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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화 부엌에서

홀리몰리 인도델리

by 초부정수

폭포소리가 나는 것 같다. 니뚜가 설거지를 하는 중이다. 옥상의 물탱크에 저장되어 있는 물이 싱크대의 수도꼭지를 통과하는 모습이 마치 비 온 뒤 청계산 계곡을 흐르는 물과 같다.


"니뚜야! 유 베터 투 세이브 더 워터해야지~"


니뚜와 이야기를 할 때면 인도식 악센트의 영어와 한국어가 반반 섞여서 말이 튀어 나가는데, 신통하게도 서로 이해하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다.


"노 써어, 인디아 빠니 바리바리 해~ 노 쁘라블럼 써어~~"


니뚜는 언젠가부터 우리가 힌디어 단어 한 두 개를 알아듣는다 생각하는지 이상한 영어와 힌디를 섞어서 말을 하는데, 이 또한 이해하는데 별 문제는 없다. 니뚜가 한 말은 인도는 물이 너무너무 많아서 막 써도 좋으니 걱정 말라는 뜻이다.


사실 물 부족이라고 하면 그 원인이 여러 가지인데, 최근에는 기후변화와 관련된 거창한 담론으로 접하기 쉽다. 이 또한 중요한 문제임에는 틀림없지만 이러한 자연환경의 변화에 따른 물 부족은 서서히 진행되는 것이어서 단기간에는 별다른 변화를 느끼기 어렵다. 게다가 기후변화에 대한 논의가 그리 잘 알려지지도 않았던 1970년대 초중반의 서울에서 나는 심각한 물 부족을 종종 경험했었다. 수돗물이 며칠 동안 나오지 않으면 물탱크를 실은 트럭이 동네에 들어와 물은 나눠주었다. 우리는 손에 물 통을 하나씩 들고 길게 줄을 서서 물은 받던 기억이 생생하다. 하지만, 당시의 물 부족은 지구 온난화에 의한 것이라기보다는 도시의 상수도관이나 정수시설 등 도시 인프라 부족에 따른 것이었다. 지금 한국의 모습과는 많이 다르지만 불과 몇 십 년 전 이야기에 불과하다는 것을 자랑스러워해야 하는지 안타까워해야 하는지 조금은 헷갈린다. 물론 이미 일어난 일에 대해 만약을 붙이는 것이 아무런 의미도 없지만, 그래도 만약 과거 우리의 질곡의 역사가 없었다면이라는 생각이 들기는 한다. 그런 의미에서 니뚜는 나와 같은 경험이 없으니 오히려 나보다 문명인이라 해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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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서울. 수도 시설을 가진 집에가서 물을 사오기도 하고 물차에서 받기도 했다. 당시에는 몰랐던 촌스러움이 새삼스럽다


인도나 네팔은 모두 심각한 물 부족 국가이지만, 니뚜는 앞으로도 한 동안 물이 부족하다는 말을 이해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절대적인 부족을 느끼게 되면 이미 회복하기 어려운 심각한 환경이라는 것인데, 델리에서의 생활은 새벽 서 너 시에 집 옥상에 놓여있는 물탱크에 물을 채우기 위해 양수기를 돌려야 하는 조금의 불편함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신도시와 같이 도시를 관통하는 상수도관에서 각각의 집으로 수도관도 더 많이 연결될 것이니 어쩌면 새벽에 일어나 양수기 스위치를 올리지 않아도 될지 모른다. 지금 대한민국의 기준으로는 인도의 인프라 상황이 그리 탐탁해 보이지는 않지만, 이 정도의 풍요와 이 정도의 자유만 있어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사람들도 생각 외로 상당히 많다.




