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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2화, 무수리 14시간...

홀리몰리 인도델리

by 초부정수

마니야와 자르칸주의 수도인 란치에서 주 전력청 장관을 만나고 돌아왔지만, 명확한 돌파구는 보이지 않았고 바쁘기만 한 서 너 달이 훌쩍 흘러 연 말이 되었다. KKP는 예상대로 꿈쩍이지도 않았고 프로젝트는 스크랩되지도 않았다. 재입찰 계획도 없이 그저 계약 대기 상태에서 돌처럼 굳어버린 것 같다.


인도의 연말도 다른 세상과 다르지는 않지만 상대적으로는 차분한 편이다. 힌두력에 의해 매년 조금씩 달라지기는 하지만 대개 10월이나 11월 중에 있는 디왈리_Diwali 축제가 있기 때문인데, 이 축제는 인도와 인도권 지역에서 신년을 맞이하는 큰 축제로 전국이 화려한 등불로 가득 찬다. 외국에 오래 있으면 어느 순간부터 한국의 명절보다 그 나라의 명절에 더 들뜬 기분이 들게 되는데, 이방인에게는 그래도 연말은 연말이다. 가족들은 연말을 맞아 인도를 떠나 있다. 델리의 겨울은 그리 춥지 않지만 더운 나라답게 햇빛을 최대한 차단하고 난방 시스템이 없는 집 구조 탓에 상대적으로 더 춥게 느껴진다. 대개 12월과 1월의 기후는 섭씨 10도 내외의 흐린 날씨이지만, 간혹 0도까지도 내려가는 경우도 있어 체감온도는 꽤 낮은 편이다. 그나마 두 달 정도만 버티면 되는 것은 다행이다.


12월 30일 퇴근시간이다. 아마 한국에서는 연말을 맞아 시내는 북적거리고 보신각 타종 준비를 비롯한 다양한 뉴스, 연예 대상 시상식 등이 벌어지고 있지만, 델리는 조용하다. 이럴 때 늘 생각나는 영화 록키의 대사가 있는데, "Just another Thursday.." 록키가 아직 에이드리안과 사귀기 전에 크리스마스에는 무엇을 하는지 묻는 물음에 대한 답이다. 어릴 때 이 영화를 보면서 이상하게 이 대사가 귀에 박혔는데, 델리에서 생각이 나려고 한 모양이다.


이미 직원들에게는 12월 31일 하루는 휴무라고 통지했다. 퇴근 후 운전기사도 퇴근시켰다. 인도 친구들은 아직 해피뉴이어 톡을 보내오지는 않고 있지만 31일 저녁부터는 계속 '카톡'소리로 시끄러울 것이어서 알림을 무음으로 돌려놓았다.




"사르베쉬? 굿이브닝.. 혹시 내일부터 2박 3일 정도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곳이 있을까?"

"인도에서요?"

"인도에서.. 그리고 비행기나 기차를 타지 않아도 되는 곳으로.."

"차로 이동하시려고?"

"렌터카 필요 없고 내차로 가려고 하는데..."

"흠.. 그럼 겨울이니까 조금 더 북쪽으로 가보세요. 무수리_Mussoorie라고 좋은 휴양 도시가 있는데, 호텔 예약을 해드릴까요? 마침 Taj 호텔에서 연말 파티도 하는 패키지가 있는데..."

"파티는 무슨. 혼자 갈 건데.."

"그렇죠, 가족들 다 지금 안 계시지... 하여간, 파티라고 해도 그냥 가서 식사하고 한 잔 하시면 되니까 그저 호텔 식사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길이 막히지는 않으니까 대 여섯 시간이면 도착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럼 그걸로 하지. 고맙고, 미리 해피뉴이어!"




12월 31일 오전 6시..


회사 차는 두고 집에서 가족들이 사용하는 도요타 이노바의 시동을 걸었다, 이노바는 카니발과 같은 승합차로 인도와 같은 곳에 가장 적합한 차량일 것 같은 자동차다. 불필요한 옵션도 전자 장치도 없어 마치 미국의 전축 같은 느낌의 차량으로 가격도 착한 차이지만_물론 인도의 자동차 가격은 100% 관세로 무척 비싸기는 하지만_회전 반경이 작고 힘 좋은 디젤 엔진을 가지고 있어 인도와 같은 도로에 잘 맞는다.


