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화, 일상다반(茶飯)사? 일상주반(酒飯)사!

청계천 로망스

by 초부정수

"환전 한 번 하는데 말이 꽤 길어져서 그런지 또 배가 고프네."


"그래, 우리 앞으로 말은 좀 줄이고 먹는 것에 더 신경을 쓰는 것이 나을 것 같네. 데이비드는 미국 돌아가면 아무래도 여기 음식과는 다를 테니 있을 때 많이 먹고 가야지."


"나는 밥도 먹고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 것도 좋은데..."


"이런 이야기야 인터넷... 아니지 요새는 AI 한테 물어보면 금방 잘 정리해서 알려주니 이렇게 우리끼리 떠들 일인가 싶기도 하고.."


"잠깐만... 조금 간과하고 있는 것이 있는데, 물론 AI가 쉽게 잘 정리해서 알려주는 것은 편리하지. 그런데, 그 내용이 내 것이 되느냐 하는 것은 조금 다른 문제인 것 같거든. 내 기분인지는 모르지만 AI가 준 답을 읽으면 콘텐츠를 그저 소비하고 마는 것 같아. 정보로 오래 남기 보다는 금방 잊어버리게 되는 것 같단 말이야. 하지만, 이렇게 우리끼리 이야기를 하다 보면 이야기를 하면서 생각을 하게 되는지는 몰라도 단순히 소비되는 콘텐츠가 아니라 내 지식이 되는 것 같단 말이지. 나중에 시험을 봐도 답을 맞힐 수 있을 것 같이 진짜 공부를 했을 때 그런 기분 알지?"


"잘 모르겠는데... 그래 본 적이 없어서.. 설사 그렇다고 치더라도, 요새는 AI와 깊은 대화를 하는 사람도 많아. 물론 사람에 따라 다르지만 말이지. 난 그렇게는 못하겠더라고."

필립은 AI를 사람처럼 생각하는 것이 못내 마땅치 않지만, AI와 대화를 해 나가는 과정에서 지신의 생각도 정리되고 발전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점에는 동의한다. 다만, 스스로는 잘 안될 뿐이다.


"나도 늘 당일치기 시험준비만 했었기 때문에 잘 모르겠구만. 하지만 시대가 변했다는 것은 인정을 해야겠지. 처음은 늘 어색하기 마련이거든. 어린 여자 아이가 손가락으로 자기 손바닥만 한 크기의 네모를 그리면서 '텔레비전에 내가 나왔으면 정말 좋겠네'라는 노래를 부르는 광고가 나왔을 때만 해도 핸드폰으로 TV를 보는 세상이 온다는 것이 황당하다 생각했었어. 그 조그만 화면으로 무슨 TV를 보겠나 싶어서 그 광고 참 잘못 만들었다고 생각했었는데, 내 생각이 영 구린 것이었다는 것을 아는데 그리 오래 결리지도 않았지."


"이 사람들 참 구제불능이구만. 자기들이 이야기 좀 줄이자고 하더니만...."


"그렇지. 밥 먹으러 가야지. 오늘은 다동 쪽으로 가보지. 걸어서 10분이면 갈 수 있을 것 같은데.."

이안이 오늘은 다동으로 가보자고 한다.




"다동이면 가동과 나동도 있겠네?"

데이비드는 다동이라는 동네 이름을 처음 듣는데, 서울을 가나다 순으로 지역 구분을 하는 것이 편리하다 생각했다.


"그건 미국식 논리냐? 요새는 아파트도 그렇게는 동 구분을 안 하는데.. 하여간 생각이 특이해."



"그게 아니야? 그럼 다동은 왜 다동인 것이야?"


"서울이 꽤 오래된 도시라는 것을 다동이라는 이름에서도 알 수 있는데, 조선 시대에 계절 과일이나 농산물을 사당이나 제단에 올려 차례를 지내거나 지방의 특산물을 왕에게 올리는 일을 하던 사옹방(司饔房)이라는 곳이 지금의 다동에 있었는데, 세조 때인 1467년에 사옹원(司饔院)으로 개편되었어. 사옹원의 ‘옹(饔)’은 ‘음식물을 잘 익힌다.’는 뜻이야. 그러니까 이 사옹원에는 조정의 다도와 다례(茶禮)를 주관하는 다방(茶房)이 있어서 다방골이라고 부르던 것에서 다동이라는 동네 이름이 생긴 거라고 하더라."


