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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밀 Jul 23. 2022

팬데믹, 우리의 대화는 안녕한가

눈으로 안부

  

 늘 사람들의 얼굴 쓰임에 주목하고 살았다. 그러니까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거나, 순간적으로 볼을 부풀리거나, 못마땅해 입을 삐죽거리거나 하는 행위들은 굳이 부연하지 않아도 현재의 감정 상태를 그대로 드러내는 확실한 신호다. 그땐 그랬다.

 그렇게 눈에 쉬이 읽히는 신호가 입력값이 되면, 그에 따라 행동반경을 넓히거나 좁히거나 아무튼간에 상황에 맞게 대응하면 될 일이었다. 출력값은 다분히 인과적이었다.


 하지만 팬데믹 이후, 모든 얼굴 쓰임은 소통에 일말의 도움이 되지 않았다. 단, '눈'을 제외하고는.




 오직 '아이컨텍'만이 유일한 시대가 도래했다. 이제 사람들은 눈으로 웃고, 눈으로 참고, 이따금 눈으로 욕한다. 눈으로 말하고, 눈으로 듣는다. 눈을 피하는 순간, 대화도 멈췄다. 정적이 늘었다. 눈밖에 난 자는 외면받고, 결국 눈밖에 믿을 게 없는 세상이 되어가는 듯하다.


 마스크 속에는 꽁꽁 숨어 자취를 감춘  개의 표정이 산다. 마음 같아선  안에 가려진 내밀한 감정들을 당장 꺼내어 보이고 싶다. 아니, 들켜도 좋으니 제발 알아줬으면 좋겠다. 눈앞에 보이지 않는다고 사라질 정도로 대수롭지 않다거나 결코 가벼운 마음이 아니다.

 그러다 어떤 날에는 선글라스를 찾는다. 눈부심을 방지해주는 본연의 기능 외에도 요즘처럼 눈쓰임 과부하가 걸릴  마스크의 부차적 기능과 같은 쓰임새를 선글라스 또한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눈도 쉬어가고 싶은 날이 있다.



  

 그럼에도 눈마저 가리면 우리의 대화는 과연 안녕한가  묻고 싶다. 마스크가 바이러스 차단이라는 강력한 주기능 말고도 '선택적 드러내기' 기능면에서 적절히 쓰일   시절도 이제는 호모 사피엔스 시대의  마냥 까마득하게 느껴진다.


 마스크 너머 내 얼굴의 수백 가지 표정들은 여전히 쓰이고 싶어 안달이다. 이대로 쓰임새가 쓰임의 족쇄가 되어서는 안 된다.

 어쩌지 못하고 보내는 날들이 속수무책으로 늘어만 간다. 사람 간의 관계에 주목하는 내 경우에는 좀 더 처참하다. 어떤 식으로든 서로가 서로의 쓰임에 주목하는 사이가 빠르게 식어가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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