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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밀 Jul 22. 2022

나는 언제 쓰는가

나만의 해소법이 된 글쓰기


 나는 비교적 관계지향적인 편이다. 사람들과 한데 어울리는 것을 좋아하여 누군가 만나자고 제안해오기 전에 먼저 약속 잡기를 즐긴다. 그렇게 스스로 마음이 동하여 약속 장소로 향하지만 집에 오는 길이면 어쩐지 곧잘 허기를 느끼곤 했다.


 들뜬 마음을 좇기엔 한없이 더디기만 한 말주변 탓이었을까. 돌이켜보면, 너와 내가 있어야 할 대화에 '나'는 없고 '너'의 말들만 있었다. 머릿속을 가득 채운 말들은 이내 옅어지다 금세 자취를 감추어버리기 일쑤였다. 그렇다. 나는 아무래도 ‘말하기’보다는 ‘듣기’가 익숙한 사람이다.     


 게다가 아이들을 키우면서는 오롯이 나를 위한 약속을 잡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육아라는 특수한 상황이 일상 전반에 제동을 걸고 있다는 묵직한 기분에 수시로 사로잡혔다. 어렵게 가족의 동의를 구해 약속을 잡은 날은 덩달아 마음에 할증 같은 것이 따라붙었다. 이렇게 주어진 시간 값을 높게 쳤으니 그만큼 더 보상받고 싶은 심리가 작용했다.      


 하지만 임무가 가중된 시간이 마냥 편할 리 없다. 마음의 허기는 시간의 유한함에 비례하였고, 장마철 폭우가 내린 강물처럼 허기진 마음은 계속 불어나기만 했다. 덕분에 나의 귀갓길은 방전 직전의 배터리처럼 자주 절박했지만, 제 소명을 다한 전원이 완전히 소멸한 뒤에는 어쩐지 마음이 편한 쪽이었다. 그때부터는 오롯이 ‘쓰기’라는 수단만 생각할 수 있었다.     


 

 고백건대 일상에서 이러한 순간들이 켜켜이 쌓일 때 주로 글을 써왔다. 내가 나에게서 해방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길은 ‘글쓰기’였다. 누군가를 만나서 쏟아내는 말들은 스스로 해소하기 위해 필요한 절차였고, 입 밖으로 내뱉지 못한 말들이 뒤엉켜 결국 영영 못 쓰는 말들이 돼버리기 전에 나는 서둘러 내 안의 감정들을 나열해봐야 했다.


 그렇게 공중분해되기 직전의 못다 한 말들을 글이라는 수단을 빌어 담아보기로 했다. 그래서 머릿속을 떠다니는 글감들을 메모장이든 다이어리든 열고 일단 생각나는 대로 적어 내려갔다. 이렇듯 흩어지는 말을 글로 붙잡아두고 싶을 때마다 나를 다독여 위로하듯 썼기에 내 글의 가장 존재감 있는 독자는 대부분 나였다.      

 문득 이렇게 모은 글이 주변인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줄 수 있을지 궁금해졌다. 소수의 독자일지라도 누군가 내 글을 읽을 때는 아무래도 더 공들이게 되었다. 비공개로 쓸 때에 비하면 확실히 손이 많이 갔지만, 스스로가 읽기에도 편한 글이 결국 적확한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내 글쓰기의 명분은 결국 나의 글로 내가 치유받는 것이다. 그래서 누구보다 스스로 읽기에 흡족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형식과 틀의 골조를 늘 유념하며 써야 한다. 다른 이의 글을 읽을 때도 마찬가지다. 정제된 글에서 느껴지는 특유의 유쾌함이 있다. 이것이 공개적인 글쓰기가 필요한 이유다. 이 벅찬 강박에 주기적으로 사로잡히는 것이 어쩐지 달갑다.


 요즘의 나는, 서둘러 약속을 잡는 대신 모니터 앞에 앉아 백색의 화면을 응시하는 일이 더 많아졌다. 나를 똑바로 마주할 때 자연스레 수면 위로 떠오르는 내 안의 말들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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