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계천 로망스
호텔 방에서 잠이 일찍 깬 데이비드는 김훈의 소설 <하얼빈>을 펼쳐 들었다. 며칠 전 소공로를 지나 남대문 시장으로 걸으며 조선의 명월관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들었던 김훈의 소설 <하얼빈>을 읽어보려고 한 권 구매를 해두었으나 그동안 펼쳐보지 못했었다. 사실 한국어로 된 책을 읽어 본 기억이 너무 오래전이어서 소설책을 읽는다는 것이 그리 쉽지만은 않을 것 같았지만, 한국 방문 기념으로 책을 한 권 사서 시도를 해 볼 요량이다. 책의 표지를 확인한 후 무심코 펼친 페이지에는 똥 이야기가 적혀있다. 며칠 전 들었던 바로 그 내용이다. 308 페이지 분량의 소설책 속에서 하필 그 페이지가 펼쳐지는 것이 불가능한 일은 아니지만 하필이면 우연인지 그 페이지가 펼쳐진 이유가 무엇일까 잠깐 궁금했다.
'이토란 이토 히로부미를 말하는 것 같은데, 서울에 부임을 했던 모양이구만. 그런데 똥 이야기는 뭔 소린지 모르겠네. 이토가 지금 깨어나서 서울을 보면 뭐라 하려나? 그 당시는 일본이나 한국이나 다 비슷하지 않았을까 싶은데 너무 독단적인 생각이 아닐까..."
오늘은 예정대로 종합 건강검진을 받으러 가야 하는 데이비드다. 비록 전날 술을 마셨지만 저녁 9시 이후부터의 금식은 어찌 되었거나 지킨 셈이다. 일찍 시작한 저녁시간 덕분에 2차까지 했어도 저녁 9시라는 조건은 지켜냈다는 것에 마음이 뿌듯하다...
"어이! 미국인, 건강검진은 잘 받았는가? 술 냄새 풍기면서 검진받으러 온 사람들은 없었을 건데 ㅎㅎ"
필립이 호텔 로비로 들어서며 또 실없는 농지거리다.
"덕분에 냄새 풍기면서 했겠지.."
"원래 평소대로 생활하고 검진받아야 정확한 법이야. 며칠 건강 관리한다고 해서 달라질 것도 없고 오히려 정확한 결과를 받게 될 테니 잘 된 일이지 않나?"
"그래 뭐 그렇다고 치자고. 그래도 뭔가 이상한 거 나오면 안 되는데 말이야. 미국 가서 병원 가야 할 정도면 또 그 보험이 장난이 아니라서 말이지..."
"미국은 다 편리한 줄 알았는데, 영 아닌 모양이네.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하기로 하고 오늘은 검진 기념으로 한 잔 해야 하지 않겠나?"
"어제는 오늘 때문에 자작을 했지만, 오늘은 그럼 대작을 하는 것으로.. 메뉴는 뭘로?"
"오장동으로 가지. 청계천 따라 좀 걷다 보면 얼추 밥 먹을 시간은 되겠다. 이안이는 시간 맞춰서 그곳으로 올 거야."
청계천 물이 흐르는 대로 동쪽으로 걸음을 하다 보니 어느새 방산시장을 지나 오장동으로 방향을 잡는 필립이다. 물소리 덕분인지 아침을 건너뛰고 점심에는 병원에서 서비스로 준 죽 한 그릇을 비웠을 뿐이지만 걷는 내내 그리 힘들지 않고 오히려 기분이 상쾌해졌다.
"방산시장은 무기류를 파는 시장인가 보지?"
"또 뭔 소리냐? 한국에서 무기를 어떻게 시장에서 판다니? 답답하네~"
"방산이 방위산업을 이야기하는 것 아냐? 뉴스에서 늘 방산업이니 뭐니 하길래 난 그런 무기류를 말하는 줄 알았지. 그럼 방산시장은 뭐 하는 곳인데?"
"방산시장은 좀 특이한 곳인데, 미국에 홈디포_The Home Depot라고 하는 집수리 용품 파는 곳 있지? 소위 DIY 숍이리고 하는 거.. 방산시장도 약간 비슷한 시장인데, 제과 제빵 관련한 기계부터 장식, 포장 등에 필요한 것은 물론이고 종이류나 인테리어에 필요한 것 등 거의 자기가 스스로 만들어서 쓰는데 필요한 상품을 파는 곳이라고 할 수 있지."
