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6화, 키플링의 정당화와 손순효의 정당성...

청계천 로망스

by 초부정수


"키플링이라는 이름 들어봤나?"


"이 미국인은 아직도 시차 적응이 안 된 모양이구만. 새벽부터 목포까지 가서 온종일 걸어 다니고 저녁에 술 도 한 잔 해서 잠 좀 자면서 가려던 참인데, 갑자기 가방은 뭐 하려고? 고릴라 인형 달린 그거?"


데이비드의 뜬금없는 물음에 조용히 잠을 청하던 이안이 투덜댄다.


"Take up the White Men's burden..

Send forth the best ye breed,,,"


"뜬금없는데, 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거야? 데이비드가 취하면 저러나?"


필립은 데이비드가 늘 혼자서 중얼거리는 버릇이 있는 것을 알고 있어 지금 그가 무슨 말을 하건 개의치 않았지만, 그의 버릇을 모르는 이안으로서는 무슨 답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데이비드는 고등학생일 때 주재원으로 파견된 아버지를 따라 미국으로 이주했었는데, 지금과 달리 당시의 캘리포니아의 샌디에이고는 부자 백인들 동네였기 때문에 아시아인은 물론이고 유색인종을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고 했다. 어린 동생들과 달리 그는 한국적 정서와 문화에서 자유롭지 못하던 데이비드는 한창 호르몬 충만하고 한국을 전혀 모르던 백인 학생들 사이에서 조금 외로웠던 모양이다. 욕실에서 거울을 보며, 또는 방에서 벽을 보며 혼자 중얼거리는 버릇이 생겼다고 했다. 필립은 데이비드가 또 혼자 중얼거리는 중인 줄 알았다,


"나 전혀 안 취했어. 오히려 너무 정신이 멀쩡한걸.. 그저 당신들이 백인의 책무라는 시를 들어 본 적이 있는지 궁금해서 물어본 것이지."


"백인의 책무? 뭐 그런 이상한 제목의 시가 있다니?" 데이비드는 혼잣말을 한 것이 아닌 모양이다...


"백인의 책무라? 뭐 선탠을 열심히 해서 좀 건강해 보이게 하는 것 아닌가? 간혹 미국이나 유럽 사람들 보면 동네에서도 선탠을 많이 하던데..." 이안은 백인의 책무라는 것이 따로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해 본 일이 없었다. 이는 필립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선탠 같은 것은 말이 안 되니, 데이비드가 할 말이 있나 싶다.


"돌리지 말고 빨리 말해보시지. 그게 뭔데?"


"오늘 유달산에서 이런저런 생각이 들었는데, 19세기 밀에 러디어드 키플링_Rudyard Kipling이라는 영국사람이 The White Men's Burdern이라는 시를 썼다는 것이 갑자기 기억나더라고. 외울 만한 시는 아닌데, 내용이 백인은 백인이 아닌 유색인종을 문명화하고 발전시켜야 할 도덕적 의무가 있는데, 그것이 귀찮고 성가신 일이라고 해도 해야 하는 것이 백인으로서의 책임이기 때문에, 식민지화를 해서 그들을 인간답게 살도록 해 주어야 한다는 것이지."


"뭔 소리여 그게? 말이 되냐?" 필립은 그런 내용으로 시를 쓸 수 있다는 것이 더 이해할 수 없었다. 시를 쓰는 작가는 예술가로 인간과 자연의 존엄성을 이해하고 존경하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해 왔기 때문이다.


"지금은 물론 전혀 말이 안 되지만, 당시에는 그냥 그랬지. 사실 미국이 필리핀을 식민지화하는데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쓰인 시이기는 하지만, 당시 제국주의 국가들의 인식이 어떠했는지는 충분히 알 수 있는 것이지."


"듣고 보니 어디선가 들어본 것 같기도 하고, 전혀 생소한 이야기는 아니구먼. 제국주의 프랑스에서는 미씨옹 시빌리자트리스_mission Civilisatrice라는 용어를 사용했었지. 소위 문명화 사명이라고 해서 계몽주의와 기독교의 보편주의를 서양문명의 보편적 진보라는 생각을 가지고 식민지에 문명, 교육, 기독교를 보급해야 한다는 것이 사명이라고 했었지."


