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화, 희성수만세와 중국산 등긁개의 시대

청계천 로망스

by 초부정수

필립의 '경성 3C' 플롯은 구체적인 역사적 검증이나 일말의 문헌적 근거도 찾아볼 수 없는 상상에 의한 스토리에 불과하지만, 그것이 상상에 의한 것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한 번쯤 과거를 돌아보는 것도 재미있는 일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데이비드의 마음에 와닿았다. 사람들이 모두 같은 생각을 한다는 것은 가능하지도 않지만 재미없는 세상이 되기에 딱 알맞은 조건이다. 못 챙겨 먹어도 몇 가지 반찬이 함께 있어야 밥 좀 먹었나 싶은 한국인들에게 하나의 통일된 생각이란 애초부터 가능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문제는 그와 같은 다름이 있다는 것을 인정할 수 있는 환경의 사회인지 아닌지에서 비롯될 뿐이다. 다름을 인정하지 못한다면 다름에 대한 무관심이 함께 사는 사회의 평화와 질서를 유지하는데 도움이 되기도 한다는 역설적인 진실을 오랜 미국 생활을 통해 깨우쳤다. 미국은 화려하지만 먹고 싶지 않은 재료도 섞여있는 샐러드 접시와 같아서 서로 다른 문화와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같은 여권을 가지고 살고 있어 지금과 같은 정도의 사회 갈등이 아닌 훨씬 더 심각한 갈등이 있어도 이상하지 않을 테지만, 그렇지 않은 이유는 단 두 가지였다. 강력한 법의 집행과 서로 다름에 대한 이해보다는 무관심...




"듣고 보니 역사라는 것이 지난 일을 확인하는 것이라기보다는 변화에 대한 것을 생각해 보는 데 더 큰 의미가 있는 것 같네. 그렇다고 해도 가능하면 정확한 물증이나 증거가 있을 경우 더 좋은 상상을 할 수 있을 것 아닌가?"


"당연한 말을 뭐 그리 어렵게 한디니?"

필립은 자신이 들려준 이야기에 데이비드의 신중한 반응이 못내 민망하여 내뱉듯 퉁명스럽게 이죽거린다.


"증거라기보다는 덕수궁에 왔으니 하는 말이야. 여기 정관헌도 멋지고 다 좋은데, 난 아직도 이 작은 궁에서 제국을 시작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아. 경복궁이 싫으면 더 멋진 창덕궁도 있는데... 이렇게 소박한 덕수궁이 어디를 봐서 황제가 있던 궁이라고 할 수 있겠어?"


"사실 나도 데이비드와 같은 생각이긴 해. 궁이 유명한 사찰 보다도 작은 것 같거든. 양주에 가면 조선 왕의 사찰이라고 불리는 회암사가 있던 회암사지가 있는데, 그 절의 규모도 여기 덕수궁과 비교할 바가 못될 정도로 크다고. 발굴을 잘해놓았는데 사람들이 잘 찾지 않아 오히려 좋더라. 이집트 기자에 피라미드에서 오페라 아이다 공연을 하는 것을 보면서 우리도 회암사지에서 명성황후 같은 뮤지컬이나 서울시향의 연주회 같은 것을 하면 훌륭하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아주 멋진 곳이지. 규모나 발굴된 유적을 보면 누구나 왕과 관련된 곳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을 거야. 그러니 덕수궁이 제국을 세운 황제가 있던 궁이라고 하기에는 그 규모가 모자라 보이지."


양주 회암사지 박물관 앞 잔디밭
화암사지. 멀리 보물 2130호 사리탑(舍利塔)이 보인다


"덕수궁에도 그런 게 있다고. 작아도 황제의 흔적이 남아있어. 따라와 보시지 들.. 중화전으로 가보자고."




고층 건물을 배경으로 자리하고 있는 덕수궁의 정전인 중화전


중화전은 경복궁의 정전이 근정전에 비해 규모가 작았다. 아무래도 황궁이라고 하기에는 모자라 보이는 것은 사실이다.


"중화전이 원래 2층 건물이었는데 1904년에 큰 화재로 전소(全燒)되어 1906년에 새로 복원을 할 때 단층 건물로 만들었어. 물론 황실 재정이 궁핍했던 이유도 있고.


1904년경 화재로 소실되기 전 중화전의 모습


"화재가 있었구나. 단층으로 복원을 한 것이 아쉽기는 해도 이렇게 유지 보수를 오랫동안 해 온 것이 중요한 일이지. 중화전이 가지고 있는 의미와 가치가 반드시 원래 모습에만 남아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니까. 오히려 이런 모습으로 남게 될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이 당시의 세상을 거울과 같이 비춰주기도 하니 말이야."


"데이비드의 말에도 일리가 있구만. 남대문도 화재로 불이 나서 복원했는데, 그런 사실을 잘 아는 것이 오히려 중요하지. 그런데, 중화전을 보고 황궁의 증거라고 하는 것은 아니겠지?'


"중화전 앞에 몇 가지 증거가 있으니 잘 찾아봐라. 특히 그림과 글씨를 잘 둘러들 보세요."


"혹시 뭐 답도에 새겨진 용 무늬 그런 것을 말하는 거면 바로 여기 있지. 하지만 나는 그것으로는 조금 모자라다고 봐. 용 그림이나 조각은 다 상징적인 것이라서 그 뜻이 명확한 것도 아니고 이무기하고 구별이 되는가?"


"답도라는 게 뭐야?"


