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은 아니지만 올드도 아니겠지(1)
고독은 가치 없는 체험이 결코 아니며, 우리가 소중히 여기고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이 심장에 그대로 가닿는다는 것을. 외로운 도시에서 경이적인 것이 수도 없이 탄생했다. 고독 속에서 만들어졌지만, 고독을 다시 구원하는 것들이.
- 올리비아 랭, <외로운 도시>
회사를 그만두고 외로운 시간을 보내는 동안 나를 구원해준 문장이다. 지금은 다른 회사에 재직 중이지만 (또x100) 새 길을 고민하며 그때의 마음을 꺼내어 본다. 머릿속에 있는 재료를 끊임없이 끌어다 쓰다가 이제 모두 소진되었다는 느낌이 들었고, 많은 것이 지겨웠으나 그중에 뭘 그만두고 싶은 건지는 모르겠던 날들이었다. 간혹 '여기가 아니라'는 환청이 들리는 듯도 했다. 여태 여기인 줄 알고 느린 걸음이나마 꾸준히 왔는데, 직업을 또 바꿀 고민을 하다니, 그렇게 쌓은 것도 실패할 수 있다는 걸 알게 됐다.
만능 처방전처럼 퇴사라는 카드를 꺼내들었으나 불안이 제일 먼저 찾아왔다. 지금 생각하면 첫 퇴사도 아니고, 백수의 삶이 어떤 식으로 고달픈지도 잘 알면서 어쩜 이번엔 다를 거라고 철썩같이 믿었었나 싶다. 역시 인간은 어리석고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 회사를 그만둘 만큼 새로 도전하고 싶은 일이 있었고 당분간 생활비 걱정 안 하게 해줄 프리랜서 일도 있었지만, 미래가 한없이 불투명하게 느껴지고 혼자 느슨하게 보내는 하루가 무의미할까봐 걱정인 건 이전 퇴사 때와 마찬가지였다. 매일 아침 일어나면 그간 쌓아온 경력을 동아줄처럼 붙들고 몸담고 싶은 분야와 몸담았던 분야의 채용공고를 뒤적거렸다. 어떤 공고를 보느냐에 따라 너무 늦은 나이 같기도 하고, 이른 나이 같기도 했다. 이래저래 스스로를 책망하는 동안 단단해졌을 거라 믿었던 자신감이 계속 깎여 나갔다.
희망찬 구석도 있었다. 바람 솔솔 부는 카페에 앉아 편집 작업을 하고 있으면 대체로 행복한 기분이 들었다. 카페투어를 평일 낮에 마음껏 할 수 있다니! 키보드 소리를 토독토독 내며 이대로 디지털 노마드가 될 것만 같은 기분에 취하곤 했다. 한적한 버스에서 창밖을 내다보는 것도, 언제든 보고 싶은 사람을 만나러 그쪽으로 이동할 수 있는 것도 좋았다.
또, 기가 막히게도, 어느 날은 그게 너무 하기 싫었다. 그러고 있을 때가 아닌 것 같았다. 배워야 할 것과 시도해봐야 할 것, 꾸준히 해야 할 것들이 머릿속에 가득 차올랐고, 그런 날이면 당장이라도 월급 주는 곳을 찾아갈 기세로 노트북 앞을 떠나지 않기도 했다. 아무 공고에나 몸과 마음을 욱여넣고 내 자리인 척하고 싶었다. 미래 계획을 세우느라 지금 행복할 줄 모른다는 말이 꼭 맞았다. 꿈꿔온 순간에 행복하지 않은 내 모습을 보면서 나는 계속 외로웠다.
울었다가 웃었다가 버둥대는 동안 시간은 잘도 갔고, 저절로 깨닫게 된 건 '오늘을 어떻게 보내느냐에 따라 내일의 기분이 달라진다는 것' 하나였다. 잘 살고 있는 건지 증명해줄 게 별로 없었기 때문에 오늘을 내 마음에 들게 보내는 것이 무척 중요했다. 하루를 알찬 콘텐츠로 채우겠다고 작성한 투두리스트를 전부 실행할 필욘 없었다. 아침에 일어나서 '어제는 꽤 괜찮았지 마음에 든다' 할 정도면 됐다.
그렇게 월급이 아니라 원하는 미래에 더 가까워지는 중이라는 걸 잊지 않는 날들을 보냈다. 지금 와서는 햇볕 좋은 날 창문을 활짝 열어 바람을 통하게 하고 식물에 물을 주는 것처럼, 바짝 마른 나에게 물을 주는 시간 같았다고 기억한다. 다시 고독이 찾아와도 경이적인 것을 탄생시킬 그 시간들을 소중히 챙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