이안의 이야기에 필립도 생각나는 것이 있었다.


"그렇구먼. 원류는 프랑스였다는 말인데, 나는 야마토 미씨용 시빌리자트리스_Yamato Mission Civilisatrice라고 하는 말을 들어 본 적이 있지. 그때는 약간 욕같이 들리기도 하고, 그저 일본인들이 식민지 근대화니 대동아 공영이니 하면서 자기 멋대로 만들어 낸 말인 줄 알고 그저 웃고 넘겼었는데 지금 보니까 다 한통속이었던 것이구만.“


데이비드의 키플링 시에서 비롯된 짧은 대화는 근본적인 제국주의의 한계가 무엇인지로 이어졌다.


"내가 처음에 미국에 갔을 때는 친구를 사귀는 것도 그리 간단치 않아서 집에서 하루 종일 영화를 보면서 영어도 익히고 그랬는데 말이야.. 당신들도 영화 미션(Mission) 봤지? 처음 그 영화를 보았을 때는 굉장히 아름답고 성스러움이 넘치는 영화라는 생각이 들었지. 예수회 선교사들이 아마존의 원주민들에게 문명을 알리고 기독교를 전파하기 위해 희생하는 삶, 그리고 그들의 희생적인 삶을 극적으로 부각한 음악.. 특히 요새는 넬라판타지아로 더 잘 알려진 가브리엘의 오보에 곡은 엄청났어. 그런데 말이지..."


미씨옹 시빌리자트리스라는 말을 접한 데이비드는 영화 미션이 생각났다. 그리고, 가브리엘이라는 선교사 개인의 종교적 성스러움은 존중받아 마땅하지만, 근본적으로는 제국주의 중심의 서구적 구원서사에 미개한 원주민을 종속시켰다는 한계를 벗어날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그의 생각을 친구들에게 설명한 데이비드는 한 가지 질문을 했다.


"그래서 말인데... 우리가 청계천을 따라 걸으면서, 또 덕수궁에서도 여러 이야기를 했잖아? 저녁에 소주도 한잔 하면서 더 많은 이야기를 했는데 조선이 영화 미션에서 표현된 아마존 원주민과 같은 수준의 미개한 나라는 아니었지 않나? 오히려 정신적으로 물질적 문명과 문화의 수준이 꽤 높았던 나라인데, 어째서 아마존의 원주민과 같이 문명개화의 대상이 되어야만 했을까? 목포의 근대문화유산거리 또한 문명개화의 결과라고 보이지는 않는데 말이지. 그리고 더 궁금한 것은 어째서 조선과 같은 나라의 사람들에게 저지른 일본의 만행은 이제 전 세계적으로도 익히 잘 알려져 있는 반면에 영화 미션의 가브리엘 사제와 같은 사람과 비슷한 일본인이 있었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는데, 일본은 어째서 아직도 자신들이 저지른 극악한 행위들에 대해 사과를 하지 않는 거야?"


