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계천 로망스
향기도 특별한 맛도 나지 않는 보드카에 탄산수가 섞인 데이비드의 조합은 도쿄 전범 재판에 초대받지 못한 한국과 같이 알코올의 존재 의미를 알 수 없을 정도로 무미(無味)하지만 한 잔을 미처 비우기도 전에 취기가 올랐다. 그리고 그 취기는 마치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네 개의 마지막 노래' 중 <잠들 때>의 가락과 같이 천천히 그러나 높이 날아올랐다.
"미국인이 어찌 보드카에 탄산수를 추천했는지 모르겠다만, 이 맛은 마치 전범 재판에 초대조차 받지 못했을 정도로 무색무취했던 한국을 떠올릴 정도로 아무런 맛도 나지 않네. 그 이유 때문에 이 술을 추천한 거야?"
"필립이처럼 그렇게까지 생각한 것은 아니고, 다만 그 이야기를 듣다 보니 그저 떠오른 것일 뿐이지. 결과적으로는 그렇게 되었다고 해야겠구먼."
"무색무취이긴 한데, 취기는 오르는 것 역시 한국과 닮았다고 해야겠어. 다카하시 도루의 푸념처럼 한국인들은 말라버린 청계천과 같아 보이지만 밑으로 흐르는 물줄기가 어디에서나 튀어나와 결국 큰 강이 되어 흐르는 동력이 되는 것과도 닮았다는 생각이 들긴 해. 그래도 너무 맛이 없구먼. 뭐 안줏거리라도 좀 있어야 하지 않겠나?" 이안은 술맛이 너무 맹숭맹숭하여 물을 마시며 취하는 느낌이 그리 반갑지 않다. 차라리 테킬라 한 잔과 약간의 소금이 그립다.
"그럼 룸 서비스에 소금 좀 달라고 할까?'
"내버려 둬. 룸 서비스도 소금만 가져다 달라고 하면 기분 나쁘지 않겠어? 그냥 마시자고. 탄산 느낌이 달지 않은 사이다 같기도 하고... 혹시 나중에 미국에 돌아가면 인도 식품 파는 가게에 가서 차트 마살라_Chaat Masala라고 하는 가루를 사서 얇게 채 썰은 생강에 적당히 뿌리고 그 위에 레몬 즙을 넣어서 손가락으로 조금씩 집어 먹으면 이 탄산 보드카의 안주로 간단하지만 꽤 효과적일 것이다.."
"차트 마살라? 인도 향신료?"
"그래 인도 향신료. 재료는 챗 지피티에 물어보던지. 느낌에 이 술과 딱일 것 같다."
데이비드는 '차트 마살라'라는 것에 대해 들으면서 어쩌면 어두웠던 근현대 한국의 어느 시점에 차트 마살라와 같은 강하고 여운이 오래 남는 향신료와 같은 순간이 있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의 한국은 데이비드가 기억하던 한국과는 많이 다르며, 이젠 데이비드의 자녀와 같이 미국에서 태어난 젊은 세대들은 부모가 이렇게 좋은 한국에서 살지 않고 미국으로 이민을 온 것에 대한 불평을 늘어놓을 정도가 되었다고 한다. 데이비드의 말이 전혀 근거가 없다고 할 수 없는데, 이미 한국의 젊은이들은 소위 미국과 같은 선진국 이라하는 나라에 여행은 가도 취업이나 해외 파견과 같은 인생에서 어쩌면 꽤 중요해 보이는 일에 대한 반응은 오히려 단순해졌다...
"굳이...? 왜?"
"지금의 한국을 보면 태평양 전쟁 이후의 도쿄 전범재판에 한국인 판사가 한 명도 배정되지 않았다는 것이 잘 이해되지 않아. 당시에 아무리 한국이 그 어느 나라의 안중에는 없었다고 하더라도 한국인들이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었다는 것은 상상이 안되거든.."
"아무것도 안 하긴... 나는 많은 일들을 했다고 생각해. 잠깐 이야기했었지만, 2차 대전 후의 뉘른베르크 재판과 , 도쿄 전범재판, 그리고 이스라엘의 예루살렘에서의 아이히만 재판을 기억해 보자고..."
