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리몰리 인도델리
뜬금없이 란치_Ranchi행 비행기 티켓 2장을 예약을 하라고 했다.
생전 처음 만난 사람이 만난 지 30분도 안되어 이런 제안을 할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한 탓에, 잘못 알아들었는 줄 알았다.
"뭐라고요? 비행기?"
"자르칸 주(Jharkhand State)의 란치(Ranchi)행으로 가장 빠른 비행기표 두 장을 당신과 여기 마니야 씨 이름으로 예약해야 돼요."
인도 동부의 자르칸 주는 2000년대에 중반경부터 빠른 경제 성장을 하고 있었지만, 인도의 다른 주들에 비하면 상당히 낙후된 곳이다. 게다가, 반정부 주의 민병대들이 출몰하여 사고도 종종 일어나는 지역이어서 여행을 가기도 그리 달갑지 않은 곳이었다.
이방인들은 인도에서 '낙후된' 지역이라고 하면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한국인들은 더 이상 문명개화 같은 단어를 사용하지 않은지 이미 오래되었으나, 인도의 이곳저곳을 오가다 보면 그 단어가 떠오르는 경우가 꽤 있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인데...
인도는 꽤 더운 나라인데, 여름에 델리를 떠나 지방으로 출장을 가면 간혹 택시를 타야 할 때가 있다. 인도에서 렌터카를 빌리면 기사도 같이 렌트가 되는 시스템인데, 아주 시골에 가면 이러한 렌터카를 구하기 어려워 어렵게 택시를 대절해서 서너 시간 다녀야 할 경우도 있다. 대개 택시에는 에어컨이 없어서 섭씨 40도를 넘나드는 날씨에도 택시의 창문을 닫고 가는 것이 더 나은 선택이다. 택시 후드 위에서 계란 프라이도 충분히 가능하여, 창문을 열어놓으면 뜨거운 열기에 정신을 잃기 딱 좋기 때문이다. 또 다른 문제는 택시 기사들이 영어를 거의 못하여 영어로 된 주소도 잘 읽지 못하니 의사소통을 하려면 꽤 다양한 노력을 해야 한다. 그날은 하필 루피화가 조금 모자라 택시 기사에게 미화 20달러를 더 줘야 할 것 같았다. 기사는 난감해했는데, 미화 20달러를 받으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은행에 가서 바꾸면 될 것 같지만, 그가 사는 동네에는 은행이 없다. 하긴, 그런 깡촌에 은행이 있다한들 파견할 직원을 찾기는 어려울 것이니 지점을 내기란 불가능하다. 그래서 인도의 깡촌에는 은행이나 학교가 없는 대신, 우체국이 있다. 우체국은 정부 소관이니 대개 어디에나 있으면서 은행업무를 비롯한 거의 모든 동사무소 역할을 한다. 컴퓨터도 그 동네 우체국에 한 대 정도 있다면, 유일한 문명개화의 징표가 될 것이다. 하여간, 그 택시 기사를 설득해서 20달러를 주었다. 그것을 받은 기사는 이렇게 말을 하는 것 같았다. 영어 단어 한 두 개와 몸짓으로...
"당신이 진짜 사람이니까 이 돈도 진짜라고 믿어야 할 것 같다..."
생각해 보면 꽤 낭만적이기도 하고 순박한 인도인이다. 다만 문명세계에서 온 나 같은 사람들은 문명과의 단절에서 오는 심란함을 잘 극복해야 한다.
자르칸도 혹시 이런 수준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스쳤다. 다만, 주의 수도인 란치로 간다면 그 정도는 아닐 것 같았지만, 그곳에는 비즈니스도 없었고 일부러 사업 개발을 하러 다니기도 애매한 지역이었기에 오브라이의 말은 들을 필요도 없었다.
"난센스인데요? 갑자기 자르칸은 무슨 소리며, 도대체 나를 어떻게 알고 찾아온 것인지부터 이야기해 주셔야 할 것 같은데 말입니다..."
