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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화.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홀리몰리 인도델리

by 초부정수

"어떤 인생 항로를 걷게 되든, 우리는 그것을 하나님이 주신 최고의 선물로 받아들여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무엇이든 해주시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을 힘 또한 지니고 계신다. 사실 불행이 닥치면 단순히 이를 감사할 게 아니라, 신의 섭리에 대한 한없는 감사로 받아들여야 한다. 오히려 불행 덕분에 세속적인 것들에 대한 지나친 집착에서 벗어나, 천상의 성스러움을 향해 정신을 고양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라고 그의 딸에게 보내는 편지에 썼다. (갈릴레오의 딸, 데이바 소벨 지음 / 홍현숙 옮김, 생각의 나무)



언제나처럼 핸드폰을 통해 들려오는 미스터 띠와리의 목소리는 작고 낮았다. 그는 내 앞에서 딱 한 번 화를 낸 적이 있는데, 그때를 제외하면 그의 말투는 언제나 단호하지만 그 단호함이 어떤 감정에서 비롯된 것인지를 알기는 어려웠다.


"문제가 좀 생긴 것 같은데, 혹시 그쪽에서 한국 대사를 만날 수 있는지 궁금하네만.."


살다 보면 그때는 생각지도 못했지만 지나고 나면 그때의 그 일이 나머지 인생의 방향을 결정하는 씨앗이었다는 것을 알게 될 때가 있다. 그것이 불행의 씨앗이건 행복의 씨앗이건 중요한 것은 아니다. 그저 그렇다는 것이다.


"협의할 안건에 무엇인지가 중요하겠지요? 대사와의 만남이 중요한 것은 아니니까."


띠와리가 전화를 했을 때 직감적으로 우리 프로젝트에 문제가 생겼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델리 경찰청의 지능형 교통시스템 (ITMS_Intelligent Traffic Management System) 국제 입찰 사업에 띠와리가 주인인 인도 회사와 컨소시엄을 구성하여 참가한 것이 인연의 시작이었다. 인도 사업은 시작부터 결론까지의 시간이 상상외로 오래 걸리는 경우가 많아 제풀에 지쳐 먼저 포기하는 경우도 많지만, 우리는 결국 몇 년 동안 지연되던 입찰에 성공적으로 참여할 수 있었다. 그리고 우리의 제안서는 기술평가와 가격평가에서 모두 최고점을 받아놓은 상태였다. 당연히 다음 순서는 계약을 체결하고 선수금을 받기 위해 보증보험 증권 같은 것들을 준비하는 일이 일어나야 헸지만, 또 너무 조용하게 두서너 달이 지나고 있었다.


외국인들은 인도 기준시간이라는 뜻인 IST (Indian Standard Time)이라는 단어를 Indian Stretchable Time, 즉 인도의 마음대로 늘릴 수 있는 시간이라는 의미로 이해하는 편이어서 한 두 달의 지연은 지연이라고 하기에 조금 애매하다. 더구나 프로젝트 규모가 그 사절 인도 정부 사업으로서는 상당히 큰 약 600크로(Crore)로 당시 환율로 환산하면 대략 1,200억 원 정도였기 때문에 복잡한 인도 정부의 절차와 환경을 감안하면 한 두 달쯤의 시간 지연을 이해하는 것이 그리 비합리적인 일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확한 이유를 확인하고자 이런저런 시도를 하던 중에 띠와리의 전화를 받는 것이 반갑지만은 않았던 이유다. 그것도 주말에...


"독일 대사가 내부부 차관인 RKS를 찾아가서 한국의 듣지도 보지도 못한 회사에게 인도 정부가 추진하는 가장 중요한 프로젝트를 준다는 것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라고 노발대발했다는군.."


"그래서 한국 대사에게 RKS를 만나 우리가 소위 듣보잡은 아니라는 것을 이야기해 달라고 요청하란 말인지? 한국 대사가 뭐가 아쉬어서 내무부의 차관급을 만나야 하나? 더구나 그 작자는 '에고 프로블럼(Ego-Problem)'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고 하던데..."


Ego problem이란 사람이 자신의 자존심, 자아, 또는 자아의식을 과하게 의식하거나, 타인과의 관계에서 자신의 자아를 지나치게 중요하게 여겨 갈등을 일으키는 문제를 의미하는데, 생각 외로 인도에는 이런 사람들이 꽤 많다. 특히 RKS는 IAS(The Indian Administrative Service)로서 인도 정부의 정예 공무원 조직에 속한다. IAS 공무원들은 중앙 정부, 주 정부 및 기타 기관에서 근무하는데, 인도에서 가장 권위 있고 명망 높은 직업 중 하나로 여겨진다. IAS가 되기 위해서는 한국의 고시 같은 공무원 시험을 통과해야 하고 출신 지역과 성적에 따라 근무지가 배정되어 대부분의 경력을 그 지역에서 보내게 되며, 선발연도에 따라 서로 연대감도 가지고 있어서 이들의 에고 프로블럼은 유별나다. 이런 부분은 우리나라의 사법고시 출신들이 많이 보여준 것 같아 오히려 이해하기는 쉬운 편이다.


