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화. 역사의 끝

청계천 로망스

by 초부정수

문 하나를 통과하자 도심의 번잡함이 꿈이었나 싶다. 공기마저 다른 것 같은 것은 단순히 산책을 나섰다는 기분 때문일지도 모르겠지만, 데이비드는 마치 나니아 연대기의 소년처럼 어쩐지 다른 세상으로 들어온 것 만 같아 조금은 들떠 있었다. 마침 들려온 필립의 말소리는 잠깐의 환상에서 깨어나기에 충분했다.


“아까 들어오면서 봤는데, 문의 현판에 적혀있는 대한문(大漢門)의 글자가 대한제국(大韓帝國)의 대한(大韓)이 아니더라고. 다른 궁들은 정문에 모두 화(化) 자가 들어가는데 그것과도 맞지 않고..."


"정문에 모두 화(化) 자가 들어간다고? 처음 들어보는 소리네.."


"필립 말대로 궁궐의 정문에는 모두 화(化) 자가 들어가 있어. 경복궁에는 광화문(光化門), 창덕궁에는 돈화문(敦化門), 어제 가 본 창경궁의 홍화문(弘化門), 경희궁에는 흥화문(興化門) 이 있는데, 우리가 들어온 저 대한문은 원래 덕수궁의 정문이 아니었어. 정문은 궁의 남쪽에 있었던 인화문(仁化門)인데, 지금은 없어지고 대한문이 정문 역할을 해."


"왜 없어진 거야?"


"뭐 역사의 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지 않나 싶네. 우리가 흔히 민비(閔妃)라고 알고 있는 명성황후가 일본인들에 의해 시해당하고, 고종이 러시아 공관으로 몸을 피했다가 일 년 후에 덕수궁으로, 그러니까 그때의 경운궁으로 돌아왔잖아. 그런데, 경운궁은 수백 년 동안 관리도 되지 않아 폐허와 같은 궁이었기 때문에 대대적인 리모델링을 해야 했지. 사실은 재건축에 가까웠을 거야. 그때 인화문도 만들어졌는데, 그 후에 정전인 중화전을 중건하면서 궁궐의 영역을 조금 넓혔나 봐, 그런데 스페이스가 작아서 허물었다고 하네. 그리고 중화전 앞에 중화문(中化門)이 세워져 있는데, 이것이 원래 인화문 자리인지는 잘 모르겠다. 참고로 명성황후라는 칭호는 대한제국 건국 이후니 시해를 당할 때는 고종 왕비라고 해야 할 거야."


도심의 현대 건물에 둘러싸인 중화문과 중화전


"그건 알겠고.. 나는 한자를 잘 몰라서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 되기는 하는데, 필립이 말대로 왜 대한문의 한자가 다르다고 하는 거지?"


"대한문(大漢門)의 글자가 대한제국(大韓帝國)의 대한(大韓)이 아니라는 것 말이지? 대한문의 원래 이름은 대안문(大安門)이었어. 1906년에 고종 황제의 명으로 이름을 바꿨다고 하더군. 그리고 대한(大漢)이라는 뜻은 큰 하늘을 의미한다고 하더라."


사진 : 서대문 형무소 역사관


대한문


"이름을 바꾼다는 것은 뭔가 의도가 있는 것인데?"


"고종이 왜 그렇게 명을 내렸는지는 모르지만, 미루어 짐작건대 당시 국제 정세가 영향을 주지 않았을까 해. 1905년에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한 후 조선과 일본이 을사조약이라는 것을 체결하게 되면서 조선은 외교권을 상실했고, 외교권을 잃었으니 외국에서 보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나라가 되어 버렸지. 그리고, 1907년에 고종이 이준, 이상설, 이위종을 헤이그에 특사로 파견하여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세계에 알리려는 계획을 세우던 중에 문의 이름을 바꾸지 않았나 싶네. 사실 문 이름이 글자 그대로 대안(大安)이니 아주 편안하다는 뜻인데 당시의 상황은 전혀 아니었잖아."


