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계천 로망스
호텔을 나와 한 시간 정도 걸었다. 데이비드는 청계천을 따라 이어진 산책로가 없었다면 이곳까지 걸어서 올 생각을 하지 않았을 것 같았다. 사실 청계천은 데이비드의 기억에 거의 남아있지 않다. 어렴풋이 미처 복개(覆蓋)되지 않고 남아있던 청계천 일부 구간의 오염된 물이 흐르던 기억과 그다음에는 삼일고가도로 위로 택시를 타고 삼일빌딩 앞에서 왼쪽으로 휘어져 내려가는 도로를 달릴 때 느꼈던 짜릿함 정도다. 지금은 그 짜릿함을 주었던 삼일고가도로가 없어지고 청계천이 모습을 드러내어 더 이상 짜릿함을 느낄 수는 없지만, 경험해보지 못한 도심의 싱그러움이 주는 즐거움을 느낄 수 있게 되었다.
이안이 먼저 식당에 도착해 있었다.
"어서들 오시게, 내가 조금 일찍 도착해서 먼저 한 잔 하고 있었네."
그러고 보니 식탁에는 수육 한 접시와 맥주 한 병, 소주 한 병이 놓여있다. 오늘은 수육을 먹는 날인 모양이다.
"건강 검진을 마쳐서 그런가 이런 부드러운 고기가 땡기네. 이 식당의 대표 요리인가 보지?"
"성격도 급하네. 앉아서 우선 한 잔 받으시고..."
이안이 맥주와 소주를 비율에 맞춰 섞어 따르며 한 잔을 권한다. 대략 3Km 정도는 걸었다는 생각에 데이비드와 필립은 한 잔을 단숨에 비워냈다.
"건강 검진 이전에는 뭔가 숙제를 안 한 기분이었는데, 이제 끝나고 나니 술이 더 시원하고 맛이 좋구만."
"그럼 한 잔 더 하시게. 이 식당 음식이 꽤 괜찮아서 술도 잘 안 취한다고."
벽에 걸린 메뉴판이 간단하다, 비빔냉면과 수육, 회무침과 만두 정도만 있다.
"이 동네는 이런 함흥냉면이 유명한 곳인데, 예전보다 식당이 많이 사라지긴 했지만 아직도 유명해서 손님이 많아. 데이비드는 먹어봤나 미국에서?"
"당연히 먹어봤지. 캘리포니아에는 거의 모든 한국 음식이 있거든. 물론 맛이야 좀 다를 수 있겠지만.."
"맛이 아마 많이 다를 것 같구만. 이 동네의 함흥냉면은 그중에서도 조금 특별하거든."
"특별하다? 맛이?"
"맛도 그렇지만, 스토리가 좀 특별하지. 이 식당 주변에 있는 중부시장을 오다가 봤을 텐데, 아닌가?"
"봤지. 방산시장도 봤고, 큰 시장이 많더구만."
"그 중부시장은 건어물을 전문적으로 취급하는데, 예전부터 속초에서 물건을 많이 가져왔어. 그런데, 속초는 또 이북의 함경도 사람들이 많이 모여 살게 된 도시거든. 오래전에는 실향민이라고 했지만, 지금은 뭐 그렇게 부를 수는 없겠지. 하여간, 함흥냉면에는 고명으로 홍어회나 명태회를 올려주는데, 원래는 가자미식해를 올렸었다고 하네."
"홍어회를 얹은 함흥냉면은 나도 먹어봐서 아는데, 명태회는 못 먹어봤던 것 같고, 가자미식혜는 뭐냐? 식혜는 쌀로 만든 음료 아냐?"
"식혜가 아니고 식해라고. 식해(食醢)는 생선을 토막 내서 소금과 흰밥, 고춧가루 무 같은 것을 넣고 버무려서 삭힌 젓갈 종류의 음식이여. 가자미식해는 가자미롤 만든 젓갈 같은 것인데, 이게 만들려면 꽤 오래 걸린단 말이야. 보통 2주 정도는 필요한 것 같더라. 엄청난 슬로푸드지."
"그래서 지금은 안 쓰는 모양이구만."
"딱히 그렇다고 하기보다는 재료 문제가 더 큰 것 같어. 사람들이 그러는데 이북의 함흥에는 이런 함흥냉면이 없다고 하더라고. 이런 형태의 함흥냉면은 한국전쟁 당시에 피난을 와서 속초에 자리를 잡고 살아가기 시작한 함경도 사람들이 고향 음식을 만들어 먹고 팔면서 시작된 모양이야."
"아.. 그런데 함경도에서 나는 재료가 없어서 뭔가 다른 방식으로 만든 모양이구만."