RKS의 에고 프로블럼은 인도 사람들도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게 하는 수준이라고 알려져 있었다. 그의 직함은 Home Secretray로서 인도 내무부의 서열 2위에 해당한다. 장관 아래에 차관이다, 사실 실무 담당은 RKS 아래의 내무부 서열 3위 Joint Secretary of Home Affairs인 KKP인데, 그 역시 차관과 똑같은 IAS이자 에고 프로블럼을 가진 사람이라고 알려져 있었다. KKP는 인도 내무부에서 나라의 안전 및 보안 부분을 담당하는 실무자로서 평가가 끝난 우리의 제안서가 어떤 이유인지 그의 사무실 캐비닛 안에 보관되어 있었기 때문에 RKS보다는 KKP의 동정에 더 주목하고 있던 참이다. 그리고 그 캐비닛에서 다시 나오지 않고 있던 그즈음에 독일 대사가 차관인 RKS를 찾아간 모양이다. 조금 모양은 빠지지만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대사님 일정이 가능하면 KKP가 아니라 치담바람을 만나서 말씀 나눌 수 있게 하려고 하는데, 가능한지?"


침담바람... 그는 당시 국민당 정부에서 서열 2위의 거물 정치인이자 내부부 장관이었다. 그를 만나는 것은 인도의 수상을 만나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이기도 하지만, 외국의 대사가 인도 정부의 외무부 장관도 아닌 내무부 장관을 만나야 할 일은 거의 없다.


"그게 가능해? 그보다 먼저, 독일의 S사는 입찰 참여도 포기했는데 왜 이제 와서 그런다는 것이지?"


독일의 S사는 우리보다 몇 년 먼저 이 사업을 개발하기 시작한 선구적이 기업이고 세계적으로 몇 안 되는 지능형 교통시스템의 원천 기술도 가지고 있는 회사였지만, 한국 또한 기술은 물론이고 사업 수행 경험도 풍부했기 때문에 충분히 경쟁을 해 볼만했다. 게다가 인도의 델리와 같은 도시의 도로는 오랜 역사를 가진 서울과 더 비슷하여 반듯하기만 한 미국이나 독일과도 좀 달라 교통관리 알고리즘도 다를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도 우리가 확인한 것에 의하면 독일 기업의 경우에는 레이더 시스템과 같이 당시로는 너무 고급 기술의 장비를 동원한 시스템이어서 가격이 만만치 않을 것으로 판단했다. 모든 것이 공평하고 정의로운 환경일 경우 더 적은 투자로 더 나은 효과를 얻을 수 있다면 당연히 한국을 선택하는 것이 올은 일이다.


우리는 인도의 입찰 주관사이자 국영 기업인 RITES에 한국의 시스템에 대해 설명하고 설득하는 작업부터 진행했는데, 인도는 아시아 국가이긴 하지만 오랜 기간 영국의 영향을 받은 탓인지 상당히 유럽지향적인 정서가 강했다. 게다가 인도 정부의 의사결정 구조는 오래전 영국의 그것을 거의 그대로 유지하고 있어 유럽인들은 인도 정부가 어떤 식으로 일을 할 것이라는 것을 우리보다 훨씬 잘 알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지금 생각하면 유럽 사람들에게 조금 미안하지만, 긴 역사를 가지고는 있지만 미래가 없는 유럽을 기대하지 말고 이제는 동쪽, 특히 한국을 쳐다봐야 할 시대라는 말을 만나는 사람들에게 늘 하고 다녔다. 인도인들이 워낙 한국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던 탓이다. 인도 우체국에서 한국으로 소포를 보내려고 할 때 정보를 적어야 하는 서류에 대한민국은 없고 북한만 체크할 수 있었을 정도로 한국에 대한 인식은 부족했다. 불과 십여 년 전의 일이다. 그들을 만나러 갈 때면 김정호가 만든 한양 지도인 수선전도를 아크릴판에 인쇄하여 장식품으로 만들어 나누어 주기도 했다. 델리와 서울 모두 수 백 년의 역사를 간직한 도시로 길의 모습 또한 비슷한 구석이 많아 한국의 시스템이 더 잘 맞을 것이라는 점을 부각하고 문화적 공감대 같은 것을 만들어 보면 좋을 것 같았다. 생각해 보면 유치 찬란한 일이었지만 달리 할 수 있는 일도 많지 않았다. 지금은 좀 환경이 달라졌지만 당시에는 인도가 한국을 모르듯 한국도 인도를 잘 몰랐기 때문에 인도에서 그런 큰 사업을 진행하겠다는 계획을 한국의 본사 경영층에서도 탐탁지 않게 생각하던 시절이다. 다만, 당시 인도의 자재와 인쇄 기술은 좋지 않아 생각과 같이 예쁜 작품을 만들 수는 없었다.


수선전도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알 수 없지만, 최종 입찰에서 독일의 S 사는 참여를 하지 않았다. 꽤 오래 투자를 해해온 회사가 입찰 포기를 한 이유를 알 수 없었지만 어딘가 믿는 구석이 있었던 모양이다. 결국 입찰에는 영국 회사와 우리만 참가를 하게 되었다. 물론 델리 경찰서의 제안요청서 (RFP_Requezst For Proposal)에는 우리의 시스템에 적합한 조건들이 많이 포함되었다. 그리고 3년 간 공들인 노력에 대한 보상으로 입찰서 평가에서 가장 좋은 점수를 받은 것인데, 갑자기 독일 대사가 나타나 훼방을 놓으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그야말로 황당한 일이 아닐 수 없었지만, 미리 계획되었던 일인지도 모른다. 당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말이었지만, 대사관의 박 상무관에게 전화를 해서 상활 설명을 하고, 대사님을 좀 만나게 해 달라는 요청을 드렸다. 그리고 며칠 후 대사관을 방문하여 대사님을 만났다...


그리고 일은 또 다른 방향으로 번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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