"그럴 수도 있겠네. 이준 열사가 자결할 때가 그 당시 일이었구나. 역사를 띄엄띄엄 알다 보니 잘 연결이 안 되기도 하고, 사실 그 시절에 벌어졌던 일들이 너무 많고 말도 어렵더라고."


데이비드의 투덜거림이 충분히 그럴 만하다는 생각이 드는 필립이다. 학생 시절에는 역사관 또는 세계관이나 인과 관계에 대한 이해를 하기도 전에 어떤 일에 대한 명칭과 발생 연도만 달달 외우기 바빴다. 게다가 국사 과목은 그리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았고 국영수에 대부분의 시간을 소비해야 했던, 지금에 와서는 후회가 되는 일 중의 하나다. 한 가지 남은 것이 있다면 아직도 구구단 외우듯이 외워지는 잘 알 수 없는 일들의 명칭과 발생 연도에 대한 기억이다.



왼쪽부터 이준, 이상설, 이위종


"나도 다르지 않아. 게다가 어떤 것은 또 잘못된 내용을 배우기도 했지. 이준 열사의 일만 해도 그렇지.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 고종황제의 특사로 파견되어 을사조약(乙巳條約)이 일본의 불법적인 한반도 합병 시도라는 입장을 전달하고 열강의 도움을 받으려고 했지만 실패했지. 그것이 분하여 할복자살을 했다고 배웠잖아. 그런데 아니더라고."


"아니라고? 뭐가 아니라는 거여?"


"일단, 회의가 시작할 때까지 도착도 못했고, 일본에 의해서 회의장에는 들어가 보지도 못하고 쫓겨났단 말이야. 그리고 감기로 돌아가셨지. 그런데도 학생들에게 할복했다고 가르친 것은 다분히 어떤 필요에 의한 의도적인 왜곡이었던 같어. 감기라는 것이 할복보다는 극적이지는 않지만 정작 그것이 중요한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해. 중요한 것은 목적을 가지고 네덜란드 헤이그까지 갔다는 것이지. 게다가 이건 내 생각이긴 하지만 감기라는 것이 그저 단순한 감기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는 거야. 그리고 일본의 감시를 피해 조선에서 네덜란드까지 그 먼 길을 떠난다는 것 자체도 위험한 일이니 목숨을 걸었다고 봐야지 않겠나?"


"단순한 감기가 아니라면?"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이의 전쟁이 계속되는 불행한 시대이기는 하지만, 일반적으로 지금은 전쟁이나 테러로 인한 사망보다 자살에 의한 사망자 수가 더 많아졌고 기아로 인한 사망보다는 과잉 영양으로 인한 비만과 당뇨병으로 사망하는 수가 더 많아졌다고 하잖아? 그렇지만 20세기 초까지만 해도 사람들은 전쟁과 기아, 그리고 전염병으로 목숨을 잃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는 것이야."


"그럼 네 말은 이준 열사가 전염병으로 목숨을 잃었다는 뜻이야?"


"부검을 하지는 않았으니 확실하게 알 수는 없지만, 너희들도 알듯이 흑사병으로 인해 유럽 인구의 1/3이 사망했고, 1918년에는 스페인 감기로 인해 최소 5천만 명에서 최대 1억 명이 사망을 했잖아. 하면 이준 열사의 상황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해 본 말이다. 사실 알 수 없었을 뿐이지 스페인 감기 이전에 분명 어떤 전조 증상이 있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싶은 것이지.”


"합리적인 망상이긴 하네."


"단순 망상이 아닐지도 모르지. 미국의 어느 대학 연구 결과에 따르면 1880년부터 1900년 사이에 태어난 사람들이 조류독감의 일종인 스페인 독감 바이러스에 대한 면역력이 없었다고 하던데.”


