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화. 끝과 시작에 대한 기억

청계천 로망스

by 초부정수

아침에 해장을 한 때문인지 점심은 간단히 먹고 싶어진 데이비드는 미국에서도 잘 안 먹던 햄버거가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 미국에 갔을 때 먹었던 맥도널드 빅맥의 맛은 지금도 잊을 수 없을 정도로 좋았다. 하지만, 햄버거 외에도 더 기름지고 더 단 맛을 가진 먹거리가 많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한 끼에 두세 개씩 먹던 햄버거는 메뉴에서 사라져 버렸다. 그런데 한국에 오니 갑자기 맥도널드 빅맥을 먹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맥도널드 없냐 근처에?"


"있겠지. 맥도널드뿐만 아니라 미국에 있는 건 거의 다 있지. 그럼 간단히 햄버거나 먹을까"


"간단히 햄버거? 그게 그리 간단하지는 않지. 비싸고 사람도 많아서 줄도 서야 하고, 게다가 요새는 키오스크로 주문을 해야 해서 헷갈린다고..." 이안은 최근에 키오스크 주문 방식으로 바뀐 패스트푸드 점이나 커피숍에서 주문을 하는 것이 별로 즐겁지 않았다.


"그 정도 세상 변화에는 적응을 해야지. 안 그러면 밥도 못 사 먹는 늙은이 취급받는다. 모르면 유튜브로 공부를 해도 되고. 오늘은 내가 몸소 알려 줄 테니 자네가 돈을 내게.. ㅎㅎ"




필립 덕분에 수웚하게 맥도널드 매장에서의 주문 시험을 통과 한 이안은 데이비드와 필립을 덕수궁 돌담 길 옆의 서울시 서소문 청사 13층 카페로 안내했다. 카페에서는 덕수궁과 시청이 시원하게 내려다 보인다.


카페의 창문을 통해 보이는 덕수궁 전경


"점심 잘 얻어먹었으니, 커피는 내가 대접하겠네. 경치가 좋으니 커피맛도 더 좋을 게야! 커피 한 잔 하고 덕수궁도 한 번 둘러보자고."


데이비드는 창문을 통해 보이는 서울 시내의 역동적인 모습이 오히려 차분한 기분을 불러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곧게 뻗은 도로 하나를 사이에 두고 조선의 해체와 제국의 시작을 기억하고 있는 덕수궁과 식민지의 수도 경성부와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을 기억하는 시청이 100년의 시간을 공유하고 있다는 것이 새삼 특별하다.


"왜, 마음에 드는 전각이 없는겨?"

이안은 덕수궁에 가보자는 자신의 말에 데이비드의 대답대신 생각에 잠긴 모습이 새롭다.


“아이고 이안. 그런 말은 데이비드가 못 알아듣는다고. 마음에 드는 전각은 있겠지만 살 수는 있는겨?“


“니들 머다냐? 날 뭘로 보는겨? 이미 저 전각들은 내가 중학교 다닐 때 벌써 사부렀당께! 당시에는 손 편지로 외국 사람들과 펜팔이라는 걸 했잖여? 그때 내가 덕수궁에 와서 수건을 목에 걸고 집에서 세수하는 중이라고 사진 찍어서 보냈었단 말여.. ㅎㅎ”


“근데 니는 어째 사투리가 막 섞여부렀다냐? ㅎㅎㅎ”


"됐고.. 내가 잠깐 생각이 복잡해지는 바람에 대답을 못했나 봐. 일단 가보면 왜 생각이 복잡했는지 알 수 있을지도 모르지.."


이안과 필립은 데이비드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 것 같았다. 서울 한 복판에 있는 비교적 작은 규모의 궁궐인 덕수궁은 직장인들이 점심 식사 후 산책을 하며 업무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좋은 장소이지만, 덕수궁이 기억하고 있는 이야기들은 그리 행복한 것들이 아니다. 덕수궁은 임진전쟁으로 불타버린 경복궁을 대신하면서 행복할 수 없었던 왕들을 기억해야 했고, 조선이 해체되는 과정에서 결국 조선의 끝을 기억한다. 그리고 13년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존재했던 대한제국의 시작과 끝에 대한 기억도 가지게 되었다. 데이비드는 아마 은연중에 그런 덕수궁의 기억을 더듬어 보았을 것 만 같다.