"음.. 그렇구만, 그런데 왜 방산시장이냐? 뭔 뜻이야?"
"며칠 전에 조선의 청계천 준천 사업으로 바닥의 흙을 파내서 가져다 버린 곳에 흙이 쌓여 가짜산이라는 의미의 가산(假山)이 생긴 곳을 가산터라고 한다고 했던 건 기억이 나지?"
"당연하지. 그 가산에 거지들이 땅굴을 파고 살면서 뱀을 잡아서 파는 일을 했다고 해서 그 사람들을 땅꾼이라고 부르기도 했고, 그 우두머리를 꼭두쇠 또는 꼭지단이라고 한다고 했던 것도 기억나지. 그러다가 서울깍쟁이라는 말과의 연관성에 대해서도 이야기했고..."
"생각보다 잘 기억을 하네. 고등학교에서 우리 수업도 대화를 하면서 했으면 그렇게 억지로 외울 필요가 없었을지도 모르겠구만. 하여간, 그 가산터가 이곳에도 있었단 말이야. 예전의 동대문 운동장을 기억하나 모르겠네... 지금은 그곳에 DDP가 생겨서 완전히 달라졌는데, 동대문 남쪽 성벽아래의 청계천 물이 도성 밖으로 잘 빠져나가도록 만들었던 오간수문(五間水門)이라는 것이 있었다고 해. 그 오간수문의 북쪽과 남쪽에 가산이 만들어졌고, 이곳 방산동은 남쪽 가산터의 일부였다고 하지."
"오간수문이란 수문이 다섯 개라는 말이지?"
'그래, 무지개 모양의 수문이 다섯 개 나란히 있었다고 하네. 참고로 무지개를 홍예(虹霓)라고 하고, 무지개 모양의 다리를 홍예문(虹霓門)라고 한다고.."
"그렇구만, 그런데 방산시장이라는 이름은 왜 생긴 건지 아직 말을 안 했는데?"
"아... 또 말이 샜구먼. 그래서 그 가산 터라는 곳이 아무래도 좀 냄새가 났을 거 아니냐? 쓰레기가 쌓이고 또 쌓였으니 아무래도 좀 거시기했을 거란 말이야. 그래서 언제부터인가 가산터에 꽃을 심기 시작했는데, 아마 꽃이 꽤 많이 피었던지 동네에 꽃 향기가 가득해졌다고 하네. 그래서 꽃향가를 뜻하는 방(芳) 자와 뫼산(山) 자를 합쳐서 방산동이라고 이름을 바꿨다고 하더라. 그게 아마 1914년이니까 일제강점기에 동 이름을 바꾼 것 같어. 그래서 거기에 생긴 시장이 방산시장이 된 것이지."
"아... 역시 한자를 좀 알아야 할 이유가 또 생겼네.. 꽃 향기가 나는 동네다? 멋지네. 생각해 보면 영조대왕이 백성을 위해 청계천 준천사업을 했고, 그 결과가 수 백 년 지나서 꽃 향기 나는 동네를 만든 원인이 되었으니 백성을 근본으로 한 정치가 결국은 통한 것이구만."
"해몽이 좋구나. 며칠 사이에 제법 말이 늘었네 미국인이..."
"사실은 아침에 소설 하얼빈을 무심히 펼쳤는데, 이토 히로부미가 서울에 와서 거리에 똥이 많다고 불평하는 대목이 나와서 영 찜찜했거든. 그런데, 이런 이야기를 들으려고 했던 모양이구만. 안 좋은 쓰레기 냄새도 결국은 꽃 냄새로 만들어 버리는 사람들이 사는 곳이니, 이토가 지금 다시 살아나서 서울의 모습을 보면 까무러칠지도 모르겠다."
"그럴 수도 있겠지. 그런데 이토 그 사람은 어째 인문학적인 감각은 없었던 것 같어. 그 당시에는 전 세계가 다 비슷했었는데 말이야. 세바스찬 바흐의 신앙심 가득한 음악을 듣던 유럽인들의 집에도 화장실이 없어서 요강을 썼고, 요강이 다 차면 그냥 밖에 버렸다고. 반면에 정조 시대의 실학자이자 소설가인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의 단편 소설 중의 하나인 ‘예덕선생 전(穢德先生傳)’을 보면 똥에 대한 조선 사람들의 생각은 꽤 고차원적이지."
