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계천 로망스
"이 늦은 시간에 술을 깬다는 핑계로 냉면에 갈비를 먹겠다는 건 좀 전 근대적인 삶의 방식 아니냐? 일제 강점기에는 다이어트라는 말도 없었을 듯하고 먹거리도 지금 같지 않았을 것인데... 무엇보다도 그때의 가리구이라는 것도 그리 비싼 음식은 아니지 않았나 싶고, 지금 갈비는 이미 배가 부른 상태에서 먹기에는 너무 사치스럽잖아. 사람이 환경에 적응하면서 발전해야 하는 것이지..."
"생각해 보니 그러네. 게다가 지금 시간에 어디 가서 좋은 냉면과 갈비를 먹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구먼. 그래도 전 근대적 삶이라는 건 좀 너무 한 지적질 아니냐?"
데이비드는 평소 같으면 잠자리에 들 시간에 냉면과 갈비를 먹는 짓은 지금처럼 전쟁이나 재해로 인한 사망보다 비만에 의한 사망자 수가 더 많아진 시대에서는 분명히 전 근대적이라 할 수 있다며 다른 방법을 찾아보자 하는데...
"다른 방법이라면 뭘 말하는 것이야?"
"밥도 충분히 먹었고 술도 어느 정도 되었으니 더 때려 붓는 것은 야만적인 짓이 아니겠어? 그러니까 이제는 각자 마시고 싶은 술을 천천히 즐기면서 대화를 하자고. 물론 안주는 필요하면 조금 곁들이는 정도로 말이야."
필립과 이안은 데이비드의 생각이 그리 나빠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들이 알고 있는 한국에서는 그리 쉽게 찾아볼 수 있는 환경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굳이 따져보자면 필립과 이안 세대의 사람들에게는 상당히 어색한 분위기일 수밖에 없다. 한국에서 술이란 반주(飯酒)의 성격이 강해서 식사와의 조화가 중요하고 음식의 ‘맛을 돋우는 조미료’ 같은 역할로 음식 없이 술만 마시는 것은 예의에 어긋난 일로 여겨지기도 하는데, 데이비드가 이야기하는 음주법은 술이 식사와 분리된 기호 식품으로 맛, 향, 품질 자체를 즐기는 대상이어서 술이 음식의 일부가 아니라 독립된 취향의 표현이라는 성격이 강한 다분히 서구적 사고방식의 술 문화라는 생각이 들었다.
"술만 때려붓자고 누가 그러디? 술이란 뭔가 같이 먹을 음식이 필요하다는 것이지. 그러다 보면 술도 깨고 그런 거란 말이여. 그래서 반주라고 하는 거잖아.. 반주(飯酒)가 뭔지는 알지? 한국에서 밥을 같이 먹는 것은 단순히 먹는 행위가 아니라 인간관계의 윤활유와 같아서 정(情)과 예(禮)의 실천이기도 한 것이지. 술은 자연스럽게 따라가는 것이고..."
"그래서 한국 사람들이 맨날 묻는 게 밥 먹었냐, 언제 밥이나 한 번 먹자 그러는 줄은 아는데, 솔직히 진짜로 그러는 것은 아니잖어.. 그냥 의례적인 인사치레 정도지. 그리고 요즈음에는 혼술도 많이들 하더구먼..."
그건 또 데이비드의 말이 맞는 것 같다. 시대와 사람들의 생각이 달라진 것도 사실이다. 다만, 소주나 막걸리 같은 술은 음식이랑 같이 마셔야 제 맛이 나는데, 그렇지 않고 술만 마신다고 하면 소주보다는 위스키와 같이 강한 맛이 나는 술이어야 한다. 그래서인지 위스키는 그 종류도 많고 맛과 가격도 천차만별이어서 함께 마셔도 서로 공감을 하기란 쉽지 않다. 물론 서로 술맛에 반드시 공감을 할 필요는 없지만 어쩐지 허전한 느낌이 들 것 같은 이안이다.
"돌아가신 엄마가 술은 섞어 마시지 말라고 했었는데, 정 그렇다면 한 번 간단히 새로운 시도를 해 볼까? 취하지 않으면서 취하는 정도로 뭘 어떻게 하면 좋겠나?"
"강한 맛이 아니어도, 취하면서도 취하지 않는 술이 있기는 하지. 사람이 가끔 그러고 싶을 때가 있는데, 난 그럴 경우에 이런 방법을 쓰지. 우선 맥주 컵에다 향이 없는 보드카 30ml를 붓고, 그 위에 컵을 다 채울 만큼의 향기 없는 탄산수를 채워. 그리고, 혹시 레몬이 있으면 얇게 썰어서 넣거나 레몬즙을 두어 방울 첨가하고 섞어서 마시는 거야. 이게 술은 술이어서 취하기는 하는데 오래 마실 수 있고 꽤 천천히 취한단 말이지."
필립과 이안은 그게 도무지 무슨 맛인지 알 수 없다는 표정이다.
"술 한잔 하는데 뭐 그렇게까지 한다니? 그리고 술도 아무 맛이 안 날 것 같은데 안주도 없다고?"
"아니 당신들이 한국이 도쿄전범재판에서 빠진 이유에 대해 이야기하다가 이제는 한국이 언제부터 국가로 인정받게 되었는지에 대한 이야기는 더 무겁다면서 술 한잔 더 하자해서 하는 말이지. 기왕에 이야기할 거면 다음 날 기억은 나야 할 것 아니냐. 그렇다고 술 마시고 커피 마시면 탈수와 요.. 마신 술을 희석해야지.."
"알았는데, 그렇다고 치자고.. 그런데 이 늦은 시간에 안주도 변변치 않게 시키면서 탄산 레몬 보드카 만들어 달라고 하면 해 줄 술 집이 있겠나? 꼰대 소리나 안 들으면 다행일 것 같구만.."
"그런가? 한국의 자본주의는 이 정도로는 안 움직인다는 말이구만. 그럼 뭐 서울 밤하늘의 미세먼지 마시면서 청계천 물소리 들으며 내 호텔 방으로 가자고. 냉장고에 조그만 보드카와 탄산수가 있던데 내가 만들어 주지."
"안주는....??"
필립과 이안은 아무래도 데이비드의 보드카가 미덥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