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작은 울림
생후 27개월에 접어든 둘째는 요즘 어렴풋이나마 수의 개념을 알아가는 재미에 빠졌다. 좋아하는 책을 낑낑대며 내 앞에 들고 와서도, 숨을 고르기 전 고사리 같은 손으로 바삐 책장을 넘기면서도, 안방 문을 빼꼼 열고 웃으며 들어올 때도 설익은 입 모양으로 제법 또렷하게 발음해 내려 애쓰는 모양이 앙증맞다.
"다떤, 여떤, 일고오, 여덜...”
둘째의 수 세기는 예외 없이 늘 다섯에서 출발한다. 시작이 왜 다섯부터인지는 정확히 알 길이 없다. 거실 벽에 붙여둔 숫자 포스터에 공교롭게도 다섯부터 자기가 좋아하는 자동차 그림이 있어서일까. 아니면 형보다 뭐든 빨리 도달하고 싶어 조급해진 마음이 앞선걸까.
어쩌면 매일 아침 첫째를 향해 "다섯 셀 때까지 학교 갈 준비 안 끝내면 오늘 또 지각이야!”라고 탄식을 쏟는 엄마를 어깨너머로 보다 제 딴에 형을 걱정하는 마음이 절로 돋아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럴 때면 ‘형아, 내가 다섯까지 가뿐히 건너뛰어 줄게!’하고 오른쪽 눈을 찡긋 감아 신호라도 보낼 듯 여유만만한 표정을 짓는다. 두 아이는 지각이라는 난관에 맞서 순식간에 한배를 탄, 세상 두려울 것 없는 형제애를 발휘한다.
첫째를 키우며 끝이 보이지 않는 육아의 터널을 지나는 동안 줄곧 어떤 로망같은 게 있었다. 그것은 바로 아이와 도서관에 가면 나란히 옆에 앉아 ‘각자’의 책을 읽는 것이었다.
큰 애는 어릴 때부터 책을 가까이해서인지 책 편식 없이 분야별로 다양하게 읽어내는 아이였다. 잠들기 전 머리맡에 쌓아둔 책을 부지런히 읽어준 덕분이었을까. 아이의 책 독립은 예상보다 일찍 찾아왔다. 그리고 여섯 살 무렵부터는 함께 도서관에 가면 각자의 읽을거리로 분리가 가능해졌다.
책을 좋아하고 즐겨 찾는 아이로만 커 준다면, 훗날 아이에 대한 부모의 역할이 줄어들 때 유년 시절 거듭 읽던 책 너머 보편적 교훈이 아이 인생의 나침반이 되어줄 거라 믿었다. 일단 내가 좋아서 시작한 루틴이지만 약간의 의무감이 가미된 것은 꾸준한 노출을 통한 학습 효과를 내심 기대한 것도 있다.
유년 시절, 정리되지 않은 감정의 실타래가 뒤죽박죽 엉켜 머릿속을 헤집을 때마다 자주 혼란스러웠다. 다행히 책을 통해 그 내밀한 고통에서 수시로 해방될 수 있었기에, 언젠가 아이가 비슷한 혼돈을 겪더라도 책의 도움으로 지혜롭게 극복하기를 바랐다. 고맙게도 큰 애는 학교 도서관에서 '다독 어린이 상’을 받아오기도 하며 책과 가까이 지낸다. 덕분에 내 안에 자리한 조바심도 서서히 잦아들었다.
곧 삶의 로망은 가까운 현실이 됐고, 엄마의 육아에도 서서히 틈이 생겼다.
이토록 각자의 영역에서 따로 또같이 윤택한 시간을 보내는 방법을 터득 후, 우리는 본격적으로 인근 도서관 투어에 나섰다. 읽고 싶은 책 시리즈가 담보된 곳부터 열람실 소파의 안락한 쿠션감에 반해 오래 머물고 싶은 곳, 붐비지 않는 시간대를 뚫어 나만 알고 싶은 곳 등 그날의 기분과 취향을 반영하여 우선순위를 고려한 ‘오늘의 도서관’을 향해 가뿐히 발걸음을 옮겼다.
아이가 좀 더 자란 후에는 어린이 열람실과 성인 열람실이 층을 달리하는 곳도 우리만의 도서관 리스트에 무리 없이 포함시켰다. 아이가 책을 먼저 고르고 읽는 사이, 여유 있게 내 책을 빌려와 아이 곁으로 가서 읽는 재미는 제법 쏠쏠했다.
그렇게 첫째와 종횡무진 도서관 데이트를 즐기던 이 시기에 생각지 못한 아기 천사가 불쑥 찾아왔다. 비축해둔 체력은 금세 고갈되기 일쑤였지만 새 생명을 품고 있다는 이유에서인지 날마다 새날을 경험했다.
우리의 고정 멤버는 셋이 되었다. 2인분 몫으로 늘어난 몸의 영향으로 물리적 이동 거리는 저절로 단축됐다. 그간 소홀했던 아파트 단지 내 작은 도서관을 자주 찾게 된 것이다. 가깝다는 장점 외에도 ‘희망도서 바로 대출 서비스’를 통해 원하던 신간을 손쉽게 구해 보는 일이 가능해지자 하루가 멀다 하고 출입기록을 남기는 최다 이용 입주민이 되었다.
10개월간 뱃속에서 엄마와 함께 책을 보던 둘째도 어느덧 인생 3년 차에 접어들었다. 나는 아이가 책을 하나의 놀잇감처럼 생각하게끔 다양한 시도를 하는 편이다. 뭉뚝한 발바닥으로 그림책 표지를 꾹꾹 밟아보는 책 징검다리 놀이도 하고, 아이의 흥미를 고려해 주기적으로 거실 전면 책꽂이에 금주의 도서를 선정해 비치하기도 한다.
일상이 된 소소한 큐레이션 덕분인지 아이가 책장 앞에 머무는 시간이 점차 느는 것이 눈에 보였다. 조금만 신경을 써도 부지런한 성장이 느껴지니 이를 게을리할 도리가 없다.
오늘도 아이는 그림책 몇 권을 품에 안고 와서는 내 무릎에 살포시 앉는다. "엄마랑 같이 볼까? 이게 몇 권이지?” 하고, “하나, 두울, 세엣, 네엣" 수를 세기 시작하자 가만히 듣고 있던 아이가 바통을 이어받아 힘껏 외친다. "다떤, 여떤, 일고오, 여덜!”
의미를 알 수 없는 이 서투른 단절이 몹시도 소중하고 사랑스럽다.
사진: unsplash@Meg_MacDonal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