"다동이라는 동네 이름이 꽤 운치가 있는 것이었구먼. 그럼 아직도 다동에는 찻집이 많이 남아있겠네?"


"그렇지는 않은데, 우리나라 사람들이 언젠가부터 차는 잘 안마시게 된 탓인지도 모르겠지만, 찻집은 별로 없고 술집과 오래된 유명 노포들이 많이 있어. 무교동이라고 들어는 봤지?"


"무교동 낙지골목이라는 말은 들어봤지."


"원래 행정구역상 다동인데, 다동 대신에 보통은 무교동 골목으로 통했던 곳이라서 다동이라는 이름이 좀 낯설 수는 있을 거야. 그런데, 무교동이라는 이름도 따지고 보면 그 이름의 유래가 꽤 오래된 것이야."


"무교동도 무슨 뜻이 있는 거야?"


"뜻이라기보다는 며칠 전에 청계천 광통교에 갔을 때 봤으려나 모르겠지만, 광통교 근처에 모전교라는 다리가 하나 있어. 물론 원래 자리는 거기서 조금 더 떨어져 있었다고 하던데, 발굴하면서 그곳에 두었다고 하는 것 같아. 여하간, 그 다리 옆에 과일을 팔던 가게가 있었는데, 과일 가게를 모전(毛廛)이라고 해. 그 모전을 중심으로 웃모전다리와 아래모전다리가 있었다고 하니 다리가 두 개였던 모양이야. 웃모전다리를 모교라 했다지 아마. 그리고 덕수궁이 원래 지금보다 더 컸었다고 했었던 것 기억나지?"


"그랬지, 지금의 서울 시청까지가 원래 궁역 이었다고 했지. 그곳에 군대와 관련된 기관이 있었다고 했고."


"역시 AI가 아닌 우리끼리 이야기를 한 영향인가? 기억을 하네.. 하여간, 그 무기의 제조와 관리를 담당하던 군기시가 거기 있었으니까 모전에서 가깝지. 그래서 아래모전다리를 웃모전다리와 구분해 무교(武橋)라고 했다지."


청계천 다리. (출처 : 서울시설관리공단 홈페이지)


"그러니까 무교가 있던 동네 이름이 무교동이 되었고, 다동은 바로 옆이었단 말인데 찻집보다는 술집이 많았던 무교동이 더 유명해진 모양이구만."


"그런가? 뭐 딱히 맞는 것 같지는 않지만 그럴지도 모르지. 여하 간에, <모전 다리 다모(茶母)의 겨드랑이>라는 우리 속담이 있잖아. 모전이 있었던 서울 무교동 초입에서 차를 팔던 다모의 저고리가 짧았다는 데서 유래한 말로, 감질나게 하는 사물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라고 전해오는 말이 있으니 무교동과 다동의 위치와 명칭의 유래를 가늠할 수 있는 것이기도 해."


"뜻은 알겠고, 궁금한 게 하나 생겼는데 말이지..."

데이비드는 모전이니 군기시니 하는 말들이 쉽지는 않았지만 전체적인 윤곽은 이해할 수 있었다. 다만, 왕실의 차를 준비하던 관청까지 있었으나 지금의 한국에서는 일본과 같이 다도(茶道)라고 하는 문화를 잘 찾아보기 어려워진 이유가 궁금했다.


"뭐가 궁금하신가 미국인?"


"한국에서는 커피를 많이 마시잖나? 차를 마시는 사람들을 잘 본 적이 없고, 일본 TV를 보면 차를 마시는 예법에 대한 방송도 많이 하던데, 한국에서는 그런 것이 왜 없는지 모르겠어. 나도 사실 나도 티백에 있는 녹차는 마시지만 정식으로 다기(茶器)에 찻잎을 우려내면서 마시는 일은 해 본 적이 없지. 일단 맛도 잘 모르고..."