오늘은 그동안 한 번도 사용해 보지 않은 인도의 내비게이션 장비를 사용해 볼 참이다. 맵마이인디아라고 하는 회사의 제품으로 그 회사가 설립될 당시의 작은 회사일 때부터 한국의 내비게이션 솔루션 사업을 개발해 보려 했었지만 잘 안되었다. 한국의 기업들은 인도의 스타트업에 투자를 할 가능성이 거의 없었기 때문인데, 근본적으로는 한국이 가진 솔루션을 접목할 틀이 부족하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인도 전역의 전자 지도를 구하는 것이 쉽지 않으며, 지도를 구해도 내비게이션 지도에 필요한 특정지역(POI_Point of Interest), 예를 들면 호텔이나 식당, 주유소, 극장 등 지도에 나타내야하는 장소들에 데이터부터 준비를 해야 하여 완전히 맨땅이었다. 특히, 그 넓은 땅에 대한 데이터를 구축해야 한다는 것도 투자를 이끌어내기 쉽지 않은 이유다. 이상한 일이지만, 인도 전역에 대한 내비게이션이 가능한 전자 지도는 독일 회사가 가지고 있었는데, 맵마이인디아는 그 지도에 대한 사용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델리를 벗어나 NH44_National Highway 44번 북쪽 방향으로 들어서자 예상하지 못한 일이 생겼다. 양구에서 군 복무 시 겨울이면 늘 소양강과 높은 산으로 인해 짙은 안개가 자주 끼었는데, 북인도의 안개는 미처 경험해 보지 못했고 앞으로도 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을 것 같다. 도로에는 짙은 안개로 정말 불과 1미터 앞도 보이지 않는다. 잠을 자다가 갑자기 눈이 떠졌을 때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것과 비슷한 느낌이다. 내비게이션에는 도로 한 개와 앞으로 60km 직진이라는 표시 외에 아무런 정보도 없다. 오히려 운전을 하기에는 편하다. 다만 처음 나서는 길을 마주했을 때 앞에 무엇이 있을지 전혀 알 수 없다는 점은 약간의 두려움과 설렘을 가져다준다.


이미 예상보다 3시간 이상 지체되고 있다. 무수리까지의 거리는 불가 300km도 되지 않지만 인도의 도로 사정을 감안해서 늦어도 7시간 정도면 도착할 것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출발 한 지 한 시간도 채 되지 않아 세 시간이 지체되었으니 앞으로 얼마나 걸릴지 감을 잡을 수도 없다.


안개는 걷힐 생각이 전혀 없어 보인다. 간간히 안개가 흩어지는 조그마한 공간을 통해 보이는 것은 넓디넓은 사탕수수 밭뿐이다. 도로는 이미 정체를 이루기 시작했다. 오랜만에 수동 기어 조작으로 클러치를 자꾸 밟다 보니 다리도 아프지만 조금씩이라도 앞으로 나아가지 않으면 꼼짝없이 길에 갇힐 뿐이다.




델리의 집을 떠난 지 12시간이 지났다. 히말라야 자락의 산들은 꽤 높아서 오후 5시면 이미 밤과 같았다. 이제 안개는 더 이상 없지만, 길이 너무 어둡고 앞에 가는 차도 없다. 내비게이션에는 여전히 도로 표시만 보인다. 하늘의 별 이외에 다른 것은 보이지 않고 디젤 엔진의 웅웅 소리만 들린다. 가져온 말러 교향곡 CD는 이미 8번을 제외하고 1번 Titan부터 2번 부활을 거쳐 9번까지 몇 번을 들었다.


갑자기 하늘에는 아주 밝은 별들이 꽤 많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제야 비로소 히말라야에 도착한 모양이다. 이노바는 엔진음을 내며 강원도의 미시령 고개와 같이 구불구불한 도로를 따라 계속 올라가는데, 뭔가 이상하다. 별들이 점점 더 밝아지면서 커지는 것 같다. 별이 그럴 리가 없는데 하던 순간 그건 별이 아니었다. 산 위 또는 산속에서 빛나는 등불이다. 주변이 너무 캄캄한 탓인지 산과 하늘이 구분되지 않아 않아 하늘이라 오해를 한 탓이었다. 저곳이 무수리임에 틀림없다.