인도나 중동 - 사실 중동이라는 말은 조금 이상한데, 유럽의 기준에서는 위치상 중동이라 할 수 있지만 우리를 기준으로 하면 극서라고 해야 하며, 오히려 아랍 문화권이라고 하는 것이 옳다 - 문화에서 물은 생명을 상징하는 것으로 사업상 미팅을 하러 가도 물 먼저 내오는 것이 우리와는 조금 다르게 느껴진다. 그리고 인도에서는 갠지스강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우리에게는 갠지스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진 이 강의 진짜 이름은 '강가'인데, 영국인들이 말하기 쉽게 영어 화한 이름으로 알려진 탓이다. 강가_Ganga는 대략 2,525Km에 달하여 길이로는 한강의 약 5배 정도 된다. 정화(淨化)와 용서(容恕)로 대표되는 힌두교 여신에 해당하여 강가에서 목욕을 하면 살아오면서 지은 죄가 모두 씻긴다 생각한다, 인도인에게 강가는 어머니와 같다.


우리가 가진 강가에 대한 이미지는 인도의 성스러운 강이라고 하지만 더럽다는 것이 아닐까 싶다. 그 더러운 물에서 인도인들이 목욕을 하고 물을 마시는 모습을 보면서 그래도 괜찮을까 싶은 걱정이 앞선다. 강변으로는 수많은 사람과 동물들이 오가고, 강둑에서 강의 수면으로 이어지는 가트_Ghat라고 부르는 계단 같은 구조물 위에서 사망한 사람들을 화장(火葬)하는 모습도 떠오른다. 이런 풍경은 아마 인도가 아니면 볼 수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우리의 한강은 한강의 기적이라는 말로 잘 알려져 있지만, 내가 기억하는 한 1970년대의 한강 역시 굉장히 오염이 심했었다. 간혹 한강에서 낚시에 걸려 올라온 가물치는 기름 냄새가 심해 먹을 수 없었고 기형인 경우도 많았으며, 겨울에는 아무리 날씨가 추워도 오염된 강물은 거품만 생길 뿐 얼지 않았고 악취도 풍겼다. 오염이 되었다는 것은 한강이나 강가나 마찬가지이나, 한강의 오염은 빠른 공업화로 인한 공장 폐수가 주원인이었던 반면 강가의 오염은 공업화와는 별로 관계가 없다.


'강가' 주변에는 공장은 없지만, 대신 사두_Sadhu라고 하는 힌두교와 자이나교의 수행자들의 수행 모습을 볼 수 있다. 그 모습을 신기해하는 관광객들은 사진을 찍거나 수행자들에게 말을 걸어보기도 한다. 시체를 화장하면서 장작이 내뱉는 연기와 익숙하지 않은 냄새가 온몸을 감싸오고 눈앞에 넓은 강이 흐르는 모습을 목격하는 그 순간만큼은 이승과 저승, 천국과 지옥이라는 것이 실재하는 것이라 믿게 된다. 그런데, 조금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돌아보면 잠깐 동안의 성스러움은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에 쓸려나간다. 가난한 죽음에는 가난한 장작만이 허락되고, 부유한 죽음에는 부유한 장작이 허락되어 저 품질의 장작조차 충분치 않은 죽음은 제대로 재가 되지 못하고 강 물속으로 버려진다. 특히 발 뒤꿈치는 여간 해서 잘 타지 않는 모양이다. 이렇게 세상의 모든 오염물질과 쓰레기를 품은 강가일지라도 인도인들에게는 그 무엇보다 성스러운 존재이며 평생 강가의 물 한 모금을 마시기 위해 수 백 킬로미터를 두 다리로 걸어 왕복하는 것을 마다치 않으니 나와 같은 이방인들로서는 강가의 가치를 이해할 수 없다.