이안과 필립은 데이비드의 질문이 간단하지만 간단히 이야기할 수 있는 주제가 아님을 직관적으로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두 사람 모두 어디서부터 어떻게 이야기를 하는 것이 맞는지에 대해서도 감을 잡기 어려웠다. 그저 일본은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 사과를 하지 않는 나라이고, 그래서 한국과의 역사 문제는 해결이 불가능한 일이라 치부하여 깊게 생각을 해 보지 않았던 것 같다. 일반인들이야 서로의 국가를 여행하며 좋은 시간을 보내고 있고, 매년 교과서 문제나 독도 문제가 불거질 때, 또는 한국의 여행객이 일본에서 차별을 받은 뉴스들 접할 때나 731 부대의 또 다른 반인류적인 잔악성이 발견될 때에 한 번씩 분노하면 되는 일이었다. 수 십 년을 그렇게 해 온 탓인지 일본이 엮인 이야기는 달라진 것이 없지만, 확실히 관계가 더 나빠졌다고 할 수도 없다. 하지만, 한 번쯤은 왜 이 일은 변하지 않고 계속되는 것인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그거 생각해 보지 않아서 어려운 질문이긴 한데, 생각해 보면 또 쉬울지도 모르지. 다만, 지금 여기 조용한 SRT 객차 안에서 할 수 있는 말은 아닌 것 같네. 필립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나도 어쩌면 쉬울 수도 있을 것 같기는 한데, 언뜻 생각을 해봐도 몇 가지 복잡한 일들을 연결해봐야 할 것 같네. 미션 영화 같은 것이면 좋겠지만, 그런 것은 아닌 것 같고... 2차 대전 이후의 독일과 태평양전쟁 이후의 일본 상황을 좀 확인해 봐야 할 것 같구먼. 어차피 일어난 일은 일어난 일이고, 그 일들이 없었으면 지금 이런 이야기를 할 이유도 없을 테니 말이야."


"그건 나도 동의해야 할 것 같구먼. 뉘른베르크, 도쿄, 예루살렘 이 세 도시를 중심으로 우리가 질문을 하는 것이 어쩌면 좋은 술안주가 될 것 같네만.." 이안은 떡 본 김에 제사 지내려는 심산이다.


"이안은 자기가 손 순효인줄 아는데, 그 정도는 아니라는 거 알지?"

이안의 술안주 이야기에 필립은 덩달아 반어적인 동의를 하지만, 손순효가 누구인지 몰라 멀뚱한 표정을 하고 있는 데이비드에게 필립이 간단히 손순효에 대해 설명을 해야 했다.


"손순효는 조선 초기의 청렴하기로 이름이 높았던 문신인데, 성리학에 밝고 문장이 뛰어났지만 술을 좋아하기로 유명했다고 해. 어느 날 성종이 그를 불러 중국에 보낼 국서를 지으라 명을 했는데, 손순효가 이미 그때 만취 상태였다는 것이야. 머리끝까지 열을 받은 성종이 다른 사람을 부르려 하자 손순효가 개인적인 사정이 있어 술을 마셨지만 자신이 일을 하겠다고 간청을 했지. 성종이 시험 삼아 혼을 내주려고 붓과 벼루를 내주었는데, 그가 거침없이 일필휘지로 한 글자도 틀리지 않은 훌륭한 문장을 풀어놓은 것이야. 그 모습을 본 성종이 뭐라고 했을 것 같어?"


"더 열받지 않았을까?"


"그러니까 너는 왕이 될 수 없는거여. 괘씸하긴 했지만 그 정신력을 높이사서 취한 정신이 더 맑다며 은 잔을 하나 하사하면서 술은 건강에 좋지 않으니 하루에 이 한 잔만 마시라고 명했어. 그런데, 손순효가 보기에 그 잔이 너무 작은 거야. 그래서 그 잔을 얇게 두드려 펴서 사발만 한 잔을 만들어 독주를 그 잔으로 한 잔씩만 마셨지."


"성종에게 걸렸을 것 같은데, 독주를 한 사발씩 마시면 또 취할 테니..."


"당연히 걸렸지. 화가 난 성종이 잔을 가져와 보라 했더니 사발을 가져오네. 그리고 한다는 말이 주상께서 주신 술잔이 너무 작아 늘리기는 했지만 은을 더하지는 않았다고 하는 것이야.. 그러니 거기에 뭐라고 하겠어? 성종이 졌지. 웃으면서 앞으로 자기의 속이 작아 보이면 그 잔과 같이 두드려 넓게 펴달라고 했다는 거야. 이안이는 자기가 마치 손순효인 것으로 착각하는데, 내가 보기에 그 정도는 아녀."


이런 대화를 하던 왕과 신하가 살던 나라가 사농공상의 사회적 위계를 가진 전근대적 신분제 사회이기 때문에 야마토 미씨옹 시빌리자트리스의 대상이어야 했다는 것을 데이비드는 쉽게 동의할 수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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