”
"황진희? 청산리 벽계수야로 시작하는 시를 쓴 조선의 기생이자 시인인 그 황진희 말이냐?"
"그래. 조선시대 여성 중 신사임당과 더불어 가장 잘 알려진 여성이라고 할 수 있는 바로 그 황진희."
"그런데 왜 황진희냐 갑자기? 비올레타가 유럽의 기생이란 말이야?"
"기생은 아니고... 19세기 유럽 사회는 자본주의 이데올로기가 급격히 성장하고 있었는데, 지방에서 도시로 올라온 가난한 여성들 중에 신흥 부호 세력인 부르주아에게 발탁되어 후원을 받게 된 여성들이 있었지. 이런 것은 뭐 세계 어디에서나 찾을 수 있는 이야기니까 이해가 쉬울 거고.. 하여간 그중에서도 특별히 미모가 출중하고 높은 지성을 겸비한 여성들은 상류층의 애인이 되어 후원을 받았단 말이지. 비올레타는 그런 여성이었는데, 황진희와는 조금 다르지만 공통점도 있다고 봐."
"무슨 공통점?"
"황진희가 조선의 유교적 질서 속에서 지성과 자아를 드러낸 여성상을 보여주었다면, 비올레타는 당시 유렵의 현실에 기반한 비극적 여성의 상징이지만 사회적인 낙인 속에서도 사랑하고, 희생하며, 결국 인간적인 고귀함을 보여주는 것으로 19세기 유럽 사회가 여성에게 가한 위선과 도적적 억압을 고발한 존재였지. 다시 말하면, 두 사람 모두 여성이 아닌 한 인간으로서 사회적 통념과 성 역할, 신분적인 제한에 대한 저항을 한 것이란 말이야."
이안은 필립의 설명에 '신여성'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듣다 보니 그런 것 같네. 사실 언제나 사회의 변화는 여성의 변화에서 가장 확실히 느껴지는 것 같기도 해. 그리고 그런 변화 속에는 시간과 공간을 넘어 늘 그것을 좋지 않은 풍습으로 치부하는 가부장적 남성 위주의 사내들이 더 많았다는 점이 우연은 아닐 거야. 최근 우리 사회의 젠더 갈등은 남녀 모두 시대착오적이라 생각되는데, 왜냐하면 이런 일들이 거의 백 년 전에도 있었단 말이지. 지금 생각하면 조금 이상하지만 '신여성'이라는 단어가 회자된 적이 있단 말이지."
"신여성? 어제 냉면 먹으면서 이야기 한 그 신여성 말이지? 일본인들이 요리할 때 아지노모토를 넣어야 신여성이라는 광고를 하면서 대놓고 일본에 의한 조선의 근대화를 선전하기도 하는데 이용했다는 그 신여성!"
"일반적으로 신여성이란 조선의 전통과 서양의 신 문명이 뒤섞인 혼란한 시기였던 개화기에 신식 교육을 받은 여성을 일컫던 말이야. 1898년 독립신문에는 관련한 사설도 실렸는데, 지금 시대의 여성들이 보면 탐탁지 않을 내용이긴 하지만 당시로서는 꽤 파격적인 내용이었다고 해야 할 거야."
"예를 들면?"
"간단하게 내용을 이야기하자면 이런 것이야."
‘소년들이 자라면 관료가 되고 학자가 되고 상인이 되고 농부가 된다. 소녀들이 자라면 이런 사람들의 아내가 된다. 만약 이 여성들이 그들의 남편과 같은 수준의 학문과 지식을 갖춘다면, 가정사는 순조롭게 풀릴 것이다. 게다가 그 여성들이 아이들을 낳으면, 이 아내들은 어떻게 아이들을 양육하고 교육해야 할 것인지를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여성의 역할을 남성의 역할보다 폄하해서는 안 된다. 국가의 미래를 이끌어가는 세대들을 양육하는 모든 책임은 여성에게 달려있는 것이다.’
“그 사설의 메시지는 여성을 교육하라는 것은 어머니로서, 아내로서의 역할, 그리고 후손을 생산하는 역할을 잘 수행하라는 것이구먼. 여성들 그 자체의 진보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여성이 교육을 받아야 남자들을 잘 보필할 수 있다고 선전을 한 것일 뿐이야.”
데이비드는 사설 내용이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
“개화기에는 많은 여성들이 실제로 이런 논리에 자극을 받고 주체적으로 신식 교육을 받았단 말이야. 이런 사설이 실린 것을 보면 신여성이니 여성의 교육이니 하는 것을 대단히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사회였다는 것을 짐작하고도 남지 않겠냐?"