필립은 전쟁과 관련한 범죄는 A급, B급, C급으로 대개 구별이 되며, A급 범죄는 침략전쟁의 계획을 수립하고 수행하는 것, B급 범죄는 포로학대와 민간인 살해와 같은 전쟁범죄, 그리고 C급 범죄는 인간의 도리와 관련된 반 인륜적 죄로 나눌 수 있다며 이야기를 이어간다. 뉘른베르크 재판(1945~46)에서는 괴링을 포함한 나치 지도부의 A급 전범 24명을 기소했고, 도쿄 재판(1946~48)에서는 천황을 제외한 일본의 A급 전범 28명을 기소했으며, 1961년의 아이히만 재판은 이스라엘 국내법인 1950년 나치 및 협력자 처벌법에 의거하여 예수살렘 지방법원에서 아이히만이라는 특정 개인에 대한 홀로코스트 실행 책임을 묻는 재판을 진행했다. 그런데, 이 모든 재판이 가지고 있는 공통적인 문제는 대상이 되는 범죄를 저지른 사람들에게 적용된 법이 실제로 그 일이 벌어지고 있던 때에는 존재하지도 않았던 법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전쟁의 승자가 패자를 단죄하기 위해 없던 법을 만들어 법을 소급 적용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에 재판 자체의 정당성에 치명적인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한국인들은 이런 일말의 의문조차 남기지 않았다는 것이 평소의 필립을 생각하면 다소 과격하지만 이해가 안 되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 말이지, 한국인들은 모든 일이 지난 후에 재판을 하는 선택을 하기 전에 실제로 상황이 발생되고 있던 그 시대에 시의 적절한 재판을 해 나갔기 때문에 역사적으로 하나마나 한 소모적 논쟁의 가능성 자체를 없애버렸지."
"뭔 소리? 취해서 하는 말은 아닌 것 같긴 한데, 누구한테서도 들어 본 적이 없는 말인 것 같다만..."
"다들 아는 일인데, 뭘 그리 새삼스럽게 묻나? 그중에서도 아마 가자 상징적인 재판이라고 하면 이토 히로부미에 대한 재판이 아닐까 싶네만..."
"이등박문? 그 인사에 대한 재판을 했다니 아무래도 취한 것 아닌가?"
"이등박문이 이토 히로부미야?" 데이비드는 언젠가부터 일본 이름과 일본 이름을 한국식으로 부르는 것이 간혹 헷갈린다.
"이등박문_伊藤 博文 ...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에서 사살한 바로 그자가 이토 히로부미인데, 일본은 그가 죽은 후에 그를 기리기 위해 서울의 장충단에 박문사(博文寺)라는 절을 만들고, 그 사찰의 정문으로 현재 경희궁의 정문인 흥화문(興化門)을 가져다가 두었던 적도 있지. 그리고 그 문이 한동안 박문사를 헐고 세워진 신라호텔의 정문으로 사용되기도 했어."
데이비드는 옛 가수 배호의 [안개 낀 장충단 공원]이라는 노래도 있듯이 그저 단순한 도심의 공원으로 알고 있었지만, 이안의 설명에 따르면 원래 장충단은 고종이 명성황후가 살해된 을미사변 때 순국한 충신과 열사들의 제사를 위해 지은 제단으로 대한제국의 최초 국립현충원과 같은 곳이었다. 이곳에 죽은 이토 히로부미를 위한 절을 짓고, 또 그 일대를 공원으로 만들어서 음악회를 열기도 했다니 제국주의 일본의 심보가 참으로 야속하다 못해 터무니없다 싶다.
"어이 친구, 이안이.. 또 다른 길로 가려고 채비 차렸다니?" 필립은 늦은 시간에 이야기가 먼 길을 돌아갈까 걱정이 되어 이안의 말을 막아야 했다.
"사람의 일이라는 것들이 다 이렇게 저렇게 연결이 되는 것이 자연스러운 거 아니냐... 나는 이등박문과 박문사, 경희궁, 신라호텔, 장충단에 대해 새로운 것을 알게 되었으니 그리 나쁘지는 않아. 그런데, 그렇다면 이토 히로부미를 재판했다는 것은 점점 더 이해할 수 없는데..."
