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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쏘냐 정 Nov 02. 2023

초보운전자가 멀리해야 할 것

"오빠, 나 근데 내일도 운전하러 나가기 싫어."


매번 운전을 말리던 남편이 언젠가부터 응원하기 시작했다. 평소에는 회사 셔틀로 출근하지만 사정이 있어 자차출근을 했다 퇴근한 날, 주차하자마자 메시지를 하나 보냈다. "지하 1층, 109동 근처에 주차했어."  아마도 다음 날 또 운전 연습을 하러 나갈 나를 배려하는 마음이었으리라. 


그런데, 나는 그 메시지를 보자마자 도망치고 싶어졌다. 집에서 딱 20분 거리. 같은 곳에 두 번이나 잘 다녀왔다. 게다가 이번에는 꼭 성공하고 싶다는 소망도 강렬하다. 절대 다시 하지는 못할 거라던 운전을 시작한 건, 무른 결심이 아니었다. 절실한 마음을 담은 시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나는 '운전'이라는 단어를 '하기 싫다'는 감정과 동시에 떠올린다. 



원래 나는 겁이 많은 사람이다. 자꾸 새로운 시작을 하는 나를 보며 많은 이들이 내가 대담한 사람일 거라 추측한다. 하지만 한 번도 겁내지 않으면서 시작한 적이 없다. 겁은 나지만 이런 질문을 할 수 있었던 것뿐이었다.


"혹시 실패한다면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일이 뭐야?"


최악의 것. 떠올리면 더 두려워질 것 같은 질문이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최악이라는 게 그렇게 심각하지 않으니까. 내 도전의 수준이 높지 않아서였는지, 최악을 떠올릴 때마다 '이 정도면 해볼 만하잖아.' 할 수 있었다. 덕분에, 책도 썼고, 기부 프로젝트도 했고, 취업도 했고, 글쓰기 프로젝트도 시작했다. 


운전을 두고 똑같은 질문을 했다. 처음으로, 안 되겠다는 답이 나왔다. 운전에 있어 최악의 결과는 누군가의 사망. 어쩌면 사망보다 못한 부상. 그것도 너무나 구체적으로 자꾸만 떠올랐다. 


회사에 다니던 시절, 나는 서울에서 수원까지 출퇴근을 했다. 매일 아침 6시 반에 양재역에서 회사 출근 버스를 타고 고속도로를 달려 회사에 갔다. 그날은 하필이면 버스 운전석 바로 뒤, 버스 정면과 운전석 상황이 모두 잘 보이는 자리에 앉았다.


'어어어, 이거 왜 이래. 어쩌지. 어쩌지.' 운전기사님의 당황스러운 목소리가 너무 명확하게 내 귀에 꽂혔다. 순식간에 나는 공포에 사로잡혔다. 그리고 곧, 쿵. 쿵. 쿵. 버스가 계속 무언가와 부딪혔다. 멈추지 않고 계속 앞의 차를 들이받는 버스 1열에서, 언제까지 이 상황이 계속될지, 혹시 앞 창으로 무언가가 불쑥 튀어 들어오지는 않을지 두려움에 떨며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다 마침내, 차가 멈췄다. 다행히 차가 많아 서행 중이었기 때문에, 내가 탄 버스에 큰 부상자는 없었다. 충돌 시 앞 좌석에 무릎을 부딪혀 통증을 호소하는 몇 명만 구급차를 탔다. 


몇 분, 혹은 단지 몇 초였을 짧고 강한 공포가 온몸을 눌렀지만 아무도 크게 다치지 않았으니 다행이라며 버스에서 내릴 때였다. 그제야 나는 브레이크가 고장 난 듯한 우리 버스가 왜 설 수 있었는지를 알게 됐다. 우리 차보다 네 대 앞에 또 한 대의 버스가 있었는데, 아마도 그 버스가 무게를 버텨주었기에 정지할 수 있었던 것 같았다. 문제는 그 사이에 끼어있는 세 대의 차. 샌드위치에 끼인 야채와 햄처럼 찌부러져 있었다. 파란 트럭 한 대는 짐칸이 완전히 90도로 접혔고, 세단 한 대는 앞차 밑으로 들어갔다. 또 다른 세단은 반쯤 찌부러진 채로 옆으로 돌아 그 사이에 끼어있었다. 


5중 추돌 사고의 현장. 거기에서 나는 차라는 존재의 몸체가 얼마나 허약한지를 목격했다. 게다가 각 차의 강도 차이가 얼마나 큰 지도 알았다. 내가 탄 차보다 단단한 무언가와 부딪히면 종잇장처럼 구겨져버릴 수 있는 게 자동차라는 걸 너무 생생하게 알아버렸다. 


사진: Unsplash의Egor Myznik


가끔은, 그 사고를 경험하기 전에 운전을 시작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생각한다. 다양한 경우를 더 많이 경험했더라면 그때 충격을 덜 받았을까 싶기도 하다. 그 자리에 있었던 모두가 나 같은 공포를 느끼진 않았을 테니, 그저 나의 연약한 마음을 탓해야 하는 건지도 모른다.



무언가를 시작할 때 겁을 낸다는 것. 나는 그것이 나의 완벽주의에서 기인한다고 생각한다. 나의 겁은 어두운 곳, 높은 곳 같은 물리적인 것에 대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 것보다는, 제대로 해내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두렵다. 그러니, 실패했을 때의 최악의 상황을 묻는 것이 통했던 거다. 이 질문은 완벽주의를 내려놓을 수 있게 하는 탁월한 무기였다. 


그런데 운전 앞에서 이 질문은 힘을 잃었다. 그러니 나는 운전을 할 수 없다고 여겼다. 최악의 상황을 극복할 수 없으니 할 수 없을 거라고 말이다. 똑같은 장소에 운전해서 도착한 두 번째 날, 나는 두 개의 실수를 했다. 초록불인데 정지선 앞에 정차했고, 뒷 차가 빵빵거려 정신을 차리고 다시 출발했다. 각이 크게 우회전을 해야 하는데, 속도를 충분히 줄이지 못해 다소 급하게 회전을 했다. 물론, 다른 차선을 침범한다거나 하는 수준은 아니었고, 내 차선 안에서 무사히 해결했다. 실수했지만 큰일 나지 않았다.


운전을 다시 시작하면서, 나의 완벽주의를 새롭게 마주 본다. 정면승부. 누구나 말하는 그 심플한 명제. 원래 완벽한 사람은 없고, 누구나 실수를 통해 배운다는 걸 인정할 때다. 타고나기를 운전이 더 수월한 사람도 있을 수는 있겠지만, 누구에게나 처음이 있었고, 처음에는 실수도 있었을 테고, 사소한 실수들은 웃으며 얘기할 수 있는 추억으로 지나가 버렸다는 것을.. 기억해야지 생각한다.


초보운전자가 멀리해야 할 것. 그건 완벽주의다. 조심하지 않겠다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완벽주의를 내려놓아야 자잘한 실수를 인정할 수 있고, 그것에 대비할 수 있다. 모든 일의 시작에는 어설픈 시기가 있었는데, 어설픔 없이 이룬 것이 하나도 없었는데, 왜 나는 운전만은 처음부터 완벽해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걸까. 그런 일은 전혀 가능하지 않은데 말이다.


초보운전 딱지를 붙인 모든 운전자를 응원한다. 다만, 우리 당황스러운 순간에 만나지는 말자. 둘 중 하나는 능숙한 운전자여야 위기를 피할 가능성이 높아질 테니 말이다. 아직 우리는 완벽하지 않다. 다만, 포기하지 않았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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