14시간 운전이 마무리되는 순간이다. 호텔에는 이미 한 해를 마무리하는 파티 준비가 한 창이다. 해발 3,000미터가 넘는 곳의 공기는 신선하고 서늘하다. 델리의 하늘은 오염이 심해 별은 고사하고 달고 잘 보이지 않는데, 무수리의 하늘에는 구름 따라 흐르는 별도 꽤 많이 보인다. 파티는 별것이 없다. 흥겨운 인도 음악에 여러 가지 음식이 뷔페형식으로 차려져 있고 손님들은 모두 음악에 맞춰 동작이 큰 인도식 춤에 몸을 흔든다. 14시간 운전의 피로가 사라지는 듯하다.




늦게 잠자리에 들었지만 일찍 눈이 떠졌다. 그런데 피곤하지 않은 것이 신기하다. 오랜만에 잠을 잘 잔 모양이다. 공기가 좋아서 그런가...


밖으로 나오자 밤에 보지 못한 호텔 앞 풍경은 놀랍다. 호텔은 높은 산 등성이에 서 있고, 호텔 앞으로는 히말라야 산맥의 끝 자락이 계곡을 이루며 펼쳐진다. 스위스에는 가보지 못했지만, 스위스와 비슷하다고 한 사람들의 말이 실감 난다. 하지만 정작 신기한 것은 그런 멋진 풍경이 아니다. 특별한 것이 느껴졌지만 한동안 그것이 무엇인지 이해되지 않았다. 문득 깨달았다. 햇빛이 투명하다. 투명하다는 말로는 모자라지만, 그토록 햇빛이 투명하다고 생각해 본 적도 느낀 적도 없는 것은 분명했다. 신기하다.







카메라를 둘러메고 마을로 들어갔다. 영국인들이 여름철 휴양지로 이용했다고 하는 도시인 것을 금방 알 수 있었다. 지금까지의 인도와는 분위기가 다르다. 굉장히 오래전에 세워진 교회도 있다. 마을로 이어지는 도로에는 처음 보는 은색 털을 가진 원숭이 무리도 있다. 체격이 꽤 크다. 랑구르_Langur라고 한다. 전설속의 설인이 아마 저들이었을지도 모른다. 아이들이 삼삼오오 모여 산길을 따라 어딘가로 가다가 나를 보자 다가와서 인사를 한다. 깨끗하다. 입고 있는 옷과 얼굴이... 신기하다. 인도가 아닌 것 같다.










다음 날 다시 델리로 떠나는 길은 그리 멀다 느껴지지 않았다. 한 번이라도 와 본 길은 가지 않은 길과 달라 익숙하다. 평생 가보지 않은 길은 늘 두려움과 기대의 대상이지만, 그저 그런 것으로 남겨놓아야 한다. 모든 길을 가 볼만큼 시간이 많지 않기 때문이다. 남들이 가지 않은 길을 간다고 해서 손해가 나는 것은 아니다. 또 큰 이득이 있을지는 가보기 전에는 알 수 없다. 오히려 익숙한 길에서 새롭고 놀라운 것을 발견할 가능성이 더 높을 수도 있다. 가보지 않은 길은 즐거운 상상으로 남겨두는 것도 좋다.



돌아오는 길에 전 날은 보지 못했던 과일장수와 전통적인 또는 전근대적인 설탕 공장도 볼 수 있었다. 인도에는 Jaggery 또는 Gur라고 하는 농축 사탕수수 즙을 생산하는 허름한 공장들이 많다. Gur는 음식을 할 때도 넣기도 하고 직접 먹기도 하는데, 정제 설탕이 아니라 밀당이 섞여있어 흰색이 아니지만 나름 건강에는 도움이 된다고 한다. 그렇지만 인도는 세계에서 당뇨병 환자가 제일 많은 나라이기도하니. 건강에 좋다고 해야 할지 애매하다.



설탕공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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