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째가 어릴 적에 새끼발가락에 금이 간 적이 있다. 그때 처음으로 골절진단금이란 걸 받았다. 30만 원. 아이는 크게 아픈 적은 없지만 감기는 자주에 걸리는 편이었다. 큰돈 든 적은 없지만 동네 병원에서 자잘한 병원비는 많이 썼다. 하지만 그런 건보험금 지급 대상이 아니라서 늘 아쉽기만 했었다. 그러던 차에 골절 진단금으로 30만 원이나 들어왔던 것이다. 적다면 적고 크다면 큰돈인데, 나에게는 '그래도 보험을 든 보람'을 느끼게 할 정도의 금액이었다.
이번에는 둘째의 골절이다. 수술까지 한바탕 폭풍우가 지나가고, 퇴원을 하고 한숨 돌리고 나니 '이번에도 골절 진단금은 받겠군.'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다친 건 다친 거고, 아픈 건 아픈 거고, 받을 건 받아야지. 퇴원 전 날 미리 받아 둔 서류들을 챙겨 얼른 보험사 앱에 등록을 했다. 모바일 시대가 되면서 간소해진 보험금 청구. 나는 청구할 일이 생기면 그날 바로 청구하는 편이다. 내가 돈을 쓴 시점과 보상받는 시점이 다르면, 가계부가 복잡해지니까. (가계부를 쓰는 건 아니고, 머릿속에서 수입지출을 계산하는 정도지만.) 정신없는 와중에, 골절 진단금 30만 원이 떡 하니 들어오면 기분전환도 될 것 같았다. 30만 원에 울고 웃는 비루한 삶이라니. 그렇지만 뭐, 좋지 않을 이유가 없지 않은가.
"보험금 지급 안내" 드디어 기다리던 문자가 왔다. "으응?" 거기 내가 전혀 예상치 못한 금액이 찍혀 있었다. 실비 보험이니까, 사용한 병원비 (입원비 포함)에 골절 진단금 정도가 더 입금될 거라 생각했다. 근데 이건 뭐지? 내 생각보다 100만 원 이상 더 많다. 보험에는 특히나 디테일하지 않은 터라, 왜 이렇게 많은지 감도 안 잡혔다. 첫째와 둘째 네 살 터울. 둘째 태아보험을 알아볼 당시에 이미 첫째가 4살이었는데, 보험금을 제대로 받아본 적이 없어 이미 아깝다 생각할 때였다. 그래서 최소화를 요청하여 든 보험이라 더더욱 받을 게 없다고 생각했었다. '상세 내역을 봐야겠어.' 생각하는 내 입꼬리는 확인도 전에 이미 씨익 올라가 있었다. 공돈 백만 원이 생긴 기분이랄까.
그제야 들여다본 지급 사항에는, '골절 수술 보험금 60만 원'과 '상해 수술 보험금 50만 원'이 포함되어 있었다. 거기에다가 '골절 진단금 30만 원'과 '상해입원급여금 15만 원'까지. 실제 사용한 실손 의료비 외에 지급된 항목이 이렇게나 많았다. 실제 사용했지만 보상 제외된 금액을 계산해도 명백한 '+'였다. (이런 생각하는 거 보니 나 T가 확실한가 보다.)
이렇게 긴 진료비 세부산정내역서를 받아본 건 처음이었다.
'뭐야, 그렇게 간소화해 달라고 했는데 이렇게나 포함된 게 많았어?'에서 시작한 마음은 1초도 지나지 않아 '오오, 이거 좋은데?'로 바뀌었다. 이제야 알았다. 사람들이 보험을 왜 드는지를. 그리고 아들에게는 왜 보험이 더 필요하다고 하는지를. 세상 쓸데없는 거라 여겼던 보험이 이렇게나 유용한 거였다. (수술비와 치료비가 꽤 나왔으니 실비만 나와도 유용한 게 맞긴 한데, 금액이 높아지니 유용성도 수직 상승한 듯 느껴지는 마법)
"오빠, 오빠. 있잖아. 꿈이 이번 사고로 청구한 보험금 얼마 나왔는지 알아?" 남편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얼마?" 하는 답이 왔길래, 웃는 손가락에 감정을 가득 담아 답장을 썼다. "000원이나 나왔어." "진짜?"
하하. 그게 뭐라고. 애는 수술로 팔에 핀을 세 개나 박고, 6주짜리 깁스를 하고 있는데 돈이 뭐라고. 나는 행복해졌다. 뭐, 이미 다쳤고, 아픈 건 아픈 거고, 수술은 한 거고, 돈이 생긴 건 좋은 거 아닌가.
여름 방학의 시작. 전혀 예상치 못한 둘째의 골절 사고가 있었고, 다친 줄 알고도 몇 시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수술도 했고, 그래서 더더욱 정신없고 지치는 방학이었는데, 여기에 전혀 예상치 못한 선물이 하나 더해졌다. 각종 항목이 추가된 넉넉한 보험금. 그래. 이래서 세상은 살 만한 게지. 이번 사고로 나는 '보험금 내는 보람'을 함께 얻었다. (굳이 안 얻어도 되는 거지만, 얻으니 또 그게 그렇게 좋았다.)
이런 생각을 하다 보니, 문득 옛날 생각이 난다. 너무 바쁘고 너무 힘들고 모두가 지치던 사무실에서였다. 당시 사원이었던 나에게 과장님이 말했다. "소령, 내 생각에 소령은 여기에서 오래 일할 수 있을 거 같아." "왜요?" "소령은 스스로를 칭찬할 수 있는 사람이거든. 이렇게 칭찬이 없는 조직에서 스스로 칭찬을 찾을 수 있는 건 큰 장점이야." 그랬다. 자주 깨지는 분위기 속에서도 나는 잘 된 것을 찾아내어 헤헤 웃으며 들이밀곤 했다. "저 그래도 이건 진짜 잘하지 않았어요? 이거 너무 뿌듯해요." 라면서. 생각해 보면 그때의 나는 내가 잘한 것에 더 집중하는 사원이었다.
엄마로 사는 날동안도 지치는 일이 참 많았는데, 비슷하게 지나온 것 같다. 그 안에서 소소한 행복이라도 하나 생기면 그걸 부풀리고 부풀려 활짝 웃으면서. 이번 꿈이의 수술은 나쁜 일이지만, 그럼에도 사랑을 나누는 시간이 되어 좋았다. 그때 '띵똥' 입금된 보험금은 조금은 단조로웠던 행복에 탁탁 튀는 불꽃이 되어주었다. 이건 우리 꿈이가 팔 부러져가며 얻은 돈이니, 꿈이가 좋아하는 여행에 써야겠다.
* 덧, 사실 나도 골절이 된 적이 있다. 폐렴에 몇 달을 기침으로 고생한 끝에 얻은 갈비뼈 골절이었다. 정형외과에서는 이걸 '피로골절'이라고 불렀다. 갈비뼈 골절과 기침의 콜라보는 정말이지 너무 괴로웠는데, '골절'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진단서'를 신청해서 받아왔더랬다. 그렇다. 그때도 '이왕 아픈 거 골절진단금이라도 빨리 받아서 맛있는 거 사 먹어야지.' 하는 마음이었는데, 보험사로부터 보험금 지급을 거절당했다. 사유는, 상해로 인한 골절이 아니라는 것. 그런 거였다. '골절 진단금'은 그냥 '골절 진단금'이 아니고 '상해 골절 진단금'이었던 것이다. 기억하자. 사고 골절과 질병 골절은 다르다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