"그게 그렇지 않다고.. 이토는 두 번이나 재판에 회부되어 처벌을 받았단 말이야. 처음은 하얼빈 역에서 이토를 권총으로 쏘아 죽인 것인데, 일본의 최고 지도층으로서 이와쿠라 사절단 시절부터 오랜 세월에 걸쳐 조선을 손에 넣기 위해 계획하고 실행한 전쟁에 대한 죄, 그리고 우리가 너무도 잘 알고 있는 수많은 반 인류적 범죄에 대한 재판을 전 세계가 보는 앞에서 공개적으로 재판에 회부한 동시에 사형을 구형하고 집행한 아주 명확한 재판이라고 할 수 있지."
"그것을 어찌 재판이라 할 수 있나? 재판이라면 그래도 최소한 갖춰야 할 것들이 있는 거 아닌가?"
"그렇지. 그래서 재판이라 하는 건데, 우선 피고 이토 히로부미는 제국주의 침략의 상징이었지. 안중근 의사는 대한의 독립정신을 대변하고 침략과 불의에 대한 역사의 검사였으며, 배심원은 세계의 여론과 후대의 역사였던 것이지. 재판장은 역사의 정의와 민족의 양심을 대표하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였고.. 그러니 재판의 모든 요건이 갖추어진 것이야."
"어째 늘 필립 이 친구의 말을 듣다 보면 그런가 싶다가도 또 나중에 생각하면 헷갈린단 말이야. 뭐에 홀린 것 같어. 그렇게 볼 수도 있지만, 일본의 입장에서는 그렇게 생각하기 쉽지 않을 것인데..."
"그래서 천주교 신자였던 토마스 (도마) 안중근 의사가 적임이었던 것이지. 인간들의 사고 체계에서는 늘 해결할 수 없는 분쟁이 있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인류는 늘 신의 힘에 의존해 왔지 않나? 안중근 의사는 이토를 저격하기 전에 하느님에게 기도를 올렸고, 권총에 장전된 총알 7발은 모두 탄두에 십자가를 새겨 넣었단 말이야. 이 정도면 이해가 되겠나?"
데이비드와 이안은 어쩐지 필립의 말을 믿어봐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이미 첫 번째 재판에서 사형에 처해진 이토에 대한 두 번째 재판이 궁금하다.
"어때, 이젠 두 번째 재판이 궁금하지 않나? 그 두 번째는 당시 일본의 지배하고 있던 뤼순의 뤼순지방법원에서 있었지. 다들 잘 알고 있는 일 아닌가?"
"알지. 그 재판은 일본에 의하면 테러리스트 안중근과 조선의 의병들에 대한 재판이었잖어.. 이토에 대한 재판은 아니었지."
"형식은 그랬지. 다만, 그 재판의 실체와 결과는 일본의 의도와는 달랐어. 다들 잘 알지 않나? 안중근 의사가 법정에서 한 말들..."
이안은 안중근 의사의 뤼순법정에서의 발언을 요약했다.
나는 한국 의병의 참모 중장으로서 독립전쟁에 참여해 이토를 죽였고 참모 중장으로 계획한 것인데 이 법원 공판장에서 심문받는다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로 시작된 그의 발언은 이렇다.
1. 한국의 국권을 침탈한 죄 : 한일의정서와 을사늑약을 강제로 체결해 조선의 자주권을 빼앗음.
2. 한국 황제를 폐위시킨 죄 : 고종 황제를 강제로 퇴위시켜 국체를 훼손함.
3. 한국 황태자를 일본으로 끌고 간 죄 : 황태자(순종)를 일본으로 유학시켜 인질로 삼음.
4. 한국의 각 부(府)·군(郡)에 일본군을 주둔시킨 죄 : 군사적 강압으로 조선을 통제함.
5. 한국 군대를 해산시킨 죄 : 1907년 군대 해산으로 자위권을 빼앗고 의병이 발생하게 만듦.
6. 한국인의 언론과 출판의 자유를 빼앗은 죄 : 검열과 탄압으로 지식인과 민중의 자유를 말살함.
7. 한국 교육을 망친 죄 : 식민 교육으로 민족정신을 억압하고 일본화를 강요함.
8. 한국인의 생명과 재산을 침해한 죄 : 무단 통치와 강탈, 고문, 처형 등으로 민중을 학살함.
9. 한국의 재정을 장악한 죄 : 재정고문제 등으로 경제 주권을 일본이 탈취함.
10. 한국의 철도·광산·항만을 강탈한 죄 : 경제적 기반과 자원을 식민지 수탈의 도구로 삼음.
