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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순혁 Dec 01. 2024

운명론

에세이

운명이 정해져 있지 않다는 것은 믿지 않습니다
운명이 정해져 있다는 것을 믿는 것이 아니라
운명이 정해져 있지 않다는 것을 믿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하얗고 귀여운 저 토끼의 생이
결국 여우의 송곳니에 목이 부러지고
여우의 새끼들을 위한 피 냄새 풀풀 풍기는 고기로 끝맺어진대도,
그것을 토끼가 알더라도 그것은 별로 토끼의 죽음에 관하여
의미를 더하거나, 덜해지지 않을 수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토끼의 자그마한 뇌가 스스로 전기자극을 만들어 내어
여우의 사냥 방식에 반하는 행동을 한다 해도
결국에는 다른 여우가 아닌 그 여우에 의하여 생을 마감하게 됩니다
다른 여우라는 것의 의미는 비단 여우에만 속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알고 계시리라 믿지만
굳이 설명하자면 늑대, 이리, 하이에나 등등의 포식자들도 포함한 것입니다.
굳이, 말 그대로 굳이 설명하자면은 말입니다.
토끼의 어미, 아비, 새끼들까지.  
그 토끼의 죽음에 영향을 끼칠 수 없습니다.
편리하고 특이한 도구들일수록,
다시 말해 유행에 따른 세련된 도구들일수록
결국엔 시대의 흐름에 발맞춰 사라질 테니 말입니다.
단순하고 멍청한, 다시 말해 흔히 말하는 '순수한' 것들일수록 유행을 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단단한 바위 같은 '토끼'가 유연하고 바람 같은 '여우'에 의해 숨이 스러진다는 것입니다.
토끼는 여우에 의해 죽고, 여우는 토끼를 죽이고, 토끼 고기를 새끼들에게 가져다주고,
여우 새끼들은 그 토끼의 고기를 먹고 양분 삼아 자라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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