"OK, 내 전 남편이 중앙정부의 장관이었다는 말은 했으니 아실 거고... 이혼은 했지만 그 부류의 사람들이 모이는 소위 Inner Circle과의 연이 없는 것이 아니고, 나도 나름대로 인맥이 있지요."
그럴 수 있다...
"그런데요?"
"며칠 전에 모임에 갔다가 당신이 내무부에 와서 소란이 있었다고 들었는데,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 KKP와 잘 지내기가 그리 만만치 않거든요. 그래서 여기 마니야 씨와 함께 내용을 좀 알아봤는데, 우리가 문제 해결을 할 수 있는 방법을 찾을 수 있을 것 같다는 겁니다."
"그건 조금 전에 이야기하셨고, 왜 자르칸에 가자는 겁니까?"
"인도에서 일을 해 보셨으니, 인도에서 Family라고 하는 것이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는 아실 것 같고..."
그렇다. 인도의 가족 시스템은 마치 조선시대의 그것처럼 뭉치는 힘이 대단하고, 가족 구성원들 서로에게 미치는 영향력 또한 엄청나다고 해야겠다. 그래서 인도인과 십여 년을 잘 지내다 보면 자연스럽게 다른 인도인들에게 나를 자신의 Brother나 Uncle이라고 소개하는데, 이는 입에 발린 말이 아니라 그 집안사람들과도 허물없이 잘 알고 지내게 되는 것은 물론이며 실제로 어려움이 생기면 온 힘을 다해서 도와준다.
"그렇다치고...??"
"이미 자르칸 주의 전력청 장관에게 연락을 해 놓았는데, 우리가 가면 만날 수 있지요. KKP의 아주 가까운 사촌 형이란 말입니다. 그가 우리 이야기를 들어주겠다고 약속했으니, 그를 통해서 KKP와 다시 협의를 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 겁니다. 어차피 KKP를 설득하지 못하면 인도에서 그 누구도 할 수 없을 것이니.."
어쩐다?...
KKP의 성격이야 이미 알려질 대로 알려져 있으니 이들의 말을 신뢰하기는 어렵다. 나를 아는 것은 아무래도 조금의 수고는 들었을 것이므로 목적을 위해 노력한 것은 인정해야 하겠다. 그런데 KKP의 가까운 친척이 자르칸주의 전력청 장관이라는 것을 당장 확인 할 수는 없다. 그가 진짜 가까운 친척이라면 이미 무너진 다리를 다시 놓아줄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다만, 이들이 모두 돈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은 의사결정에 절대적인 영향을 주는 요소이다. 그리고 지금 나는 아무것도 결정해 줄 필요가 없다, 요구하는 금액은 말이 안 된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을 제외하고... 그렇다면 꽤 먼 거리의 이동에 필요한 시간과 출장비에 대한 기회비용만 생각하면 된다. 뮬론 아무런 소득 없이 시간만 낭비할 가능성도 있다. 그런데, 하루 이틀 동안 이것보다 더 좋은 방법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지 않다면...
"사르베쉬? 지금 란치행 비행기표 가장 빠른 것 두 좌석 예약해서 티켓을 여기 메리디언 호텔 커피숍으로 좀 보내주었으면 하네만..."
"저가 항공도 괜찮아요?"
"그게 더 좋아..."
사르베쉬는 닉에어라고 하는 여행사의 대표인데, 인도에서는 좀처럼 찾아보기 어려운 정말 일을 빠르고 깔끔하게 처리해 주는 귀인이다. 그에게 이야기를 하면 모든 것이 가능할 정도여서 내가 마치 재벌가 3세 정도는 된 것 같은 착각을 느낄 정도다.
한 시간 후에 나는 마니야라는 작자와 델리의 인디라간디 인터내셔널 에어포트로 가는 차 안에 앉아 집에 전화를 걸고 있었다.
"출장 다녀올게..."
그리 좋은 선택이 아니었다는 것을 인정하는데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는 않았지만, 피곤하고 심란한 인생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처음에는 잘 모른다. 최고의 선택지가 없다면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는 것이 좋은 결정이라는 것을 아는데 까지는 오래 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