11. 한국의 외교권을 빼앗은 죄 : 외교권 박탈로 국제사회에서 고립시킴.
12. 한국의 사법권을 침탈한 죄 : 일본 영사재판권 등으로 자국민 범죄도 처벌하지 않음.
13. 의병을 탄압한 죄 : 독립운동가와 의병들을 무참히 학살함.
14. 동양 평화를 파괴한 죄 : 조선 침략과 러일전쟁으로 동양의 안정과 평화를 깨뜨림.
15. 하늘의 뜻과 인륜을 거역한 죄 : 인간의 도리를 저버리고, 제국주의 침략으로 인류의 정의를 짓밟음.
"어때, 이 정도면 피고가 아니라 검사 아니냐?"
"듣고 보니 또 그런 것 같구먼. 결국 그 법정은 이미 공정한 재판장이 없이 피고를 이미 정해 놓은 재판이었지만, 안중근 의사는 오히려 그 법정을 이용해서 '동양평화론'을 설파하고 자긴의 행위를 국제 정의의 이름으로 변론한 것이니, 어쩌면 실질적으로 이토로 대표되는 일본 제국주의를 심판한 검사의 자리에 앉아있었던 것이라는 말이군. 네 생각이 밑도 끝도 없지만 그럴듯하네."
필립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데이비드는 어쩌면 이런 일이 지금도 일어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밑도 끝도 없다고 하기에는 현실이 조금 불편하네. 2003년이던가.., 하여간 2000년도 초에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에 대한 재판이 있었잖아. 그런데, 그 재판의 직접적인 원인인 이라크 전쟁의 명분과 결과가 너무 이상하잖아. 미국은 원래 9/11 테러를 이라크가 지원했고, 대량살상무기를 보유하고 있다는 것을 이유로 유엔 안보리의 공식 승인도 없이 이라크를 공격했는데 대량살상무기의 근거가 허위로 밝혀졌지. 게다가 사담 후세인은 세속적 독재자여서 알카에다와 같은 이슬람 극단주의자들과는 이념적으로 대립했으니 테러를 지원했다는 것도 허황된 정보일 뿐이야. 물론 미국은 이라크의 국민들을 독재로부터 구한다는 명분도 내세웠지만, 이것은 일본이 미개한 조선을 개화시키기 위해 침략한다는 것과 그 맥락이 같은 것이지."
"그러니까 네 말은, 그런 미국이 전쟁을 일으키고 전쟁에서 이긴 후에 또다시 승자의 법정을 꾸려서 미국의 이익만 가져갔다는 말이구만. 제국주의시대와 똑 같이 말이야. 사실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이 전쟁 범죄자가 되어야 하는데 그는 어떤 식으로든 전쟁 영웅과 같이 되어버렸잖아."
"그러니까 이런 국제법 같은 것은 강자들이 자기들 입 맛에 맞게 적용하면 그만이란 말이야. 사실 이런 이야기를 하면 음모론자니 뭐니 하기도 하는데, 이라크 전쟁 역시 미국의 경제적, 정치적 패권을 강화하기 위한 방편이었다는 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잖아."
"그렇지, 이라크는 세계 2위의 석유 매장량을 가진 나라인데 전쟁 이후에 석유 개발권을 전부 ExxonMobile, BP, Shell 같은 서방 석유회사들이 다 가져갔잖아."
"그런 이야기하면 한도 끝도 없지 뭐.. 사실 이라크 전쟁과 관련된 걸프전 때문에 나는 꽤 괜찮은 플랜트 수출도 할 수 있었고, 이라크 재건 사업도 꽤 쏠쏠했으니 솔직히 이런 논의에서 그렇게 자유롭지는 않아.. 조금 씁쓸하지. 마치 현찰이 없어서 월급을 못주는 사장이 미안해서 카드로 상품권을 사서 주는 것을 받아먹은 그런 느낌과 비슷하다고 해야 하나... 뭐 그렇다고.. "
"그래도 착한 사장이네... 이제 다들 좀 취했구만, 천천히 그러나 확실히 ㅎㅎ. 오늘은 이만 하고 다들 집에 가서 자는 것이 좋겠구만. 취했다고 가다가 청계천에 볼일 보면 안된다..."
"우리 어릴 때와 달라져서 도저히 그럴 수 없는 곳이 된 것 모른다니? 자라...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