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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밀 Apr 03. 2024

해이한 날들

이해와 오해의 총칭


 살다 보면 낯선 환경에 제 발로 들어가야 할 때가 있다. 이것이 누군가에겐 넘어야 할 큰 산으로 여겨질 수 있으나 내 경우는 조금 다르다. 새로운 환경을 맞닥뜨릴 때 '일단 해보고 아님 말지 뭐' 정도로 힘 빼고 되도록 가볍게 접근하는 편이다. 손쉽게 해 보는 성향 테스트에서는 외부환경에 대한 개방도가 높다는 해석에 무게가 실린다. 아무래도 목표지향형 보다는 개방형 인간이 여러모로 걸맞다.


 사람(또는 상황)을 지레 경계하지 않는 태도는 다양성을 포괄한다는 측면에서 그만큼 다채롭다는 장점을 갖지만 동시에 어느 정도의 위험성을 동반하는 것도 사실이다.

 늘 촉수를 세우며 예민한 사람들은 보통 나 같은 기질의 사람이 주는 허물없음을 호감으로 받아들이는 경우가 드물지 않게 있다. 건네는 입장에서는 단순히 몸에 밴 행동양식일지라도, 받아들이는 상대가 헤아리기엔 보다 상냥한 해석이 필요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무언가를 지속적으로 유지하기 위한 동력은 애써 장벽을 치지 않던 첫 마음도, 상대(상황)를 알아가는 과정에서 실망한 부차적인 감정을 남몰래 다독이던 마음도 아니다.


 그저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 서로에게 편안할 수 있어야 비로소 관계의 지속이 성립되는 것이다. 무리하게 행동해 보이며 애써 시선과 관심을 환기하지 않아도 되는 낮은 긴장도의 관계, 시시껄렁하게 주고받는 말과 얼굴 안에 상대를 감별하려는 의도가 없는 마음들, 결국 그런 것들이 남는다.


 안전하고 유쾌한 대상에 몰입하다 보면, 위험한 세상을 향한 경계의 끈을 부여잡는 일을 망각하기도  하나 그리 달지 않은 일상을 흔쾌히 소통할 수 있는 힘을 지닌 이들과 함께면 혼란한 세상이 종종 아름답게 느껴지는 순간이 있다.


 타고난 성정인지 후천적으로 획득한 건지 아는 이 하나 없는 무리에도 무리없이 발을 담그고 보는 편이기에, 가끔은 내 기준으로만 타인을 이해하고 염려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새로운 기관에 적응해야 하는 아이의 전쟁 같은 등원으로 하루를 여는 날이면 뜻밖의 혹독함에 한탄하고, 작은 실수에도 남북관계의 긴장 국면을 자아내는 말들 앞에선 마땅한 액션을 취하는 일조차 수선스럽게 느껴진다. 나 와는 분명 다른 것에서 오는 이질감을 어디까지 수용할 것인지 내 몫의 말들을 접었다가 펼쳤다 한다.




 김소연 작가는 <마음사전>에서 "이해란 가장 잘한 오해이고, 오해란 가장 적나라한 이해다."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타인의 방식을 깊이 이해하려 할수록 오해를 불러일으키지만, 결국 그 시도는 가장 잘한 오해이니 다시 오해받더라도 우리는 서로를 헤아려 이해하기로 마음먹는 걸까. 오해야말로 가장 적나라한 이해라고 한다면, 서로 허심탄회한 오해를 주거니 받거니 하다 어느 순간에는 진짜 본질을 관통할 수 있지 않을까. 이해 앞에서는 왜곡 없는 아량을, 오해 앞에서는 회피하지 않는 침착한 일침을 추구하는 편이다.


 더 궁극적으로는 애쓰지 않아도 그저 이해하고 싶어지는 대상이 보다 많아진다면 좋겠다. 한바탕 오해하고 난 뒤에도 이해할 마음이 다시 피어오르는 무해하고도 느슨한 사이 어딘가에서 오래도록 머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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