"똥에 무슨 고차원 저 차원이 있단 말이여?"
"소설 속 주인공은 서울의 종본탑(宗本塔), 즉 지금의 탑골공원 주변에 살면서 매일 마을의 똥을 져 나르는 일을 했고, 늙은 일꾼을 ‘항수’라 했어. 그런데 그의 성이 엄이어서 ‘엄항수’라고 불렀다네. 그가 수거해 가는 똥의 종류는 말똥, 쇠똥, 닭, 개, 거위 따위의 똥과, 입회령(돼지 똥), 좌반룡(左攀龍;사람 똥), 완월사(玩月沙;토끼 똥), 백정향(白丁香;참새 똥) 따위로 다양했는데, 그는 그 똥을 마치 구슬처럼 여겼다는 것이야. 그리고, 왕십리의 배추, 살곶이다리의 무, 석교(石郊)의 가지, 오이, 수박, 호박, 연희궁의 고추, 마늘, 부추, 파, 염교 청파의 물미나리, 이태인(이태원)의 토란 따위를 심는 밭들은 그중 상(上)의 상을 골라 썼는데, 그들이 모두 ‘엄항수’의 똥을 써서 기름지고 살지고 평평하고 풍요로워, 해마다 육천 냥이나 되는 돈을 벌었다는 것이지."
"그럴 리가... 그렇다면 똥꿈을 꾸면 재물이 생긴다는 말이 거기서 나온 건가?"
"그건 아닌 것 같은데... 그래도 이 소설을 보면 당시 조선 사회, 특히 한성과 같은 도시의 모습을 그려 볼 수는 있지 않겠어? 도시에서의 배설물의 처리는 골칫거리였을거야. 국가가 나서지 않으면 아무도 하고 싶지 않은 똥 치우는 일을 해야 했을 터인데, 엄항수는 이러한 도시화의 과정에서 새롭게 생겨난 지금의 분뇨 수거 차와 같은 기능을 담당한 것으로 생각해 볼 수 있지 않겠나?"
"그거야 그런데, 그런 기능을 국가에서 하지 않았을까? 특히 일본은 정부가 그런 일을 했을 것 같기도 한데.. 워낙 깔끔을 떠니..."
"엄항수와 비슷한 사례가 일본에도 있기는 해. 물론 엄항수가 살던 시대와는 백여 년 뒤에 일이긴 한데... 1890년대 일본의 농부들은 도쿄에 거주하는 부잣집 남자의 똥을 돈을 내고 구입했더라고. 물론 거름으로 사용하기 위해서였지. 구매 조건이 부잣집 남자의 똥이라는 것이 좀 특이한데, 당시에는 남성이 여성보다 더 좋은 음식을 먹었고 남성이 배설하는 똥에 더 영양가가 많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는 거야. (Economies of Excrement : Public Health and Urban Planning in Meiji Japan, Anthony Walsh, 2009. Santa Clara University Undergraduate Journal of History, Series II, Volume 14, Article 9 참조). 게다가 당시 일본 귀족의 집 구조는 남녀유별(男女有別)을 강조하던 조선의 사대부 집과 같이 여성과 남성의 화장실을 따로 두어 ‘순수’한 부잣집 남성의 똥을 선택하여 구매하기 편리했다고 하네."
"똥으로 남녀 차별을 해? 그런 측면에서 보면 엄항수는 동물과 사람의 똥을 다 분류해서 다양성과 포용성을 모두 이룬 대단한 철학자였구먼. 그러니 이토가 이야기 한 똥 천지가 어쩌고 하면서 미개한 조선을 이야기하려고 했다면 시대착오적이었다고 밖에 못하겠어. 결국 우리가 고민하고 있는 일본에 의한 근대화라는 것은 결국 외형적 변화에 기댄 껍데기일 뿐이라는 생각이 점점 확신이 되어간단 말이지."
"외형적인 변화는 결국에는 시간 문제일 뿐 모든 세상이 다 마주치는 일이지. 그 외형을 단단히 받쳐줄 수 있는 알맹이가 중요한 것이지. 쓰레기 냄새를 꽃 향기로 변화시킬 줄 아닌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이니 그런 철학자가 있었어도 이상하지 않아 ㅎㅎ.. 거의 다 왔다. 말을 많이해서 그런가 걸어서 그런가 모르지만 슬슬 배가 고파지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