"어찌 그런 생각을 했다니? 어려운 건데 ㅎㅎ"
"얼마 전에 필립이랑 평양냉면 먹으면서 이런 비슷한 이야기를 한 적이 있어서 그럴 것 같더라구. 그런데, 무슨 재료가 없었다는 거여?"
"주워들은 것이긴 한데, 우선 원산과 그 북쪽의 함흥 지역에서 나던 감자는 좀 쫄깃한데 남쪽 지방의 감자는 그렇지 못해서 감자가 아닌 고구마 같은 것으로 면을 만들기 시작했던 것 같고, 북쪽에는 가자미가 많이 잡혔는데, 이쪽에서는 가자미 대신이 명태 같은 것이 더 많았던 모양이더라구. 하지만, 또 생각해 보면 결국은 같은 사람들이 만든 같은 음식이라고 봐야 되지 않나 싶기도 해. 맛이 조금 다를 수는 있지만 기본은 같지 않아?"
이야기를 듣던 필립이 뭔가 생각난 듯 대화에 끼어들었다.
"원산이면 강원도잖어? 물론 지금은 북한에 속한 도시지만 속초에서도 가까울 것 같고. 그러니까 노래에도 명태가 원산 앞바다에서 뛰어놀았다고 하는 것이고... 그럼 원래 명태회나 명태식해도 있었을 것 같은데?"
"명태가 어디서 뛰어놀았다고? 그런 노래도 있나?" 데이비드는 그런 가사의 노래를 들어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들어봤다고 해도 기억에는 없는데...
"소주 마시는 사람이 어째 그 노래를 모른다니? 노래 제목도 명태이고 고등학교 2학년 음악시간에 음악 선생님이 가르쳐준 노래인데... 양영문 작사, 변훈 작곡, 오현명 노래... 그리고 애들 그거 다 따라 하고 그랬잖아."
"모르겠는데 전혀..."
"데이비드도 들으면 기억날 거야. 난 그래도 원래 그 노래 불렀던 오현명의 명태가 제일 맛깔나고 좋던데 ㅎㅎ"
"어떤 외롭고 가난한 시인이 밤늦게 시를 쓰다가 쇠주를 마실 때 (카아~~~).. 그 부분 말이지? 오현명 아닌 다른 가수들도 잘 부르기는 하지만 그 느낌은 안 나지. 독보적이여~"
"그러고 보니 또 들어 본 것 같기도 하고.. ㅎㅎ 하여간 앞으로는 쇠주를 마실 때 함흥냉면이 생각날 것 같구먼."
"사실 이 함흥냉면도 말이야 따지고 보면 일제강점기와 관련이 있지 않나? 일본이 전쟁에서 지고 우리나라를 소련과 미국이 분할해서 관리하다가 남북으로 갈렸고... 그 때문에 전쟁이 나서 원산과 함경도 흥남부두에서 10만 명이 넘는 피난민이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 겨우겨우 남으로 넘어왔잖아. 그리고 그들이 살아가기 위해 하던 일 중의 하나가 지금의 이 유명한 함흥냉면이 되었다고 생각하면 쇠주가 땡길수밖에..."
"한국에는 말이지 뭔가 이야깃거리가 많은 것 같어. 그리고 그 이야기들이 어떻게는 다 연결이 된다는 것도 재미있고 말이지. 오늘만 해도 시장, 소주, 함흥냉면, 일제강점기, 한국전쟁, 피난, 명태 뭐 이런 게 다 연결이 되는 게 참 이상하지? 단어 하나씩 따로 보면 아무런 접점도 느껴지지 않는데 말이야 ㅎㅎ"
"한국이 원래 그래. 청계천만 해도 그렇고, 서울 시내에 조선 시대의 성문 같은 건물들도 하나같이 다 그런 이름을 가지고 있는 이유가 있을 정도니까 말이지. 그래서 아마 요새 한국의 콘텐츠가 글로벌 시장에서 인기가 있나 싶기도 하고 ㅎㅎㅎ"
이안과 필립은 물론, 데이비드도 전쟁을 경험해보지 못하여 그 참혹함을 생각으로만 가질 뿐인데, 어쩐지 오늘은 쇠주의 맛이 조금 다를 것 같다. 전쟁 중에 부상을 당하고 이별하는 아픔도 클 것이나, 억지로 고향을 떠나 모든 것이 생경한 지역에서 아무것도 없이 오로지 살아남기 위해, 그리고 살아남은 가족을 위해 자기의 모든 것을 바친 사람들이 있었다는 사실에 생각이 미치자 그 생각의 무게가 놀랍도록 크다. 그들도 한때는 인간으로서 꿈이 있었을 것인데 말이다.
"오늘은 그 당시의 실향민들을 한 번쯤 생각하면서 한 잔 하자구! 명태회는 없으려나 메뉴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