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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태경 Sep 17. 2021

딸냄, 이 빵은 살도 안찐데이~ 그래도 많이 묵음 찐다

버터 NO 밀가루 NO 오븐 NO

이게~ 이기~ 이럴 수 있는기가!!!

기대라고는 애시당초 하지 않았다.

한 입 뜯어 문 순간, 머리 위로 수많은 느낌표!!!가 날아다닌다.

눈에는 하트, 채 삼키지도 못하고 우물거리는 입에서 터져 나오는 잔망스러운 탄성.


어디 맛으로만 본다면 더 맛난 것들이 없겠는가.

외할머니가 직접 담근 육젓으로 버무려 주신 고들빼기김치.

묵은 김치를 넣어, 포슬하게 두부를 짜 넣고, 쫑쫑 썬 당면의 찰진 식감이 어우러진 칼칼한 김치만두(기억만으로도 침샘을 자극하네. 무꼬잡다~).

처음 갔던 호텔 레스토랑의 고급진 분위기와 음악, 혀끝에 감돌던 스테이크의 육즙, 영화 속(지금이야 흔해진 스테이크겠지만 예전에는 귀한 음식이었다) 주인공이나 된 듯, 최대한 우아하게 칼질을 했던 값비싼 맛난 기억.

코 찔찔 어린 시절, 띠기 아줌마 곁에서 하트 모양을 침 발라가며 떼어먹던 달고나의 달달한 추억.

생에 첫 피자는, 치킨은 또 얼마나 맛있었던가.

처음 접해 본 맛들이 오래도록 잊혀지지 않고, 제일이지 않나 싶다.

살아온 날이 쌓이다 보니 수없이 다양한 맛의 기억들이 있다.


요리를 좋아라 하니 얼마나 많은 요리들을 해봤겠나.


특별한 외식을 하고 돌아온 날.

처음 맛보는 것들은 잊지 못하고, 집에 와서 비슷한 향신료라도 구해서 맛을 재현해 봐야 했다.

한식, 일식, 중식, 양식, 퓨전요리, 간단한 제빵과 떡.


극히 개인 취향일 수 있겠다 싶지만, 이 요리법은 참하다.

달걀, 단호박, 설탕, 소금, 전자레인지.(반죽 위에 올리는 견과류는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 당연히 있으면 두 말 할 필요없이 더 맛있어지겠지만)

- 끝 -

제빵에 기본으로 사용하는 버터며, 밀가루는 없어도 된다. 오븐도 필요 없다.


평소에  단 걸 좋아하는 입맛이 아니라, 주전부리 빵과 과자를 굳이 사다 놓고 즐기는 편이 아니지만, 가끔은 진한 커피 한 잔에 폭신한 빵 한 조각이 미치도록 먹고 싶어질 때가 있다.

오늘이 딱 그날.

달달한 생각으로 뒹굴거리다 문득 어디서 봤는지 모르겠는데, 메인재료 두 가지만 있으면 빵을 만들 수 있었던 게 떠올랐다.

냉동실에 삶아 넣어 놓은 단호박이 퍼뜩 생각나 뒤져보니,

‘나 여기 있었어요’

환하게 대답하듯 싸여진 비닐 사이로 노란 속살을 비집고 화답을 한다.



단호박 양을 보니 대충 달걀 2개면 될 것 같으니 재료 준비는 이게 다다.

달걀 2개를 흰자 노른자 분리해서, 흰자로 머랭(달걀흰자에 설탕을 넣어 만든 거품)을 만든다. 거품내고 마지막 즈음 기호에 따라 설탕을 넣는다.

양이 적으니 거품기로도 충분히 가능하다.

다만, 유튜브 영상이 필요하다.

적은 양이라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지만, 단순 반복 지겨운 작업이라 정신 팔 대상이 필요하다. 그래야 팔이 조금 덜 아픈 거 같다.



젠장할~ 내가 왜 이걸 해먹을 생각을 했을까. 프레드 머큐리의 ‘보헤미안 랩소디’에 맞춰 절규를 한다.

미련한 짜증에 휘젓는 속도감이 현저하게 떨어질 즈음이면, 하얀 구름 같은 풍성한 머랭이 만들어진다.

얼려놨던 단호박을 해동시켜, 분리해 놓았던 노른자와 함께 소금 한 꼬집을 넣어 으깬다. 취향에 따라 곱게 으깨지 않고, 작은 덩어리가 있어도 괴안터이다.

수분이 많게 쪄진 단호박이라 물이나 우유를 첨가하지 않아도 되었다.

노랗다.

붓으로 찍어서 노란 개나리를 그려 놓으면 물들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샛노랗다.



국그릇에 만들다 보니 소꿉장난 같으다.

소꿉장난하던 추억 속의 꼬맹이 그 눔은 지금 어디 살런지.

여보, 당신 하며 가짢게 살림 놀이를 했더랬는데, OO아 너도 흰머리가 나기 시작했겠구나.