데이비드는 차 문화도 다른 문화와 같이 대륙인 중국에서 한국을 거쳐 일본으로 유입된 것이라 생각하는 것이 합리적이라 생각한다. 사실 한국에 있는 중국식당에만 가봐도 중국인들이 차를 즐긴다는 것을 알 수 있을 정도이고, 인도인들 또한 다즐링이나 아씸 차와 같은 다양한 고품질의 차를 생산하고 많이 마신다. 일본인들은 어떠한지 잘 모르지만, 그들도 역시 차를 많이 마시는 편으로 느껴지는데, 유독 한국 사람들은 차를 즐기지 않는 것 같다.


"하긴 중국인들이나 인도인들은 일상적으로 차를 마시는데, 그들이 차를 마시는 모습을 보면 맛이 우선인 것 같단 말이야. 그저 무심할 정도로 우리가 커피 마시듯이 차를 마시는데 반해서 TV를 통해 보이는 일본인들의 차 문화는 꽤 격식을 따지는 것 같아 보여. 한국의 차 문화는 사찰의 스님들도 포함해서 일본과 비슷한 것 같기도 하고... 그래서 번잡하니까 안 마시게 된 것 아닐까? 형식을 따라야 하는 것들도 좀 불편하고..."


"그럴 수도 있지. 맛을 떠나서 그리 실용적이라는 생각은 안 드는 것이 사실이야. 바쁜 세상에 차 마실 여유도 없는 것 같고.." 필립 역시 차를 마시는 일에는 그리 관심이 없다.


"나는 맛이 중요하다고 봐. 아직도 우리는 명절에 차례(茶禮)를 지내면서 차 대신에 술을 놓잖아. 차가 맛이 없기 때문이 아닐까?" 다방이 어쩌고 하던 이안 조차 차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데이비드는 차례를 지낸다고 할 때 차가 그 차인 줄 미처 몰랐다.


"차례는 원래 차(茶)를 올리면서 지내는 것이었어?"


"그렇지. 그래서 원래 차례라고 한 건데, 몰랐구나. 언제부터인지는 모르지만 차례상에 술이 올라갔잖아. 그래서인지 우리는 보통 주도(酒道)라고 하는 주례(酒禮)가 꽤 발전된 것 같아. 그리고 우리가 술자리의 예의범절을 강조하면서 흔히 말하는 주도(酒道)는 일본인들의 표현이고, 우리는 원래 주례(酒醴)라고 했어."


"결혼식 주례는 들어봤네만.. 술 마시는 예법도 주례라 하는군. 그렇다면 한국의 주례에 대한 설명이 도움이 될 것 같긴 해. 내가 어려서 미국에 가는 바람에 주례를 잘 배우지 못한 것 같단 말이야."


데이비드는 아직 공식적으로 술을 마실 나이가 되기 전인 고등학교 2학년 즈음에 미국으로 건너갔다. 그는 캘리포니아주의 샌디에이고에서 학창 시절을 보냈고, 당시의 샌디에이고에는 동양인이 거의 없었고 대부분 부유한 백인들이 은퇴하고 찾는 부자 동네였기 때문에 한국식으로 술을 배울 기회가 없었을 것 같다.


"그래서 이 미국인이 어째 술자리에서 하는 행동이 이상했던 거구나. 혼자 술 따라 마시길래 술이 고팠나 싶었는데 주례를 몰랐던 거였네. 미처 가르쳐 주지 못해서 이안이도 좀 헷갈렸겠구만."


"그렇게까지 이상하지는 않았을 텐데..."


"간단히 이야기해보자면... 전통적으로 술 마시는 방법에 따라 대략 세 가지 문화권으로 나눈다고 하는데, 자작(自酌), 대작(對酌), 그리고 수작(酬酌)으로 구분할 수 있어. 여기서 酌은 따르다는 뜻이고, 수작(酬酌)의 수(酬)는 잔을 돌리다 또는 술을 권한다는 말이니 대강 주법이 어떨지에 대하여 감이 오지?"


"自酌이라는 것은 자기 술잔에 자기가 먹고 싶은 만큼 따라 마신다는 말이겠고, 이것은 서양 사람들 마시는 방법인걸? 나도 보통 이렇게 마시는데… 그런데 이것은 혼자 마시는 것도 되고 여러 사람이 같이 마실 때도 적용이 되는 것 같긴 하네."


