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 얘 이렇게 쪼끄만데 안경을 쓰고 있네. 뭘 어찌했길래 어린애가 눈이 나빠졌지?" 세상엔 이렇게 무례한 사람이 많다. 안경을 쓴 6살 첫째와 키즈카페를 갔다가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안경을 쓴 어린애'인 첫째는 내 바로 앞에 있었고, 그들은 바로 옆에 있었다. 속삭임도 아니었다. 숨기지도 않는 목소리로 일행과 대화하는 중. 내 귀에 또렷이 들렸으니 아이 귀에 들리지 않았을 리 없다. 지금 이 순간만은 우리 아이 이해력이 떨어지기를. 저 말이 비난을 담고 있음을 절대 알아차리지 못하기를. 나는 이미 울려 퍼진 그들의 목소리가 흩어져 없어지기를 바라면서 아이에게 더 큰 소리로 떠들었다. "오늘 지이인짜 재밌었지?"
2017년 어느 날, 안과를 지나다가 지인에게 들었던 말이 생각났다. "6살쯤 되면 소아과 말고 안과에서 시력검사를 제대로 받아보는 게 좋대." 마침 시간 여유가 있었고 유리창 안으로 훤히 들여다보이는 안과 역시 한가해 보였다. 아무 생각 없이 들어가서 접수를 했고 시력검사를 받았다. 얼마 전 영유아 검진에서도 양안 1.0이 나왔던 아이이니 아무 문제없을 거라 생각했다.
"축복이 눈이 많이 나쁘네요. 정밀 검사를 해봅시다. 약물 검사를 해봐야 정확한 걸 알 수 있거든요." 시력판을 읽는 아이 옆에서 이미 당황스럽긴 했었다. '왜지? 왜 0.6부터 읽지를 못하는 거지? 시력판의 그림이 안 보이는 게 아니라 뭔지 애매해서 답을 못 하는 거 아닐까?' 믿고 싶지 않았다. 내 아이가 눈이 나쁘다는 걸. 약물을 이용한 정밀 검사를 하고 나면 정상이라고 나올 줄 알았다. 나이에 비해 의젓하고 착한 아이는 넣을 때마다 따갑다는 안약을 넣고도 잘 참았다. 옆에서 같이 검사를 하는 누나가 약을 넣을 때마다 소리 지르며 우는 걸 보면서 '왜 그러지?' 하면서. 그리고 검사 결과가 나왔다.
"안경을 써야 할 것 같아요. 아이의 시력 발달이 잘 안 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일단 원시가 있고, 약시끼가 약간 있는데 이건 좀 더 두고 봐야 할 것 같아요." 시력 발달에 장애가 되는 요인은 황당하게도 속눈썹이었다. "속눈썹이 눈을 계속 찌르고 있어요. 그래서 각막에 자꾸 상처가 생기고. 그게 시력발달을 방해합니다. 상황을 보다가 발달이 너무 늦어지면 수술을 해야 할 수도 있어요. 가림 치료를 해야 할 수도 있는데 그것도 필요해지면 대학병원으로 갈 수 있게 연결해드릴게요."
아이는 양쪽 시력이 차이가 나는 짝눈이었다. 한쪽 눈 속눈썹 찌름이 심했고 그로 인해 나타난 문제였다. 문득 내 어린 시절이 생각났다. 중학교 때였던가, 칠판 글씨가 잘 보이지 않아서 찾았던 안과에서 짝눈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오른쪽 눈은 1.0이 넘는데, 왼쪽 눈은 0.4까지 떨어져 있었다. 안경을 맞췄다. 한쪽에는 도수가 있고 한쪽은 도수가 없는 안경이었다. 시력 차이가 많이 나다 보니 안경에 적응하기 힘들었고 가방에 넣어 다니며 꼭 필요할 때만 꺼내 쓰다가 대학교 때 라식 수술을 했다. 그 당시에 나는 한쪽 눈만 심하게 나빠진 이유가 어릴 적 왼쪽 눈을 다쳤던 탓이라고 여겼었다. 어릴 적 모르고 바닥의 철심을 밟았다가 그 발을 떼면서 철심이 탄력을 받아 튀어올랐는데 하필 왼쪽 눈을 강타했다. 시력이 안 나오는 눈이 하필 그쪽 눈이었고 그게 이유라고만 생각했는데 어쩌면 지금도 나를 괴롭히는 속눈썹이 이유였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그제야 들었다.
당장 수술을 하자는 것도 아니고, 가림 치료를 해야 하는 것도 아니고, 대학 병원에 가야 하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아직 어린아이가 안경을 써야 한다는 것만으로도 너무 속이 상했다. 혹시 모르니 소아전문 선생님에게 진단을 한번 더 받아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대기가 길고도 길었던 그 병원에서 잠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는 2살 둘째를 데리고 대기하면서 진을 다 뺐을 때쯤 첫째의 진료 차례가 다가왔다. 안경을 꼭 끼어야 하는지 묻는 내게 의사 선생님은 짜증을 내듯 말했다. 지금 그런 걸 물을 때가 아니라고. 지금 안경을 껴주지 않고 시기를 놓치면, 안경으로도 시력교정이 되지 않는 상태가 된다고. 다시 동네 병원으로 돌아와 안경을 맞췄다. 3개월에 한 번씩 정기 검진을 하고 1년에 한 번 약물을 이용한 정밀검사를 한다.