"그런데 문제는 그런 사회적 분위기가 결국 일제 강점기가 되어서는 쇼트 커트 머리에 블라우스와 스커트, 구두를 신고 핸드백과 양산을 든 이미지가 신여성으로 굳어져서 한국 최초의 서양화가이자 문학가였던 나혜석이나 사의 찬미 (死의 讚美)를 부른 최초의 소프라노 윤심덕 같은 신여성이 오랫동안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하고 비올레타 같은 처지가 된 것일지도 모르지." 이안이 필립의 이야기에 꼬리를 달아 붙였다.
데이비드는 나혜석이니 윤심덕이니 하는 이름은 금시초문이었지만, 느낌은 알 수 있었다.
“그러니까 필립이 네 말을 정리 하자면 개화기에 남자들에 의해 만들어진 이상적인 신여성의 모습은 신사임당과 같은 여성이었는데, 실제로 신여성들은 신사임당과 같은 현모양처(賢母良妻) 모델 대신 하나의 사회적 인간으로서 자아(自我)를 찾는 힙(hip) 한 모델을 정립했다는 것 같은데, 맞아?”
"아마도 그렇다고 봐야 하지 않겠냐. 그리고 그런 맥락에서 당시의 기생을 빼고 이야기할 수는 없지. 말을 알아듣는 꽃이라는 의미로 해어화(解語花)라고 부르던 그런 기생들 말이야. 아무래도 여염집 처자들보다는 최소한 외모를 바꾸는 일도 조금 더 자유롭게 할 수 있었다는 것이지. 신여성, 모던걸 (Modern Girl), 모단걸 (毛斷 Girl)이라는 말이 유행했다는데, 긴 머리를 자르는 것이 가장 눈에 띄었던 모양이야.”
"그러니까 강향란이라는 이름이 생각나네. 강향란이라고 하는 한남 권번(卷番) 기생이 처음 단발을 했다고 하지. 강명화라고도 한다는데 나중에는 사회주의 운동가가 되었고 남장을 하고 남자들과 같은 학원을 다니며 남자처럼 살아보려는 의지를 보였다고 알려져 있어. 물론 사회적으로는 큰 파장이 있었던 듯 해."
이안은 언젠가 읽었던 일제 강점기 시대의 동아일보 기사에서 본 강향란의 사진과 기사 내용이 떠올랐다. 그 기사는 강향란이 자살을 시도하기까지의 일을 신파적으로 그려놓았지만, 반대로 그러한 역경을 통해 하나의 인간으로서 남자와 똑같이 살아갈 당당한 사람이니 남자에게 의존하고 남에게 동정을 구하는 일은 근본부터 잘못이라는 생각을 하며 중국 이발소에서 머리를 자르고 남장을 하기에 이르렀고 이 일은 당시 사회에 큰 파장을 일으키게 되었다는 것이다.
"남자와 같은 복장을 했다고? 쇼팽이 사랑한 여인 조르주 상드 같은 사람이었나 보군."
"데이비드 이 녀석은 뭔가 자꾸 이상하게 연결을 시키면서 이야기를 길게 만드는 재주가 있구먼. 그래도 생각해 보니 또 틀린 말은 아닌 것 같은데, 조르주 상드 역시 여성 작가로서 성공한 사람이었지만 남자 옷을 입고 다닌 탓에 당시 사람들로부터 문란한 여성이라는 오해를 받았지만 쇼팽에 대한 사랑은 더없이 컷고 사려 깊은 여성이었지. 시공간이 달라도 강향란의 삶과 또 일부 비슷하고 행위도 비슷해 보이는 것이 아무래도 여자들이 남자들보다는 불합리해 보이는 사회 구조에 민감하고 인간으로서는 더 뛰어난 공감 능력을 가진 것이 분명해."
"공감 능력 없는 사내들끼리 여성 담론은 이쯤 하고 밥 먹으러 가자.. 배고프네. 또 뭘 먹어야 하나..."
이안은 둘의 이야기가 길어지는 것을 막아야 한다는 책임감에 배가 고파졌다. 그래도 역사 발전과정에서 여성들의 역할, 특히 일제 강점기와 같은 사회적 혼란 시기에 여성들이 지켜낸 전통과 진보의 가치는 어떤 형태로든 재평가 되어야 할 것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