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그녀는 퇴사를 했고 나는 시작을 했다

대기업을 퇴사한 두 사람, 우리의 만남

by 쏘냐 정

몇 달 전 그녀의 퇴사 소식을 들었다. 그녀로부터 직접 들은 소식이었다. 그저 메시지로 주고받은 안부. 퇴사의 이유를 물을 타이밍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언젠가 직접 만나 회포를 풀어보리라. 기약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도 코로나는 떠날 생각이 없었다. 몇 번이나 약속을 잡았다가 취소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에게 메시지가 왔다. "우리 당장은 오프라인에서 만나기 힘들 것 같으니 온라인으로라도 만날까?" "OK." 바로 약속을 잡았다. 어젯밤 드디어 우리는 얼굴을 마주했다.


온라인 미팅 룸 입장. 얼굴을 마주한 순간 둘 다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하, 결국 이렇게 만나다니." "이게 온택트 시대지, 뭐." 오랜만에 만났지만 시작부터 우리는 유쾌했다.



그녀가 말했다. "너 요즘 많은걸 하고 있더라." 기억을 더듬어보니 우리의 지난 만남은 작년 초여름 무렵이었다. 그때 아직 회사에 다니던 그녀와 경력 보유 여성이던 나는 실체 없는 사업구상을 했더랬다. 그때 나는 그런 얘기를 했었다. 언젠가는 무언가를 하고 싶다고. 그래. 그때의 나에게는 아무런 계획이 없었다. 진짜로 무언가를 시작할 수 있을 거라는 확신도 없었다. 내가 가진 것은 소망뿐이었다. 희망 없는 소망. 그런 나에게 그녀와 나누는 사업 이야기는 즐겁다 못해 가슴이 벅찼다. 회사 다닐 때 쓰던 일머리를 다시 돌릴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신이 났다. 비록 그저 공상일 뿐이라도 말이다.


어쩌면 그때 이미 내 마음은 움직이고 있었는지 모른다. 그 해 여름, 드디어 나는 움직이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책을 썼다. 4개월을 두문불출하고. 책을 쓰고 나니 세상 속으로 더 나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SNS 세상에 조금 더 적극적으로 나섰고, 오프라인 세상에도 한발 내디뎠다. 머릿속에만 있던 기부 프로젝트를 기획했다. 그리고 그 프로젝트를 세상 속에 내놓는 모험을 했다. 이전과 다른 커뮤니티를 만났고, 새로운 사람들을 만났다. 그 안에서 기회를 얻었고 글쓰기 프로젝트도 론칭했다. 그리고 그다음에 이어진 것은 놀랍게도 '업'으로의 복귀였다.


끝이라고 생각했던 나의 전직. 마케터. 세상 속으로 나서면서 요즘 세상에 마케팅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게 되었다. 나의 마케팅 경력이 버릴 것이 아니라는 것도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다시 마케터로 살아가고 싶다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했을 뿐인데 기회가 나를 두드렸다. 나의 아웃풋들에 마케터의 방식이 묻어난 덕분이었을까. 기회는 계속해서 이어졌다. 참으로 감사하게도.


지난 1년 사이, 나는 작가가 되었고, 기부 프로젝트의 기획자이자 리더가 되었으며, 글쓰기 코칭 프로그램을 이끌게 되었고, 마케터로의 삶을 다시 시작했다.


이제 나의 질문 타임이었다. 친구에게 물었다. 왜 퇴사를 했냐고. 친구는 대답했다. 오랫동안 생각해왔던 일이라고. 우리의 전 직장인 그 회사에서의 미래가 본인이 원하는 미래와는 조금 달랐노라고.


그녀는 나의 전 직장 첫 부서 동기였다. 지금도 기억이 선명한 그 시절. 내 회사생활을 통틀어 가장 치열했던 그 시기를 함께했다. 그때 그 부서의 특성상 신입사원임에도 그 이상의 일을 해야 했다. 나는 A파트에서, 그녀는 B파트에서 각자의 업무를 꽤나 제대로 해나갔다. 성과도 있었고 인정도 받았다. 힘들 때면 의지가 되기도 했던 여전사 같은 그런 친구였다. 이 회사 안에서 계속해서 역량을 발휘할 사람. 내 주변인들이 나를 그렇게 보았던 것처럼 나는 그 친구를 그렇게 봤었다.


그렇지만 이제 그곳은 더 이상 우리의 직장이 아니다. 나는 엄마가 되며 퇴사를 했고, 그녀는 새로운 곳에 자리를 잡았다. 이제 나도 그녀도 새로운 꿈을 꾼다.


회사를 나와서 나는 새로운 세상을 만났다. 그리고 새로운 꿈을 꾼다. 회사를 나왔기에 포기한 것이 많은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반대급부로 얻은 것 역시 너무 많다. 모든 것을 잡을 수는 없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중 무엇을 취할 것인가를 선택하는 것. 나는 지금 가슴 뛰는 일을 하고 있음에 만족한다. 사랑하는 것들을 지켰고, 나를 찾았다. 어느 하나를 완전히 포기하지 않고 양립할 수 있는 오늘을 만났다. 완전히 포기하지 않은 대신 적당히 포기해야 했지만, 그 포기가 슬프지는 않다. 그래서 지금 나는 그녀의 퇴사 역시 응원하고 싶다.


나에게는 어쩔 수 없는 이유가 있었다. 그만두어야 할 확실한 외부적인 이유. 하지만 그녀의 선택은 그렇지 않다. 꼭 그래야만 하는 이유가 없는 퇴사. 그저 머무는 것이 당연한 듯 느껴졌을 그런 퇴사. 그래서 그녀를 더 응원하고 싶다. 그녀의 선택이 그녀를 웃음 짓게 하기를. 그녀의 앞날이 더 행복하기를. 우리의 미래가 가슴 뛰는 일들로 채워지기를.


오랜만에 그녀와 대화하며, 그때 그 시절, 풋풋했던 우리가 떠올랐다. "안 되면 되게 하란 말이야."를 외치던 상사 밑에서 어벤저스가 되어가던 그때의 우리가.... 15년이나 지났지만, 그때와 지금, 상황도 생각도 많이 바뀌었지만, 나는 믿는다. 우리는 여전히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거라고.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케이퀸 서류심사에 합격하고 알게 된 것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