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을 왜 시작하셨어요?"
서양화 기초 수업 첫 시간에 누군가가 나에게 묻는다.
갑자기 훅 들어온 질문에 선뜻 대답이 나오지 않았고
내가 왜 이젤 앞에 앉아 끙끙대는지 곰곰 생각해 보았다.
초중고 학창 시절 내내 미술시간은 즐겁지 않았다. 크레용을 들고 혹은 붓을 들고 난감한 표정으로 도화지를 응시했지만 머릿속에는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래도 음악 시간은 함께 부르는 합창 속에 음치의 실력을 숨기면서 즐거웠는데 미술은 하면 할수록 드러나는 손재주에 정말이지 난감했다.
당연 학창 시절 이후 미술활동은 전무였고 미술 관람도 내 몫은 아니었다. 아이들을 키우면서 유명 미술전을 쫓아다니긴 했지만 그건 숙제를 하는 기분이지 관람의 자세는 아니었다.
어느덧 세월이 흘러 내게도 노후를 준비해야 될 60대가 시작됐다.
건강이 가장 중요하니 운동은 기본이고 치매에 좋다는 영어 공부도 해야 하고
견문을 넓히기 위해 독서도 해야 하고 이것도 관심이 가고 저것도 마음이 갔다.
그러다가 문득 떠오른 생각이 노작활동이다.
손으로 하는 소근육 운동이 뇌에도 좋을 것 같다는 판단이 서자 망설임 없이 가장 가까운 문화센터에
어반 스케치 강좌를 등록했다.
그러니까 노작 활동을 하기 위해 미술을 선택한 것이다.
다른 이들보다 못해도 꾹 참고 오랫동안 할 수 있기를 희망하면서 첫 시간을 맞이했다.
어반 스케치 수업을 시작한 지 6개월 정도 후에 완성한 벚꽃이다. 명암은 펜으로 쉽게 하고 나무 기둥 부분은 샘의 도움으로 완성했다.
내 실력은 단지 50% 정도이다.
그래도 예쁜 꽃을 완성했다는 성취감은 상당했고
미술활동을 할 수 있다는 자신감도 생기고 수업이 무척 즐거웠다.
그러다가 욕심이 생긴 걸까?
좀 더 체계적으로 배우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어반스케치 수업은 미술에 재미를 느끼게 해 주었지만 실력은 크게 향상되지 않았다.
기본기가 전혀 없기 때문인지 샘의 도움이 없다면 완성도 힘들었다.
그렇게 갈증을 느끼다가 가까운 곳에 서양화 기초 강좌를 찾아내고는 등록여부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재미있게 하고 있는데 괜히 부담스러워지는 건 아닐까?”
“그래도 용기를 내서 시작해 볼까?”
이 궁리 저 궁리 끝에 등록을 결정했고 생전 처음 보는 4절지 도화지의 크기에 놀라면서 이젤 앞에 앉아 선 그리기 연습을 했다.
선 그리기를 간단히 마치고 다음에는 정육면체, 삼각뿔, 사각뿔, 원기둥 같은 도형들의 형태를 그리고 빛이 어디서부터 오는지 관찰해서 어디가 더 밝고 어두운지 따져본 후에 명암을 넣고 마지막으로 그림자까지 그려 완성했다. 연필로만 완성되는 연필소묘이다.
한주에 도형 하나씩 그렸는데 거의 네 달 동안 한 것 같다.
재미보다는 새로운 경험이 흥미로웠고 훈훈한 강의생들의 분위기가 마음에 들어서 계속해 보기로 했다.
도형만 그린 4개월이 흐른 뒤에 그린 피망 소묘이다.
드디어 정물 소묘로 넘어온 것이다.
소묘의 한자를 풀어보면 본디, 바탕, 근본, 성질의 뜻을 가진 “소”자와 그리다의 의미를 가진 ‘묘“가 합쳤으니 "본디, 바탕, 근본 성질을 그린다"라는 의미로 풀어진다.
앞에 놓인 책상에 피망을 살포시 올려놓으며 그려보라는 샘의 말에 처음에는 막막해진다.
저걸 어찌 시작할까?
한참을 망설이다가 두 개의 큰 원을 그리는 걸 시작으로 형태를 잡아본다.
꼭지도 그려 넣고 갈라진 틈도 표현해 보고 애를 쓰다가 비슷하게 그려지면 뿌듯하고 형태 잡기가 어려워지면 난감해진다.
대충 그려졌으면 샘에게 형태 점검을 받는데 가끔은 칭찬을 또 가끔은 지적받으며 수정받는다.
아주 잠깐의 샘의 손길로 그림이 고쳐지면 피망 같지 않던 피망이 생명을 얻는다.
피망을 원으로 보고 꼭지는 원기둥으로 생각하고 명암을 넣으라는 말을 남기고 총총히 샘은 떠난다.
정물을 그리기 전에 배웠던 도형의 명암을 떠올리며 밝고 어둠을 그리고는 마무리 단계로 디테일한 꼭지의 마른 부분까지 표현하면 조금 더 실물에 가까워진다.
이럿듯 섬세한 표현을 하려면 눈이 빠질 정도의 관찰은 필수이고 손은 4B연필의 흑연가루로 새까매진다. 그런데 이러한 복잡한 과정이 묘하게 재미있고 힐링이 된다. 머릿속에 수많은 잡념들이 깨끗이 사라지고 집중 후에 상쾌함이 개운해서 좋다.
그리고 여러 명이 똑같이 그리기 시작해도 각자의 피망의 모양은 달라져있다. 얌전한 사람의 피망은 얌전하고 활기찬 사람의 피망은 생동감이 넘친다.
피망을 그리는 터치에 감성이 담기는 것이다.
소묘를 시작한 지 1년이 흐른 뒤에 그린 벽돌 위에 놓인 북어 소묘이다.
물론 샘의 손길로 다듬어지긴 했고 내 실력은 70% 정도이다. 그래도 꽤 많이 늘었다.
다음 시간부터는 색연필로 색상을 넣기 시작한다고 샘은 공지했다.
물감을 사용하기 전에 색연필로 감을 잡기 위해서란다. 인터넷으로 36색 색연필을 주문하고는 기대반 설렘 반으로 수업을 기다린다.
무슨 난이도가 또 나를 기다리고 있으려나?
궁금하고 신난다.
노작활동을 하기 위해 찾은 수업에 즐거움 한가득을 선물 받은 기분이다. 청소년들만 다양한 경험이 필요한 건 아닌 것 같다. 노후대비를 위해서도 평소에 관심 없던 분야의 도전도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