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의 비상
오늘도 불합격 문자를 받았다. 29번째 불합격.... 이젠 익숙하다. 합격 문자가 오면 좋겠지만 왠지 전산 오류를 의심해 볼 것 같다. 내가 될 리가 없다. 이제 곧 점심시간이라 도시락, 김밥을 채워 넣어야 하는 데 기운이 안 난다. 그래도 내가 서울에서 살 수 있게 해주는 편의점인데 할 건 해야지. 오늘따라 김밥들이 무거워 보였다. 아니면 내가 힘이 없는 건가?
계산대에 앉아 점심값을 아끼러 편의점으로 온 손님들을 봤다. 다들 목에 사원증을 걸고 다녔다. 테이블에 앉아 도시락을 드시는 손님이 말했다.
"으이그, 이 놈의 사원증 귀찮게 걸리적거리기나 하고.... 자동인식으로 하면 편하고 얼마나 좋아."
손님은 귀찮다고 한 소중한 사원증을 왼쪽 포켓에 무심하게 쑤셔 넣었다. 내가 간절하게 가지고 싶은 저 소중한 사원증을 귀찮다 말하다니 차라리 나한테 줬으면 싶었다. 5년이 지나도록 걸어보지 못한 사원증.... 김 과장님도 사원증이 귀찮을까? 언제쯤 취업하셨을까?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폐기 김밥과 컵라면을 가져왔다. 이거 먹고 미소도 나도 힘을 냈으면 좋겠다. 고시원의 공통 테이블에 앉아 미소에게 같이 밥 먹자고 카톡을 보냈다.
미소는 면접 결과를 조심스레 물어보았다. 그리고는 면접에 떨어져 구진 나를 위로해 주었다. 미소는 구겨진 나를 펴주려고 계속 괜찮다고 말해줬다. 역시 미소의 넘치는 에너지는 좋은 기운을 주었다.
배부르게 먹고 나니 더 기운이 나는 것 같았다. 다시 자기소개서를 작성할 힘이 생겼다. 제발 계속 이렇게 무너지지 않고 버틸 수 있는 힘이 생겼으면 좋겠다. 시간이 늦어 이제 정리하자고 말하려는 데 미소는 뭔가 골똘히 생각하는 것 같았다.
'자기소개서 항목 중 안 풀리는 것이 있나?'
어떤 건지 말해주면 같이 방법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은 데 말이 없다. 생각이 끝났는지 나에게 말했다.
"언니 그러지 말고 글 써보는 거 어때?"
미소 역시 나에게 글을 써보라는 거였다. 김 과장님도 미소도 왜 자꾸 나에게 글을 쓰라는 거지? 내가 뭐라고.... 내가 모르는 뭔가가 그들에게는 보이는 건가? 그게 도대체 뭐길래 둘이 같은 얘기를 하는 걸까?
"잠깐만 기다려 봐."
미소는 갑자기 일어나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뭔가 뒤적거리는 소리가 들었다. 조그마한 상자를 들고 나에게 내밀었다. 상자에는 내가 써준 메모가 모아져 있었다.
"언니가 써 준 메모들 내가 다 모았어. 이거 블로그에 올려봐."
"나 그 정도는 아니야. 작가 될 생각도 없어. 그냥... 하루하루 버티는 거지."
"에이 그런 게 어딨어. 이 정도면 그.... 그거 뭐지? 그거 있잖아. 신춘문예! 그래 그것도 되겠구먼!"
"아니야. 이런 글은 그냥 일기에 쓰면 돼."
미소는 내가 하겠다고 할 때까지 설득할 생각인 것 같았다. 그런 미소가 고맙기도 했지만 부담스럽기도 했다. 지금 취업 준비에 아르바이트하기도 바쁜데 무슨 글을.... 결과가 보장된 것도 아닌 데 할머니를 생각해서라도 무리수는 두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무리수는 내가 서울에 올라온 것 하나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아니야 아니야. 봐봐. 우리처럼 이 험난한 사회에서 열심히 취업 준비를 하는 사람들을 위해 힘내라는 글!"
미소가 내 손을 잡았다.
"게다가 작가가 진짜 취준생이야. 그림 딱 나오네!! 해봐, 해봐!"
"미소야...."
"언니, 난 언니 글 좋아. 그 아저씨도 언니한테 글 써보랬잖아! 언니가 최초의 독자 말고 두 번째 독자도 만들어봐"
미소는 그렇게 나에게 또 다른 에너지를 불어넣어 주려 애쓰고 있었다.
한참을 글을 꼭 쓰라고 나를 설득했다. 하지만 나는 자신이 없었다. 지금 상황만으로도 충분히 버거웠기 때문에 다른 일을 병행할 시간과 여력도 없었다.
"언니 알았지? 오늘 블로그 만들고 글 하나 올려서 나한테 보내줘! 내일 아침에 썼는지 내가 확인할 거야!"
자신의 일인 듯 신나하는 미소를 진정시키고 방으로 들어왔다. 나 혼자뿐인 서울에서 밝고 좋은 기운을 주는 미소를 만나게 된 게 너무 고마웠다. 감사한 인연이다.
책상에 앉아 미소가 준 메모와 일기장을 보며 한참 고민했다. 그냥 힘내라는 메모.... 내 하루의 일상.... 이걸 보고 누군가가 힘을 낼 수 있을까? 조심스레 노트북을 열었다. 지난주 김 과장님의 권유로 써본 글을 보았다. 아무리 봐도 두서없고 나의 감정만 잔뜩 담긴 닭살스러운 글들.
'이걸 올리라고? 조롱거리가 될 것 같다....'
두려웠다. 그때 미소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언니, 어차피 모르는 사람들이야. 안 봐주면 말고 봐주면 땡큐잖아! 그 땡큐가 '좋아요'가 되고 '팔로워'가 되고 그런 거야. 그러니까 일단 올려봐. 안 하는 것보단 낫잖아. 안 그래?"
김 과장님의 말도 떠올랐다.
"잃을 거 없잖아."
그래, 내가 모르는 나의 모습을 발견한 그들을 믿자. 뭔가 보였겠지. 그래서 말한 거겠지. 안 봐주면 마는 거지, 잃을 거 없잖아. 나는 블로그를 개설하여 첫 글을 올렸다.
제목: 버린 종이의 뒷면
프로필 사진은 없다. 소개글도 없다. 그냥 첫 글만 올렸다.
포장마차에서 주운 꿈
마우스가 '발행' 버튼 위에서 멈췄다.
'정말... 올려도 될까?'
눈을 감고 클릭했다.
발행 완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