아이는 안경을 좋아했다. 심지어 친구들은 안경 쓴 아이를 부러워하기까지 했다. 아이들의 시선은 어른들의 그것과 달랐다. 그런데 엄마인 나는 안경 없이 볼 때 더 예쁜 아이의 눈을 볼 수 없어 늘 속상했다. 그보다 더 속상한 건 어른들의 시선이었다. 왜 어린아이가 안경을 쓰는지 아이 앞에서 대놓고 묻는 이들도 많았고, 아이가 영상을 많이 보니 그런 거라고 넘겨짚는 이들도 많았다.
아이가 그런 소리를 들어야 해서 더 속상했던 건, 우리 첫째는 영상을 볼 줄 모르는 아이였기 때문이다. 그것도 엄마인 내가 제한을 해서 그런 것도 아니다. 겁많은 평화주의자였던 아이는, 영상을 보다 보면 나오는 모든 갈등 상황을 무서워했다. 심지어 뽀로로를 보여줘도 뽀로로와 친구들이 다툴 때마다 울어버려서 영상을 보여줄 수가 없었다. 아이가 안경을 쓰게 된 건 이 아이가 무언가를 잘못해서가 아니다. 그저 눈을 찌르는 속눈썹을 가지고 태어나서였다.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이 아이를 두고 아무 말을 한다. 아무것도 모르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이야기들. 궁금하면 물을 수도 있는 일이다. 하지만 제발 아이가 듣지 않는 곳에서 나에게만 살짝 물어달라고 말하고 싶었다. 넌지시 묻는 엄마들의 궁금증은 괜찮았다. 오히려 더 적극적으로 알려주곤 했다. 자신의 아이를 위해서 궁금했던 걸 테니까. 하지만 지나는 사람들의 도가 넘는 오지랖은 언제나 기분이 나빴다.
다행히 9살이 되던 해, 시력이 잡혔다는 기쁜 소식을 들었다. 당장 안경을 벗어도 되지만 중2까지는 시력을 보호하는 차원에서 계속 쓰는 게 좋다고 했다. 약시가 생길까 걱정이 되는데 중 2가 지나면 그런 위험이 사라지니 그때까지는 끼는 게 좋겠다고. 당장 안경을 벗을 수는 없지만 중 2 이후 살 날이 훨씬 훨씬 많을 테니 그저 기뻤다. 아이의 눈이 그저 시력발달이 더뎌서 나타난 원시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시력 발달은 만 9세까지 진행되기 때문에 그전에 문제를 발견하면 시력발달을 도울 수 있다. 의사 선생님도 아이의 시력을 보고 기쁘셨던지 그 자리에서 지난 기록들을 쭉 확인했다. "정말 운이 좋아요. 그래도 어릴 때 발견해서 이렇게 시력을 잡을 수 있었어요. 엄마가 그때 안과에 잘 온 거예요." 딱히 표정 변화가 없는 선생님의 환한 미소를 그날 처음 봤다.
그로부터 1년, 지난주 또다시 정밀 검진을 받은 날. 검사 결과를 보면서 의사 선생님과 나는 다시 갸웃거려야 했다. 하아, 한쪽 눈 시력이 다시 떨어졌다. 이번에는 근시란다. 이제 막 안경을 쓰기 시작하는 다른 친구들과 같은 라인을 타기 시작한 거다. "선생님, 근시가 생겼으면 이제 중 2가 돼도 안경을 벗지 못하는 건가요?" "일단 두고 봅시다. 양쪽 시력이 많이 차이가 나서 이제 정밀 검사를 6개월에 한 번씩 해야 할 것 같아요."
요즘 초등학교 고학년만 돼도 안경 끼는 아이들이 그렇게 많다고 한다. 그저 엄마 마음에, 그래, 이기적인 마음에, 우리 아이는 어릴 때부터 썼으니 커서라도 안경을 벗으면 그냥 쌤쌤이 되는 거지 생각했다. 아직 어려서 안경 간수조차 어려운 나이에 끼기 시작한 안경. 미세먼지로 마스크를 쓰는 날이면 안경에 김이 서렸다. 어른이라면 알아서 닦고 쓸 텐데 아이는 뿌연 안경을 그대로 쓰고 다녀 마음이 아팠다. 겨울이면 실내에 들어올 때마다 안경이 하얘졌다. 그럴 때 역시 아이는 안경 닦을 생각을 하지 못하고 김이 저절로 사라질 때까지 뿌연 채로 돌아다니곤 했다. 그래도 시력만 올라오면 커서는 벗어도 된다니까 그게 보상이 될 거라 생각했는데. 하아. 역시 그건 엄마의 바람일 뿐이었다.
지금도 안경을 쓰는 남편은 무심한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 "나는 어차피 안경 못 벗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축복이가 안경을 벗는 날이 올 거라고 생각하는 내가 너무 허황된 기대를 한 거라고. 그러면서 덧붙인다. "안경 쓰는 것도 나쁘지 않아. 나는 지금까지 한 번도 안경이 불편하다고 생각한 적이 없어. 오히려 안경 쓰면 보기에도 더 나은 것 같고." 생각해보면 축복이도 그렇다. 여전히 안경 끼는 걸 좋아한다. 그래 뭐. 안경이 대순가. 단지 시력이 좀 나쁜 것뿐인 걸. 내려놓자. 이제. 안경을 벗을 수 있다는 의미 없는 기대 같은 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