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능을 맞이하여 생각해 본 '나이에 갇힌 한국'
'고3'은 왜 한국형 특수계층이 되었나
매년 반복되는 모두가 숨죽이고 고요해지는 하루가 있다. 그날은 바로 '대학수학능력시험' 줄여서 '수능시험'이 있는 날이다.
내가 수능을 보았던 18년 전에도 그러했고 이러한 풍경은 이후로도 변화지 않고 이어져 바로 내일 또다시 우리 눈 앞에서 펼쳐지게 된다.
현재 현존하고 있는 대학 입학정원보다 수능응시자 수가 적어진 상황에서도 '수능날'은 한 국가가 나서서 한시기를 지나가고 있는 '고3'이라는 한국형 특수 계층에게 모든 힘을 보태주고 있다.
그럼 왜 이렇게 모두가 나서서 그들을 특수 계층으로 만들었을까?
그건 바로 시기의 규정 때문이라 생각한다.
우리는 태어나면서 정말 많은 시기의 규정과 그 규정을 나타내는 숫자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살아간다.
평균적으로 언제 걷고 언제 말하며 부터 시작하여 8살, 14살,17살이라는 숫자를 얻게 되면 관계와 체계를 바꿔가며 타의든 자의든 이동을 하게 된다. 이 시기 남들과 다르게 이동하기라도 하면 사회는 그들을 특별하게 인식하게 만든다.
그리고 '19살'이 되면 그 전에는 느껴보지 못한 특별하고 특수한 경험을 하게 된다. 이후에도 우리는 몇살에 대학에 입학을 하고 몇살에 취업을 하며, 몇살에 결혼을 하고 몇살에 집을 갖고, 자녀를 얻는지 등등 정말 많은 숫자와 그 숫자의 규정 안에 들기 위해 치열하게 경쟁하며 노력한다.
왜 우리는 이렇게 숫자로 규정하고 흐름을 보편화 시키려고 할까? 좋게 보면 우리 사회가 갖고 있는 특수성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우리 사회가 갖고 있는 배제와 차별의 단면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 시기에 그 행위, 그 성과를 얻지 못하면 소외되고 이러한 소외는 시간이 지나면서 회복되기 보다는 더 악화되는 경우를 많이 볼 수 있다.
자신의 시기와 그 시기의 나이를 정하는 것이 개인의 인생의 흐름에 따라 개별적으로 결정할 수 있다면 아마도 '고3'은 특수 계층이 되지 않았을 뿐더러 그로 인한 사회비용도 줄일 수 있을 것이다.
아울러 생각해 봐야 하는 것은 우리의 대학 교육이다.
예전부터 지금까지의 대학 교육은 스스로 인재를 육성하는 교육이 아닌 이미 만들어진 인재를 누가 많이 선점하느냐가 중요하게 작용되어 왔다.
이러한 완성된 인재의 선점 현상은 초중고 교육이 대학을 가기위한 준비 기간으로 전락하고 대학들은 이러한 준비과정을 거친 학생들을 손쉽게 선점함으로써 대학 내에서의 성정의 한계점과 불노소득과 같은 대학 명성 유지에 이용해 왔던 것이 사실이다.
따라서 지금 처럼 지역적 편익과 완성된 인재의 선점을 통한 대학 교육은 대학 교육이 존재하는 이유를 희미하게 만들었다.
이러한 대학 교육의 문제는 최근 자사고,과학고,외국어고 등 특수목적 고등학교의 목적을 잃게 만들었고, 결국 또 하나의 서열화 장치로 전락시켜 폐지에 이르게 만들었다.
다시 앞으로 돌아가 내일은 '수학능력시험'이 있는 날이다.
이 날은 누군가와의 경쟁이 아닌 '나의 시간 시간의 노력'의 대한 평가라고 생각했으면 좋겠다.
내일 치러지는 '수능'은 하루다. 그리고 이어질 인생은 그 보다 몇 배 더 길다는 것을 알았으면 좋겠다.
모든 수험생들 모두 수고가 많았으며, 제발 '수능을 못봐서 자살'을 했다는 뉴스는 올해 만큼은 보지 않길 희망한다.
아! 그리고 흔히 우리가 응원 구호로 사용하는 '화이팅,파이팅'은 일제 잔재라고 한다. 그래서 정부에서도 이 말 대신에 우리말 '아자'를 응원 구호로 권장하고 있의니 수험생 응원할 때도 '아자!'로 응원해 주었으면 좋겠다.
#대학수학능력시험 #모든수험생아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