“그렇지. 자작과 관련해서 독작(獨酌)이라는 것도 있는데, 혼자 마시면 당연히 자작을 하게 되는 것이니까. 사실 중국에서는 독작이 더 발달한 것 같은데... 달 빛을 친구 삼아 또는 바람을 음악 삼아 혼자 술 마시는 모양을 그림이나 시로 많이 표현해 놓았거든. 예를 들면 달에서 놀던 당나라의 유명한 시인 이태백의 시 중에 월하독작 (月下獨酌)이라고 달빛아래에서 혼자 술 마신다는 시도 있고.”


“혼자 마시면 취할 정도로 못 마시겠던데 이태백은 달이랑 마셔서 취할 수 있었던가 보구만. 그래서 난 대작(對酌)이 나은 것 같어."


"대작도 법칙은 있지."


"그래? 그냥 서로 주거니 받거니 하는 것 아닌가?"


"그렇지, 주거니 받거니. 근데 그 주거니 받거니에 법칙이 있다는 것이지."


"예를 들면?"


“잔을 맞대고 건배를 외치며 마시는 것을 대작이라고 하는 것은 알지? 만약 내가 술을 따르는데, 많이 마시고 싶지 않으면 적게 따르라고 이야기하거나 술잔의 밑을 잡는 거야. 그러면 나는 술을 조금만 따르고 더 권하지 않는 것이 예의지."


“그런데, 우리가 대작한다고 하면 뭔가 좀 대결을 하는 느낌 아니냐? 마시다 보면 이 인간은 대작이 안된다는 둥 뭐 그러면서 호기를 부리는 것은 주례(酒醴)라고 할 수 없는 것이겠구만.”


“그렇지, 술을 문화에 따라서 달리 마실 건 아니지만, 술 마시기 전에 이런저런 이유로 자작을 하는 것으로 정하면 그날은 술을 좀 덜 마시게 되기도 하지.”


“그럼 수작 (酬酌) 은 정확히 무슨 뜻인가? 대작과 비슷한 것 같은데..."


“코로나 팬데믹 이후에는 아예 없어진 것 같은데, 예전에는 많이 했어. 내 잔을 비우고 그 잔을 상대에게 주면서 술을 따라주는 것이지. 수작은 한자로 두 가지로 쓰더라고. 수작(酬酌) 또는 수작(酬酢)...

뒤에 작(酢)은 잔 돌릴 작 이거든. 그러니까 원래는 주인이 술을 따라주고 답례로 손님이 주인에게 따르는 것이었는데, 지금은 좀 무리한 방법이 아닌가 싶네."


"그러니까 두 사람이 서로 술을 권커니 잣거니 하면서 대화를 이어가는 음주법이니 어쩌면 가장 인문학적인 음주법인 것 같은데, 앞으로는 이런 식의 음주법을 보기는 점점 어려워 질 것 같어. 술 때문에 사건 사고도 많아지고 있고..."


"나야 이안이 너처럼 술을 잘 마시지는 못하니까 할 말이 없다만, 인문학적으로 술을 마신다는 것이 가당키는 한가 모르겠다. 그래봐야 취하기는 마찬가지 아닌가? 그러니까 예전과 달리 음주에 그리 관대하게만 대할 수 없는 사회 구조가 된 것도 사실이고, 걸핏하면 음주운전에 기억이 안나는 각종 경범죄와 강력범죄에 대처도 미흡하고. 하여간 적당히 마시는 술이라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니지."


"쉬운 일이었으면 지금 쯤 저녁 반찬이 달라졌겠지.. 그래도 요새는 데이비드 덕분에 집에서 쿠사리는 덜 먹고 있지.."


"쿠사리는 일본말이여. 핀잔이라는 좋은 말이 있는데..."


"일상이 차마시고 밥먹는 듯 하다해서 일상다반사(日常茶飯事)라고 하지만 너희들과는 일상주반사(日常酒飯事)여.. 여기가 다동이라는 곳이구만. 오늘은 각자들 자작하고 일찍 들어가서 쉬는 계획을 세워보던지..." 이안은 필립의 말을 짐짓 모른 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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