그렇게 죽고 못 살 것처럼 좋아하더니 잘살고 있는 거지?


샌다.

또 생각이 삼천포로 빠진다.

얘기하다 옆길로 새던 울엄니가 그렇게 싫었는데 이제는 내 일상이 되었다.

ㅠㅠ 나쁜 기집애 딸아이가 머리 컸다고 지적질을 한다.

그랴 누굴 닮았겠노, 그 엄마에 그 딸이지.

이뇬아, 니두 내 나이 되어봐라. 복수가 따로 있나.

그르네, 그런 거네, 내가 그 복수를 받고 있는 거네.

그래 까짓 거 그런 게 인생 아니겠어.


어디까지 했더라.

노른자와 섞어 놓은 단호박에, 머랭을 조금씩 넣어가며 아기 어르듯이 살살 저어준다.

단번에 넣고 저으면 거품이 죽어버린다. 거품을 죽이면 안되그등.

내열유리그릇(양이 적으니 반찬용 유리그릇으로도 충분)에 카놀라, 포도씨, 콩, 옥수수기름 중 있는 거 발라준다.(익은 후 홀라당 떼어내기 용이하다)

흰 머랭과 샛노란 단호박 반죽이 섞이니, 노르스름하니 곱다.

반죽을 담고 보니 어째 심심하다. 데코가 없으니 앙꼬 없는 찐빵 같다.

대충 뒤져보니 딸냄이 먹는 아몬드, 호박씨를 찾았다. 흐뭇하다.

또 뭐가 없을까?

얼마 전 만들어 놓은 푸룬(말린 자두)이 생각났다.

딸아이가 즐겨 사 먹는 푸룬. 몇 알 들어 있지도 않는데 딥따 비싸길래 피자두로 만들어 보았다.



ㅠㅠ깜빡하고 위아래 바꿔주는 걸 잊고 잠들어 버린 탓에 말캉해야 맛있는데 딱딱해져 버렸다.

그래도 건조기 6단을 말렸으니 얼마치야.(속물이어도 상관없다. 마냥 뿌듯하다)

푸룬을 잘게 잘라 올리니 그럴듯하다.



익기도 전에 만족감이 밀려온다.

자뻑이다.

랩으로 덮어 전자레인지에 넣고, 5분이면 된다.

더도 덜도 말고 5분.

성질은 어찌나 급한지 궁금한 건 못 참는다.

마려운 소변은 왜 참고 있는 건지. 남이라면 알다가도 모를 행동, 나도 내가 웃기지만 기대감에 사뭇 진지하다.

전자파가 안 좋은 걸 알면서도, 전자레인지 창에 코를 박고 들여다보는데 익어가는 냄새가 마렵던 쉬야도 잊게 한다.(절대 소변을 참으면 안 된다. ㅠㅠ방광염은 고통스럽기 때문이다)

띠링~

짧은 기다림을 보상하듯 완료 알림음이 뜬다.



이거 내가 한 거 맞어?


전자레인지를 열자, 후각을 때리는 고소한 향.

한 입 베어 물면서 벌써 행복해진다.

이걸 누구한테 맛 보여 줄까.

내가 어려울 때면 나타나는 황금박쥐 같은 OO이,

나의 맥가이버 OO,

빵을 좋아라 하는 서울 언니네,

늘 내 건강을 책임져 주는 OO이며, 만들어 주고픈 사람들이 줄을 선다.

가만있자.

머랭이 문제다. 거품을 쳐야 할 내 팔. 지금도 마동석 만만치 않은데, 더 굵어지겠군.

고민을 해 볼 일이긴 하지만, 빵이 식기를 기다리지 못하고 귀퉁이를 떼어먹으며 행복한 상상을 한다.

쿠팡에서 사면 더 싸려나? 동네 슈퍼가 더 싸려나? 단호박 시세를 뒤져본다.




많은 것을 담지 않아도, 비싸고 귀한 것이 아니어도 생각하기에 따라 가치가 달라진다.

욕심은 밑 빠진 독과 같아서 끝이 없다.

채우는 것보다 비우는 것이 우선이다. 잃을게 적어지니 맘이 편해지고, 질적인 만족감도 달라졌다.

특별하지 않고, 흔한 재료로 이토록 행복해질 수 있으니 세상살이 뜻밖인 곳에서 깨달음을 얻는다.  

불법을 닦으러 당으로 가던 원효대사가 잠결에 목이 말라 마셨던 물이, 아침에 일어나 보니 해골 속 더러운 물이었다. 그에 깨달음을 얻고 다시 돌아왔다.

세상 모든 것이 내 마음먹기에 달렸음을, 요리(해골 물은 아니지만)를 통해 뜻하지 않게 깨달았으니(그렇다고 내가 큰 그릇이 되었다는 얘기는 아니지만)

깨우침을 건진 하루였다.

오늘 하루도 잘살았으이.

쓰담 쓰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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