쉬바 신을 숭배하는 델리등 북인도 지역 사람들은 매년 7~8월 수백 Km를 걸어 강가의 물을 병에 넣어 어깨에 짊어지고 돌아온다. 이들을 칸와리아(kanwariya라고 부른다


그런데, 이제 그 성스러운 강이 자연의 섭리로서는 더 이상 회복하기 어려운 수준으로 더럽혀졌고, 이것은 매우 오랫동안 인도 정치의 중요한 화두(話頭)가 되어왔다. 국책사업 프로젝트를 통해 많은 STP(Sewage Treatment Plant), 즉 오수 처리 시설을 만들어 강의 오염을 막고자 했다. 나라에 돈은 많지만 쓸 곳도 너무 많은 인도 정부는 이런 사업을 외국 사업자들과의 민관합작투자사업을 통해 추진하기도 했다. 민관합작투자사업은 PPP_Public Private Partnership라고 하여 인도 정부와 사업자가 함께 투자를 하여 시설을 설치하고 일정 기간 동안 그 시설을 통해 발생된 수익을 나누어 가지는 구조의 사업이다. 인도에서 이 일은 설비 제작을 하는 일본의 중소기업들이 일본 정부의 차관 지원을 통해 꽤 많이 수행을 해왔다. 하지만, 수익은 조금 다른 이야기다.


우선 전력이 충분치 않은 인도는 제대로 된 시설이 있어도 운영을 하기 어렵다. 또한, 사업에 참여한 인도 기업들 중에는 인도 국회의원 등 권력과 의사결정 권한을 가진 정부 측 인사들에게 뇌물을 주고 대충 설비를 공급하기도 했다. 어떤 경우가 되더라도 시설은 운영되지 않으며 오염수는 처리되지 않은 채 그대로 강으로 흘러 들어가기 마련이다. 강을 깨끗하게 유지해야 하는 이유는 성스러움을 보전해야 한다는 목적도 있지만 오염된 강물로 인한 온갖 질병과 사망 등으로 인한 사회적 비용이 엄청나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렇듯 대규모의 강 개발 사업은 굉장히 복잡한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역학이 뒤섞여있어 시작이 쉽지 않다. 간단하게는 강 주변으로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동물들의 통제도 해야 한다. 각 가정마다 정화조가 제대로 갖추어진 화장실을 만들어야 하며 나라 전체를 포괄한 상하수도 체계도 정비해야 그나마 조금 가능한 일이다. 인도에는 아직도 아침에 들판에서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옹기종기 모여 큰 볼일을 보는 모습을 볼 수 있으며, 화장실이 갖춰져 있지 않은 집들도 많다. 상하수도 시설도 충분하지 못해 일부 대도시가 아닌 곳에서는 아직도 우물을 파서 식수로도 쓰고 농사에도 이용한다. 문제는 이런 우물조차 말라가고 있으며 지하수 또한 오염이 심해졌다. 기후 온난화는 히말라야의 눈을 녹이고 있어 강가도 언젠가는 메말라 버릴지도 모른다. 온난화로 강이 말라버리는 것이 빠를지 심한 오염으로 자연이 죽는 것이 더 빠를지 알 수 없지만, 결론은 결국 이대로라면 강가는 사라질 것이 분명하다.


강가가 사라졌다는 것은 결국 우리도 살 수 없는 환경이 되었다는 것이다. 1962년에 미국인 레이첼 카슨 여사는 그의 책 <침묵의 봄_Silent Spring>에서 이런 글을 남겼다.(침묵의 봄, 레이첼 카슨 지음. 김은령 옮김, 홍욱희 감수, 에코리브르)



지구 생명의 역사는 생명체와 그 환경의 상호작용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넓은 의미로, 지구에 서식하는 동식물의 물리적 형태와 특성은 환경에 의해 규정된다. 지구 탄생 이후 전체적인 시간을 고려할 때 그 반대 영향, 즉 생물이 주변 환경에 미치는 영향은 상대적으로 미미했다. 20세기에 들어와 오직 하나의 생물종(種), 즉 인간만이 자신이 속한 세계의 본성을 변화시킬 수 있는 놀라운 위력을 획득했다...

자연에 닥친 위험을 인식하는 사람은 극소수다. 전문가의 시대라고 하지만 각자 제 분야에서만 위험을 인식할 뿐, 그 문제들이 모두 적용되는 훨씬 더 광범위한 상황은 인식하지 못하거나 무시한다. 공업화 시대라서 그러지 어떤 대가를 치르든 이윤을 올리기만 하면 별다른 제재가 가해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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