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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과 소녀 이야기

에세이

by 장순혁

서로의 옆집 살던 소년과 소녀는
서로에게 마지막 남은 가족이었답니다
마지막 남은 동무였답니다

총과 칼을 든 사람들이 거리를 나다녔고
소년과 소녀는 쥐 죽은 듯이 조용하게
집구석으로 파고들었답니다

해가 지고 오늘 같이 별이 환한 밤
소년과 소녀는 그때에야 집에서 나와
텅 빈 거리를 걸을 수 있었답니다

서로의 손을 잡고
우리는 떠나가지 말자고, 끌려가지 말자고
맹세를 했더랬지요

하지만 맹세는 얼마 가지 않아 깨졌습니다
한 손에는 총을 쥐고
반대 손에는 소년과 소녀의 멱살을 잡은
우악스러운 사내들이
그들을 강제로 배에 태웠습니다

소년과 소녀는 끌려갔답니다
둘 다 어딘지 모를 곳으로

망망대해를 건너 도착한 그곳은
총과 칼이 지배하는 곳이었습니다

땅에는 고통스러운 신음 소리가 가득 묻혀있고
어둠이 지나가도
또 다른 어둠이 허공을 메웠습니다

소년은 총과 칼을 만드는 공장으로,
소녀는 미싱기 돌아가는
먼지 쌓인 자그마한 집으로 갈라졌습니다

시간이 흐르고 소년은
더는 맑은 눈을 가진 소년이 아니게 되었습니다
소녀 또한 마찬가지였지요

소년의 손가락은 공장 기계에 찧어져
두어 개가 비게 되었고
소녀는 많은 먼지를 들이마셔
기침할 때마다 피가 섞여 나왔습니다

공장의 부품이 된 것처럼,
미싱기를 돌리는 기계가 된 것처럼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고
그저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더 많은 시간이 지나
소년과 소녀는 자유의 몸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너무 많이 지난 시간 탓일까
소년과 소녀는 집으로 돌아가지 못했습니다

집으로 가는 길을 잊은 것은 아닙니다
서로를 잊은 것 또한 아닙니다

더는 맑고 순수한 그때의 자신이 아니기에
감히 서로를 찾을 수도,
서로의 집으로 향할 수도 없었습니다

소년과 소녀는 각자 그곳에 머물기로 하였답니다
가족도, 동무도 없는 그곳에,
홀로 놓인 채, 영원히

시간이 지나 죽고 나면
영혼으로나마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요

시간이 지나 죽고 나면
영혼으로나마 서로의 손을 다시 잡을 수 있을까요

소년과 소녀, 아니 청년과 처녀의 이야기는
이렇게 끝이 났답니다
나름 행복한 결말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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