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색으로 구겨져버린 종이
"김 과장, 이게... 도대체 뭡니까? 이건 좀 아닌 것 같은데."
빨리 벗어나고 싶은 공간 속에서 떨리는 목소리로 부장에게 물어보았다.
"부장님, 아직 부족하죠...? 개선해야 할 부분을 체크해 주시면 다시 보완해 오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언제쯤 이 '죄송하다'는 말 좀 안 하고 살 수 있을까?
뭐가 그렇게 마음에 안 드시는 걸까?
기획서가 아니라 내가 문제인 건가?
내게 빨간색 표시를 하면 금방 끝났지 않았을까?
온몸이 무겁다.
그나마 있던 자존감도 사라지려 한다.
아니, 내게 남아 있던 자존감이 있긴 했던가?
질문이 계속 늘어났지만 들어줄 사람도 답을 해줄 사람도 없었다.
항상 하는 자문자답.
화장실 칸에 들어와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옥상에 가고 싶지만 가지 않는다. 옹기종기 모여 모두들 나를 한심하게 보는 것 같기 때문이다.
화장실에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대화를 하기 시작한다.
"김 과장님, 또 깨지시는 거 같던데.... 안쓰럽습니다. 들으셨죠? 바로 옆방에 계잖아요?"
"에휴.... 그러게 말이다. 다행히 오늘 호통은 안치시는 거 같던데?"
날 걱정하는 건지, 자신이 안 당했음을 안도하는지 한숨 소리가 들렸다.
"김 과장님, 정말 대단하십니다. 아무리 취업난이 심하다고 하지만 이 정도면 저는 힘들었을 것 같습니다."
"강한 자가 살아남는 건가, 살아남은 자가 강자의 자리에 오르는 것인가... 난 김 선배에게 한표. 매일 저렇게 깨지는데도 버티는 걸 보면 부장님보다 오래 살아남을 듯. 뚝심하나는 인정해 줘야 지, 그 선배."
"네, 그건 정말 배우고 싶네요. 그 강철 심장과 안면! ㅎㅎㅎ"
웃음소리가 화장실에 울린다. 누군지 짐작은 간다. 너희들도 내가 짠하구나. 나도 내가 짠하다. 근데 이 상황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변기에 오래 앉아 있으니 다리가 저려왔다. 회사 안에 내가 편히 있을 곳이 없다. 저들이 나가고 저린 다리가 풀리면 이제 자리로 돌아가야겠다. 부장에게 또 한 소리 들을라.
잉크 냄새보다는 먼지 냄새가 더 익숙한 기획부 구석 자리가 내 자리다.
오른쪽 아래에 잔뜩 구김이 간 기획서를 넘겨본다. 오늘도 내 앞면은 빨간 펜으로 난도질당했다.
초등학교 때는 빨간색 동그라미는 백점의 훈장이었는 데, 지금은 왜 이렇게 처참한지. 갱지에 그려진 빨간 동그라미는 초라하지만 자랑스러웠다. 하지만 새하얀 고급 종이의 핏빛 선들은 나를 공격하고 있었다.
'신규 브랜드 론칭 기획안_ver24-최종. docx'
벌써 24번째 버전이다. '최종'은 지우고 'ver25'가 되었다. '최종'을 24번이나 써서 이젠 그냥 제목의 마지막 이름 같다. 24장의 기획서... 이제는 눈 감고도 보인다.
갑자기 경리팀에게 미안해진다. 24번 출력했으니 400장 넘게 낭비한 셈이다. 아마 우리 회사에서 이면지를 제일 많이 만드는 사람은 내가 아닐까? '최종'이라는 단어를 24번이나 배신하고 나서야 나는 이 종이 뭉치를 가방에 쑤셔 넣었다. 이면지로라도 써야 덜 미안할 것 같아서.
퇴근길, 가방 속에서 구겨진 기획서가 바스락거렸다. 마치 나 좀 봐달라는 비명 같았다. 지하철에서 많은 생각을 한다. 오늘 있었던 일을 복기하고, 후회하고, 반성하고, 오늘과 다르지 않을 내일을 그려본다.
그러다 보면 내려야 할 곳에 와 있다. 약 1시간 30분 동안의 짧지 않은 여정이지만 생각이 정리된 체 내린 적은 없다. 그래서 속을 달래러 자주 가는 포장마차에 들렀다. 생각지도 못했는 데 반가운 얼굴들이 보인다.
