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최태경 Mar 30. 2022

기억을 딛고 오르는 뒤죽박죽 추억등반

노래는 갬성을 타고 (봄날은 간다-백설희, 빌리 조엘-Honesty)

하얀 무서리 시퍼렇게 시린 겨울.

언 손을 비비며 마음속에 그리는 봄은 매번 특별하다.

차가워진 곱은 손을 열이 나도록 비빈다. 온 천지에 온기가 돌면 앙상한 나무에 어김없이 뽀얗게 물이 오를 것이다. 내 마음에도 뽀샤시한 봄빛이 물들기를 바라본다.


맘이 싱숭생숭하여 뭐를 해도 손에 잡히지 않는 밤. 마실을 나섰다.

앞섶을 비집고 스며드는 바람에서 봄이 느껴진다. 봄은 슬그머니 바람을 타고 오는가 보다.

집 인근에 있는 공원길을 걷는다. 조로록 키 작은 봄꽃들이 심어진 아담한 길이다.

 ‘나를 사랑해 주세요’ 말하는 팬지, ‘사랑의 추억’을 담은 비올라, ‘평화’와 ‘희망’을 얘기하는 데이지, 꽃마다 아름답고 애달픈 설화를 품었다. 아파도 사연이 있다는 건 아름다운 일이다.

이리 근사한 꽃길을 거니는데 음주는 없어도 가무?가 빠질 수 있겠는가.


—봄날은 간다(백설희)

https://youtu.be/FBf6MhSwuYk

요즘 재미를 붙인 기타로 어설프게나마 연주하며 노래하는 곡이다

어릴 적부터 이런 노래를 흥얼거린 걸 보면, 뜨거운 열정만이 흐를 것 같은 핏속에 코끝 시큰거리는 청승을 갖고 태어났나 보다.

장사익 선생님 버젼도 좋지만, 백설희 선생님이 부르는 원곡이 주는 짜랑거림과 레트로 감성 자극하는 연주가 매력적이다.

원곡이 어찌 되었든 내가 부르는 노래는, 콩나물 대가리 촘촘한 악보를 잘 볼 줄은 몰라도, 순간의 감성에 따른 개사와 화려한 편곡(편곡이 뭔가요?ㅋㅋㅋ)을 넘나들며, 콧소리 간들어 지는 트로트 버전. 봄날으은~ 가아안다으아아아아~~ 일명 ‘꺾기’ R&B 버전. 입에 문 달콤한 사탕처럼 입안에서 데구루루 연거푸 구른다.

노래야 음치 박치 들어줄 수 없는 수준이겠지만, 어디다 내놔도 뒤지지 않을 정도의 소울.. 갬성만은 일류다.

아싸라뷰우~~~(혹여, 산책길에 곱슬머리 산발하고 흥얼거리며, 훈훈한 몸매를 흔들거리며 걷는 여인네를 만나면 이 글의 쥔장 일 수도 있으니, 바람~~이리 슬쩍 불러주세요ㅎ. 그런 행운이 온다면 제가 차 한 잔 대접해 드리겠습니다)


그렇게 콧노래 흥얼거리며 걷다 올려다본 건물 4층, 안이 훤히 들여다 보이는 곳에 눈길이 머문다.

실내암벽 등반. ‘암벽등반’ 단어만으로도 떠오르는 이름 석 자 김ㅇㅎ.

풋내 가득한  시절에 만났다.

지금 생각하면 촌스럽고 간질거리는 미팅에서, 잘 웃고 동그리한 얼굴의 선한 그가 맘에 들었다.

그는 친구네 집에서 자취를 했다. 집주인이었던 친구 본가는 시골이었는데, 자식 셋이 도시로 유학을 나와 자취를 해야 하는 상황에서 따로 방을 얻어 주는 것보다는  맏이가 오빠이니 같이 살면 든든하겠다는 생각에, 학교 근방에 단층 주택을 얻어줬던 거 같다(집이 부유했나 보다). 남는 방들은 학교 친구들에게 세를 놓았다. 내가 세를 얻어 사는 것은 아니었지만 문턱이 닳도록 드나들었다. 제집인양 드나들었던 게 어디 나뿐이었겠는가. 덕분에 그곳은 불티나는 호떡집 같이 늘 시끌벅적거렸다.

