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코백을 든 남자들

by 서단 정선옥

안녕하세요?

중저음의 굵은 목소리가 강의실에 울려 퍼진다.

십여 명의 중년여성들 앞에 서있는 남성은 이제 노년으로 들어서는 알렉스이다.

특유의 싱그러운 미소가 보기 좋다.

월요일 오전 10시!


영어 북클럽 수업이 막 시작되었다.

알렉스에 이어 이안이 특유의 느릿한 걸음으로 문을 빼꼼히 열고 들어와 자리에 앉아 책을 펼친다.

그는 종종 손자를 케어하는 게 힘들다고 불평을 한다. 본격적인 리딩 수업이 시작되기 전 프리토킹 시간에 띄엄띄엄 영어로 이야기하는 내용의 대부분이 돌봄 이야기이다.


내 옆에 앉은 분은 우리 수업시간에 최고 고령자 그린이다. 70대 인 그는 영어에 대한 애정이 남다르다. 대부분의 수강생들이 프리토킹은 소극적이거나 패스 하는데 그린은 프리토킹에 적극적이다.


알렉스, 이안, 그린은 북클럽 수업을 함께 공부하는 세명의 남자들이다. 오랜 기간 수강했고 결석도 자주 하지 않으며 수업의 분위기를 항상 밝게 해 주는 분위기 메이커들이다.


오늘 프리토킹 시간에는 이번 분기에 새로 온 여성의 이야기가 화제였다. 서른이 넘은 딸아이가 잘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공부를 하겠다고 해서 너무 고민이 된다고 한다. 그래서 아주 용하다는 곳에 가서 점을 볼 예정이라고 털어놓았다.

이제 화제는 점집으로 옮겨졌다.

모두 다가 자기의 경험을 나누며 점을 보는 건 상담과 같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번 이야기에도 남자들이 앞다투어 자기 입장을 밝혔는데 한 명은 긍정적이었고 또 한 명은 부정적이었다.

중년의 여성들이 주를 이루는 이야기에도 남성들은 자연스럽게 섞인다. 덕분에 남자들의 입장을 듣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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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막 60대로 들어섰고 북클럽 수업을 10개월째 공부하고 있는 나는 여중, 여고, 여대의 학창 시절을 지냈다. 그래서인지 나도 모르게 남자에 대한 환상을 가지고 있었는데 남자들은 항상 여자들을 배려해 준다고 믿고 있었다.


이런 환상적인 믿음이 깨지기 시작한 건 대학교 때이다. 운동권 선배 언니들의 증언에 의하면 경찰에 쫓기는 절체절명의 순간에는 남학생들이 여학생들을 밟고 지나간다는 것이다.


설마? 밟고 간다고?

남학생들이 쓰러진 여학생을 일으켜서 손을 붙잡고 함께 도망가는 게 아니고?

라고 되묻는 나에게 선배는 한심하다는 눈빛을 보냈다.

언니들의 증언에도 불구하고 나는 흑기사 환상을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했다.

20대 풋풋했던 내게 남자들은 비교적 친절했다.

어리 버리 했던 내게도 드디어 매서운 사회생활은 시작되었다.

내가 근무했던 곳은 남자들은 나이가 있는 편이었고 여자들은 나이가 어렸다.

직급이 크게 없던 분야여서 남자들도 동료 선배였는데 그들은 더 이상 친절하지 않았다.

배려는커녕 어려운 업무와 과중한 일 구덩이로 나를 밀어 넣었다.

그들은 더 이상 흑기사가 아니라 교활한 선배들이었다.

그렇게 매운맛을 보고서야 나는 환상에서 벗어났다.

비싼 가격을 치르고서야 남자들에게 함부로 의지해서는 안됨을 배웠다.


그러나 직장을 그만두고서는 남자들을 볼 기회는 좀처럼 없었다.

육아를 하면서도 취미생활을 하면서도 운동을 시작해도 거의 대부분이 주부들이었다.

그런데 나이 오십이 넘어가니 남자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그들 대부분은 에코백을 들고 있다.

에코백은 여자들의 전유물같이 느껴졌는데 에코백을 든 남자들이 여성 전용이었던 문화센터에 하나, 둘씩 오고 있다.

그들 대부분은 오랜 직장 생활을 마친 퇴직자들이다. 영어 수업에도 미술 강좌에도 한 자리씩 차지하고는 자연스럽게 우리와 어울린다. 그들은 우리들과 생각을 나누려고 하고 솔직하다.


어쩌면 30년 전 나를 구렁텅이로 몰았던 교활한 선배들도 지금쯤은 에코백을 들고 문화센터에 다닐지도 모르겠다. 또한 나와 함께 공부하는 그린이나 알렉스, 이안도 30년 전쯤엔 어린 후배들에게 과중한 업무를 떠넘겼던 교할 한 남 자였을 수도 있다.

환상 속에서 깨어나 칼날을 세우고 싸우던 남자들과 이제는 함께 에코백을 들고 문화센터에서 살아가는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가 됐다. 어쩌면 이것이 시행착오를 거쳐 얻게 된 평화인가?

곰곰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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