"여~ 왓섭 브로~ "
나를 반갑게 맞아주는 철수 옆에 준호도 있었다.
"왔냐? 또 왜 이렇게 죽상이야?"
"하... 언제 왔어? 오늘 출근 안 한 거야?"
"그냥 좀 일찍 끝났어. 저녁이나 때우고 갈라고 했는 데, 여기 사장님께서 벌써 한 잔 걸치고 계시더라고."
"그래서, 반가웠냐? 큐레이터라고 서점으로 첫 출근할 때 이런 덴 안 오시는 줄 알았구먼 집보다 더와."
준호가 테이블 위 서류를 집어 들었다.
"어? 이거 뭐냐? 오~~ 티브이에 나오는 대기업 로고~ 죽이네. 야, 근데 이거 기획서냐, 부적이냐? 글씨보다 빨간 게 더 잘 보여~ㅋㅋㅋㅋ."
빨간색이 돋보이는 부적 같은 기획서를 펄럭이며 철수가 말을 이어간다.
"너 내일 출근할 때 팥이라도 뿌리고 가야 하는 거 아냐?"
"야야, 분위기 봐가면서 떠들자. 두 번 죽이는 것 같다."
준호가 철수를 제지했지만 철수는 멈추지 않았다.
"그래? 흠.... 하긴, 지금 보니 오늘 딱 '먹지'네. 먹물 묻은 종이 있잖아. 앞뒤가 시커먼 게 딱 그 꼴이야."
인쇄소하는 철수가 나를 먹지에 비유하며 웃는다. 기획서에 웃긴 내용은 없지만 우스운 건 사실이지. 그래 웃어라 새끼야.
"나 오늘 이거 파쇄기에 넣으려다가... 나도 거기 들어갈까 봐 참았다."
"오, 들어가지. 그럼 너의 영이 긷들여져 진짜 효과 만땅이었을 텐데~ 진짜 부적이 되는 거지 ㅋㅋㅋ."
준호가 인상을 찡그리며 고개를 흔들자 철수가 눈치 보였는지 어묵 국물을 들이켰다. 틀린 말하나도 없는 데 눈치 보는 게 고맙기도 미안하기도 했다.
"휴.... 그 부적 들고 결제받으러 가면 효과 좀 있으려나... 근데, 그 말, 좀 위로는 된다."
"미친놈, 나 살기도 힘든데 내가 널 왜 위로하냐? 위로받고 싶으면 술이나 마셔. 야, 준호야! 소주 한 병 더!"
준호가 술병을 흔들며 투덜거렸다.
"야야, 술맛 떨어지는 말 그만하고 그래도 술 값은 제일 잘 버는 대기업 다니시는 김 과장님이 쏘는 걸로? 우리가 널 위한 '부적'을 발견해 줬으니 이 정도는 해야지."
준호가 술을 따라주며 말한다.
"우리 김 과장님, 좋은 일만 있으시길~"
준호는 나의 상황을 잘 공감하며 예의 있게 욕을 해준다. 철수는 인쇄소에 연세 많으신 분들과 여러 사람을 응대하느라 말을 구수하고 거침없이 말하는 스타일이다.
둘의 조합은 마치 돈가스 같다고 할까? 돈가스가 준호라면 밥은 철수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내가 돈가스를 좋아하나 보다.
이 놈들이 없었으면 오늘 내 하루는 어땠을까. 이렇게 적당한 타이밍에 나타나 오늘 내 하루를 망친 사건을 별 거 아닌 걸로 만들어 줄 수 있나? 욕도 대신해 준다. 너무 시원하다.
그래서 힘들 때마다 항상 포장마차에 오는 이유가 이들이 있기를 기대하기 때문인가 보다.
친구들 덕에 오늘도 덕분에 잘 마무리한다.
집에 돌아와 샤워를 하고 나니 정신이 들었다. 다시 리셋하고, 자기 전에 기획서나 한 번 훑어보고 내일 작업할 것을 확인해야겠다. 하기 싫어도 할 건 해야지. 근데.... 어? 기획서 어디 갔지?
아.... 철수 새끼...
지 가게에 붙인다고 의자에 올려뒀는 데, 그대로 두고 온 거 같다.
"에휴.... 다녀오면 12시...."
한숨이 나왔다. 오늘도 일찍 자긴 글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