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트에서 장을 보고 나오는 길. 마지막 코스. 자율 계산대 입구에 저렴한 와인이 몇 개 있었다. 남편이 그 와인을 보자 물었다. "우리 뱅쇼 만들어서 마실까?" 뱅쇼야말로 이 겨울에 딱 어울리는 음료. 게다가 나는 몇 주째 목감기로 고생하는 중이었다. 뱅쇼는 집에서 타마시던 생강차나 꿀차에 비해 참으로 트렌디하지 않은가. 괜히 기분이 좋아졌다. 그중 드라이한 레드 와인을 하나 골라서 장바구니에 넣었다.
집에 와서 뱅쇼를 만들 준비를 시작했다. 그리고 깨달았다. 우리가 뱅쇼를 위해 산 것은 레드와인뿐이었다. 음, 그 외의 재료들을 살 생각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도 뭐 괜찮다. 완벽한 재료로만 음식을 만들 수 있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이제 우리는 완벽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아는 나이. 완벽하지 않아도 큰일 나지 않는다는 것도 아는 나이. 완벽할 필요는 없다. 그냥 충분히 좋은 정도면 된다. 냉장고를 뒤져보자. 다행히 제주 귤이 있다. 뱅쇼의 기본 시트러스류 하나는 해결된 셈이다. 아침마다 하나씩 깎아먹는 사과도 하나 들어있다. 차이 티를 위해 사둔 시나몬이 있고, 레몬은 없지만 레몬즙이 있었다.
인터넷으로 레시피를 찾으면 레몬, 오렌지, 자몽 등등 다양한 재료들이 나온다. 어떤 레시피는 자몽을 넣으니 특히 맛있더라고 했다. 하지만 없는 자몽은 잊어버리는 걸로. 귤과 사과, 시판 레몬즙과 시나몬을 넣고 약불에 끓여주었다.
이렇게 넣고 30여분을 끓여서 완성!! 한 잔 떠서 꿀을 타니 나에게는 완벽한 뱅쇼. '유럽에서는 감기에 걸리면 이렇게 뱅쇼를 끓여마신다고 하지?' 생각하며 홀짝이다 보니, '근데 유럽 어느 나라에서 마시는 거더라...' 하는 생각이 든다. 뱅쇼에 대한 나의 지식이 이렇게나 얕았다. 그래서 검색을 해본다.
네이버 검색 결과는 뱅쇼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프랑스어로 뱅(vin)은 ‘와인’을, 쇼(chaud)는 ‘따뜻한’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어 따듯한 와인을 의미한다. 와인과 함께 다양한 부가 재료를 첨가하여 끓인 따듯한 음료로 청량한 향미에 매콤하면서 쌉쌀한 맛이 있다. 영어로 ‘멀드 와인(Mulled wine)’이라 하며 영국의 전통적인 크리스마스 음료이기도 하다. 유럽 전역에서 다양한 명칭으로 불리는데 독일과 함께 그와 인접한 프랑스의 알자스(Alsace)와 모젤 (Moselle) 지역에서는 ‘글뤼바인(Glühwein)’이라는 독일어로 불린다. 이밖에 스웨덴, 아이슬란드와 같은 북유럽 국가에서는 ‘글뢰그(Glögg)’, 노르웨이와 덴마크에서는 ‘글록(Gløgg)’, 핀란드와 에스토니아에서는 ‘글뢰기(Glögi)’라 한다. '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뱅쇼 [Mulled Wine] (두산백과)
아, 유럽 전역에서 마시는구나. 아마도 예전에는 알았을지도 모를 지식을 다시 한번 입력해본다. 만들 때는 주로 오렌지와 오렌지의 껍질을 사용하고 사과 등을 추가하기도 한다고 나와있다. 이렇게 보니 우리의 뱅쇼는 충분한 것이 맞았다. 역사를 들여다보니 이집트의 약용 와인에서 시작되었다고. 예상치 못한 의외의 곳에서 뱅쇼는 시작되었다. 레드와인은 좋은 콜레스테롤의 수치를 높이고 나쁜 콜레스테롤의 수치를 낮춘다. 비타민 C도 들어있는데, 뱅쇼에 들어간 과일의 비타민C와 함께 면역을 높이고 감기를 예방하는 역할을 한다. 그래서 뱅쇼는 유럽 전역에서 겨울에 마시는 건강 음료가 되었다.
사실 우리 집 거실은 두 아이의 방학으로 난장판이다. 전쟁터가 따로 없다. 하지만 그 한복판에서 마시는 뱅쇼 한 잔이 나를 유럽으로 데려다 놓았다. 아수라장인 거실을 바라보는 마음이 조금 너그러워진다. 생각해보면 내 마음을 바꾸는 데는 거창한 것이 필요하지 않았다. 사소한 것이 중요하다. 거창한 것은 바꾸기 힘들지만 사소한 것을 하나 더하기는 어렵지 않으니까. 그리고 중요한 것 또 하나. 추억의 힘.
사실 뱅쇼가 날 이렇게 기분 좋게 하는 이유가 있다. 언젠가의 독일 크리스마스 풍경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이런 날 그 풍경이 떠오름이 감사하다. 분명 그때는 꽤나 힘들었다. 입사 1년 차인 나에게는 부담스럽기 그지없는 출장길이었다. 며칠 밤을 새우며 준비한 PT가 여전히 두려웠다. 전에 언급한 적이 있지만 나는 글로벌 마케팅실에서 제일 영어를 못하는 사람. 처음 맞는 해외 미팅에서의 PT는 공포에 가까웠다. 게다가 무리한 덕분에 대상포진을 얻었다. 진통제를 잔뜩 챙겨서 비행기에 오른 길이었다.
독일은 최종 목적지는 아니었다. 러시아로 넘어가는 길 경유를 위해 들른 곳. 하루 1곳씩 3개국에서의 미팅을 진행하는 단 5일간의 출장이었다. 대장정을 시작하기 전 경유를 위해 하룻밤 머문 프랑크푸르트에서 나는 크리스마스를 만났다. 12월 중순의 독일은 너무나 아름다웠다. 저녁을 먹으러 잠시 들렀던 몰은 크리스마스 장식으로 넘쳐났다. 그때는 미팅 부담감에 마음껏 즐기지 못했다. 시간도 짧았다. 그런데 그 풍경이 지금껏 머릿속에 남아있다. 너무나 아련하고 멋진 추억이 되어.
그땐 알지 못했다. 그때의 내가 지금 나에게 이런 미소를 짓게 할 줄은. 삶이란 지나고 보면 이렇게 다른 모습으로 다가온다. 이럴 때는 생각하게 된다. 이 어질러진 거실이 언젠가는 내게 미소를 주는 기억이 될지 모른다고.
뱅쇼 한 잔은 나를 유럽으로 데려다 놓았다. 집 안에서 홀짝거리면서도 괜히 멋진 카페에 앉아있는 양 기분이 좋아졌다. 긴장감 백배였지만 꿈이 가득하던 그때의 나로 돌아간 것 같아서. 아이들과의 복닥거리는 일상 속의 내가 왠지 좀 더 트렌디해지는 것 같은 느낌도 좋다. 그리고 작은 깨달음도 얻었다. 어쩌면 이런 오늘이 눈물 나게 그리운 과거가 될지 모른다는.
덕분에 오늘이 조금 더 행복해졌다. 마트에서 만난 5000원짜리 레드 와인이 참 고맙다. 내일 또 그 와인을 만난다면 한번 더 장바구니에 넣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