"계절에 따라 그 매력이 달라지는 덕수궁과 그 주변에는 대개 애틋한 이야기들이 많이 이어져 왔고, 세기말 조선과 일본의 이야기는 무의식 중에도 한국 사람들 마음속에 각인되어 있으니 착잡할 수 있지. 하지만 또 덕수궁에서는 제국과 제국 사이에 끼어있던 조선이 아닌 황제가 존재했던 제국의 역사를 확인할 수도 있어."


"이안이는 꽤 덕수궁에 대해 잘 아는 모양이구만. 애틋한 이야기는 또 뭐야? 제국의 역사가 기록되어 있다는 것은 그럴 수 있다고 보는데 말이지"


"다들 잘 알잖아, 애인과 덕수궁 돌담길을 걸으면 이혼으로 귀결된다는 뭐 그런 것도 있고.. 자네들 어제 광통교도 갔었다며? 그럼 광통교 밑에 처박혀있는 태종 이방원의 계모 신덕왕후 강 씨 무덤을 장식하던 신장석도 보았을 것이고.. 원래 다들 알지만 덕수궁은 세조의 손자인 월산대군의 집이었는데. 그 이전에는 신덕왕후 강 씨의 릉(陵), 그러니까 무덤이 있던 곳이기도 해. 애틋하지 않냐?"


"내가 듣기로는 조선시대에 4대 문 안에는 왕족이라고 해도 무덤을 만들 수 없었다고 하던데?"


"맞아, 그런데 태조 이성계가 얼마나 신덕왕후를 생각했으면 그렇게 했겠어? 그러니 이방원이 더 그런 것이지. 말을 달리다가 목이 말라 우물가의 어떤 처자에게 물 한잔 달라하니 물 마시다 체할까 걱정하여 나뭇잎을 띄워 주었다는 이야기의 주인공들이 여럿인데, 태조 이성계와 신덕왕후 강 씨도 그중의 하나지. 그런 이야기가 전해진다는 것 자체가 두 사람 사이의 애틋함을 말해주는 것 아니겠나 싶은거지. 그런 무덤을 파헤쳐서 정릉으로 이장하고 청계천 똥물을 건너는 다리 공사에 자재로 썼다니 이 또한 얼마나 한스러운 일이냐?"


"이안이가 원래 그런 옛날이야기를 찾는데 꽤 재주가 있는 것 같더라. 애틋함을 스토리라고 치고, 그래 무슨 근거가 있다는 거야? 사실 다른 궁궐들에 비해 너무 작기고 해서 황궁이라고 하기에는 좀 애매해 보이기는 하거든."


“주위의 현대식 빌딩들이 궁을 둘러싸고 있어서 오히려 더 작은 느낌이 들 수 있을 거야. 하지만, 원래는 이것보다 훨씬 궁 역 (宮域)이 넓어서 지금 저기 서울 시청 자리까지가 모두 궁이었지. 중요한 것은 이야기했듯이 규모보다는 늘 조선이 위기에 처했을 때 등장했던 궁이기도 하고, 조선 최초 황제국의 궁전이기도 했던 특별한 곳이라는 것이지. 물론 그런 와중에 굳이 제국을 개국하고 황제에 올랐어야 했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다른 의견들도 많고 무능한 황제에 대한 비판도 많은데, 제국이 탄생한 바로 이곳이 가지고 있는 의미도 있는 것 같아. 궁 주변의 도로를 미국의 수도인 워싱턴 D.C. 를 벤치마킹 했다는 것도 조금 다른 시각으로 볼 수도 있을 것 같고..."


"일단 표 샀으니 수문장 교대식 보고 들어가서 찾아보자 이안이가 뭔 증거를 가지고 있는지.. ㅎㅎ"

이안이 말이 길어지자 필립은 역시나 알아서 진도를 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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