"여기 양 쪽의 돌계단 사이에 있는 특이하게 생긴 계단을 답도라고 하는데, 사실 이걸 어떻게 사용하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임금이 가마를 타고 올랐다고 하네. 솔직히 그냥 좀 걸어도 될 것 같은데 굳이 이런 것을 만들어서 가마를 타고 다녔다고 하네."


중화전 답도. 용이 그려져 있다

"자세히 보니 용 무늬가 있긴 하구나."

데이비드가 답도를 살펴보면서 중얼거린다.


'다른 궁들의 답도에는 없다고 하고, 조선은 중국의 제후국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에 용 대신 봉황문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고 하니 그런가 싶기는 한데, 그것이 꼭 황제의 상징이라고만 할 수 있나 싶다는 거야."


경복궁 근정전 답도의 무늬는 봉황이다

"필립이의 말도 일리가 있어. 하지만 당시에는 그랬다니 그것을 적극적으로 부정할 이유도 없어. 그래서 하나 더 준비했다. 그림이 아닌 글은 조금 더 명확하지."


"글자로 황제라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는 거지? 어떤 글자야?"


"희성수만세(囍聖壽萬歲)라는 글이야. 성스러운 임금의 수명이 만 년토록 오래 지속됨을 기뻐한다는 뜻이라고 하네. 그리고 이것은 용 문양보다는 직접적으로 황제가 됨을 이르는 증거라면 증거야."


데이비드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는 표정인데...


"데이비드 너는 뭔 소린지 모르겠지? 만세(萬歲)라는 단어가 단서야. 용 문양과 비슷한 맥락인데, 용 대신 봉황을 써야 했던 조선의 왕에게 만세(萬歲)라는 단어는 허락되지 않았어. 대신 천세(千歲)라는 것이 허락되었지. 만세는 황제에게만 적용되는 말이었거든."


"초등학생들 말장난같이 좀 유치한 것 같긴 한데, 당시의 질서가 그랬다면 할 말 없네. 그래서 1919년 삼일운동에 대한독립만세라고 했구먼.. 그렇다 치고, 그 글자가 어디에 적혀있다는 거지?"


"그게 내가 오늘 하고 싶은 말인데, 여기 바로 드므에 적혀있지. 다른 궁의 드므에는 아무런 글자도 없는데, 덕수궁의 드므에만 적혀있단 말이야."


"드므는 또 뭐여?"


이안은 데이비드를 중화전 양 끝에 잘 보이지도 않는 곳에 놓여있는 드므를 가리킨다.


"저것이 드므라고 하는 것인데, 비보풍수의 하나이기도 하지. 비보풍수라는 것에 대해 들어는 봤나?"


"엊그제 잠깐 풍수 이야기를 했잖아? 서울은 자연을 그대로 두고 사람들이 자연과 교감하면서 편안한 마음을 가지고 살 수 있도록 만든 계획도시라고 했는데, 풍수적으로 모자란다고 생각되는 곳에는 비보풍수(裨補風水)라고 하여 인공적인 물건을 만들어 풍수를 보완해주기도 했어. 비 과학적인 면은 있을지 몰라도 엊그제 청계천 광통교에서 이야기했듯이 도시라는 것이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이고, 사람들이 모여 사는 것 자체가 정치이기 때문에 풍수가 도시 계획에 있어서 큰 역할을 했을 거야."


"그렇다고 하고, 드므라는 것이 뭐냐고?"


"아, 그걸 이야기하려다가 또 말이 헛 나왔네. 물을 담아놓는 그릇인데, 화마(火魔)가 와서 이곳에 들어있는 물에 비친 자기 얼굴을 보고 도망가라고 하며 화재를 조심하고자 경계한 장치이지."


드므. 희성수만세라는 글자가 양각되어 있다


"그렇군. 실제로 화마가 도망가지는 않았을 테지만, 그래도 이런 것을 두면 궁에서 사람들이 한 번씩 불조심을 해야 한다는 생각을 할 수 있었겠네.. 이런 비보풍수라는 것이 많이 있나 보지?"


"한국에는 여기저기 그런 것들이 있지. 요새는 잘 보이지 않지만 솟대라는 것도 있어. 민간 신앙의 하나인데 긴 장대 끝에 오리를 조각하여 마을 어귀에 세워두지. 그리고 그 솟대가 마을의 재앙을 막아주는 수호신으로 역할을 한다고 믿기도 하고, 마을의 풍수지리상의 목적으로 새우기도 했고, 또 과거 급제를 기념하기 위해서도 새워졌다고 해. 대개 전세계의 고대 신앙에서는 새가 지상과 천상을 연결해 주는 매개라고 하잖아."


솟대 이미지. (완쪽은 실재. 오른쪽은 미니어처_삼공 윤세영 作)

"그것 재미있구만. 드므나 솟대 같은 비보풍수 관련 기념품을 좀 사가지고 가야겠네. 덕수궁에 대해서 너무 많은 것을 알게 되어 고마우니 나가서 내가 술과 밥을 사지. 그런데, 그전에 기념품 샵에 좀 가보자. 재미있는 게 아주 많을 것 같은데.."


"기념품 쇼핑 좋지. 그런데 네가 찾는 것들이 있겠나 싶다. 우리나라 전국의 기념품은 거의 다 Made in China 등긁개로 통일되어 있는 것 같던데. 요새는 베트남에서 만든 나무 수저도 있긴 하더라. 필요하면 내가 미니 솟대라도 만들어 주지 뭐! 송곳 한 개 하고 뻰치 한 개만 있으면 얼추 비슷하게 만들 수 있을 것 같네만 ㅎㅎ"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