어른들의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되고, 사랑에 들뜬 이의 볼따구니 마냥 후끈거리는 그곳이야말로 우리만의 파라다이스였다.

지금의 내가 그 부모 입장이었다면 절대, 저얼대~ 그리 집을 얻어 주지는 않을 것이다.  혈기왕성한 아그들만 모였는데 뭔 일이 나지 않겠냐고요.

아니, 그렇다고 우리가 뭔 일을 냈던 건 아니였다. 끼리끼리 모인다고 다들 착하고, 순진한 녀석들만 모였던지라, 내가 아는 바로는 별?일은 없었다.


하루는 산악 동아리 멤버인 그를 따라 암벽등반 구경을 갔다.

해보고 싶은 게 많은 나는 궁금하면 겁도 없이 일단 덤비고 본다.

위험한 일을 자처하는 것으로만 보였던 암벽등반.

왜? 목숨을 담보로 걸며, 아찔한 암벽을 기어오르는 것일까. 자일에  매달려 위험천만 암벽을 오르는 그들을 밑에서 올려다보다 문득 궁금해졌다.

직접 해보면 알려나?

그래서 덤볐다.

기본도 모르는 초짜가 해보겠다고 고집을 피웠으니, 얼마나 민폐였을까. 분명 곱지 않은 눈빛으로 레이저를 쏴댔을 텐데, 그때는 눈에 뵈지 않았으니 일명 재수탱이(진상)였으리라.

그는 무슨 맘이었는지, 암벽에 자일을 두 개 걸고(맞는 표현인지는 모르겠음), 에스코트 해준 덕분에 A지점(비교적 난이도가 약한 입문코스)에 오를 수 있었다. 평소에 운동을 좋아하는 덕분에, 사지 버들거리기는 했어도 목표지점에 가닿았다.


그러니 보이는 너른 세상.

아래로 물 흐르듯 굽이쳐 흐르는 능선, 융단처럼 깔린 푸른 숲, 불어오던 바람이 암벽에 부딪혀 위로 거슬러 오르는 거친 바람.

아주 오래된 기억임에도 신선하고 놀라운 추억이다. 잊고 싶지 않은 기억이다.

살면서 꼭 다시 해보리라 다짐했건만 그게 쉽지만은 않은 일이다. 허리가 탈이 나기 전에 실내 암벽이라도 도전을 했어야 하는데, 것도 이제 쉽지 않다.

나이가 용기를 무력화시키고, 도전 앞에서 의지마저 굴복시키고 만다. 무기력하고 서글프니 이런 것이 나이 듦의 서러움이겠지.


나의 모난 부분까지 아껴주던, 참으로 아낌없이 사랑 해주던 사람이었는데, 운명은 그와 다른 길을 가게 했다.

살면서 때때로 그가 생각나는 걸 보면, 무섭게 파도치듯 밀어붙이는 그의 사랑이 버거워 도망쳐 버린 내가 바보였을지도 모르겠다.


넋 놓고 한참을 실내암벽 등반장 창을 바라보며 뒤죽박죽 옛일을 추억했다.

진짜 저걸 해보고 싶은 건지, 무모한 내게 뜻밖의 세상을 선물해준 그가 보고 싶은 건지 모르겠다.

날 닮은 여자를 만나 결혼했다는 얘기를 들었다. 누군가의 남편이고, 아빠로 살고 있겠지만, 뭐 어때? 보고 싶은 맘이 드는걸.

성실한 사람이었으니 잘살고 있으리라 믿는다.


김ㅇㅎ.  그때 상처 줘서 미안해.


길어진 마실길에서 돌아오면서 그가 좋아하던 노래를 찾아 듣는다.


— 빌리 조엘의 Honesty

https://youtu.be/SuFScoO4tb0




작가의 이전글 애지중지하던 내 새끼들을 버려야만 했던 그날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