1918년 Spanish Flu Pandemic


"필립이 이야기하듯이 전염병이건 할복이건 헤이그에 밀사로 파견되었던 분들은 결국 목적 달성을 못했지. 사실 외교권이 없던 조선이 실행하기에는 어려운 계획이기도 했고, 이 일의 결과는 일본에 의한 고종의 폐위와 순종의 황제 즉위로 이어지면서 비로소 덕수궁이라는 이름이 생겼단 말이야."


"그렇다면 덕수궁이라는 이름은 대한제국 건국 시에는 없었다는 뜻인가?"


"순종이 폐위된 아버지 고종을 경운궁에 두고 자신은 일본에 의해 창덕궁으로 유폐되어 가던 때 고종에게 오래 사시라는 의미로 덕수(德壽)라는 휘호를 올렸단 말이야. 고종의 근황이 궁금하면 '자금 덕수궁은 어떠하신 가?'라고 물었다 하여 궁 이름이 자연스럽게 바뀌었다고 하네. 만약 고종이 일본에 의해 폐위되지 않고 순종이 대한제국의 2대 황제로 즉위하지 않았으면 우리는 아마 아직도 덕수궁을 경운궁이라 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더 높지."


친구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데이비드는 고종을 그저 무능하기만 했던 왕으로만 알고 있었던 것 또한 그저 그렇게 배웠기 때문이 아닌가 싶었다. 한 사람이나 한 시대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것을 이해하는 것이 불가능한 일이라면 역사를 가르치는 사람이 누구이어야 하는가 하는 문제보다는 자신과 같이 배우는 사람들이 어떻게 이해하려고 하는지가 더 중요하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고종이 제국을 세우고 황제에 오른 이유를 어렴풋이나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네. 다만, 대한제국이 실제로는 고종의 폐위와 함께 이미 사라진 것과 마찬가지인 것 같어. 그렇다면 덕수궁은 결국 조선 왕조 역사의 끝을 상징하는 궁궐이라는 말인데.."


"역사에 끝이라는 것이 있겠나? 예전에 소련이 붕괴되었을 때 미국의 정치경제학자인 Francis Fukuyama가 ‘End of History and the Last Man’이라는 책을 통해 소련 공산주의가 무너지자 인류의 최종적인 정부 형태가 자유 민주주의라고 선언했고, 미국을 비롯한 서구 세계는 민주주의와 자본주의가 최종적인 승리를 한 것이 역사의 끝이라며 감격하기도 했지만 그저 소련이라는 나라가 없어진 것일 뿐이야."


"그렇게 보면 또 그렇군, 끝은 고사하고 중국과 미국의 갈등은 구 소련과의 갈등과는 조금 다른 차원이기는 하지만 같은 이데올로기의 연장선 상에 놓인 문제이기도 하고 그에 따라 매일 새로운 역사가 만들어지고 있잖아. 북한의 핵 문제도 그렇고.. WTO 체제의 자본주의도 이전 세계의 체제로 되돌려 놓으려는 미국 대통령 때문에 갈등의 역사가 새로 쓰이고 있고... 어떤 일의 역사적 결과는 결국 국가의 형태나 이념이 무엇인가 하는 것보다 그 안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생각과 행동이 중요하다는 뜻도 되지.".


데이비드는 다시 덕수궁이라는 이름에 생각이 미쳤다. 대한제국의 끝, 아니 조선 왕조의 끝과 함께 탄생한 덕수궁이 이제는 대한민국 수도 서울을 대표하는 중요한 상징들의 하나로 재 탄생하여 지난 시간들이 간직한 불행과 슬픔을 모두 덜어내고 있다. 이것은 지난 과거를 알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그래 이제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볼 이유가 생긴 것 같다. 저 대한문을 지나올 때는 산보를 나온 듯 가벼운 발걸음이었는데, 산책 시간이 조금 더 늘어날 것 같네. 더 안으로 들어가 보자고. 너희들에게 물어볼 것이 많을 것 같어. "


"챗지피티에 물어보는 게 빠를 건데.."


"내가 이해하기로는 말이지, 챗지피티가 망상에는 큰 소질이 없는 것 같더라구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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