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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태경 May 10. 2022

쑥개떡

산을 가로질러 터널이 생기고 지금은 인적이 뜸해진 꼬부랑 옛 산길 도로. 으스스한 비 오는 날에는 처녀 귀신이 출몰한다는 마티고개.

오랜만에 서울에서 내려온 언니와 공주 쪽으로 드라이브를 나갔다 돌아오는 길에 옛길을 찾아 진입로마저 애매해진 좁은 길로 어렵사리 접어들었다. 뒷자리에 타고 있던 딸아이가 조용하다 했더니만, 꼰대들의 앞뒤 없이 전개되는 꾸질한 노잼이었을 얘기와 밀려든 춘곤증으로 잠이 들어있었다.

마티고개를 넘어서기 전 산 중턱에 차를 세웠다.

인적이라고는 한참 만에야 차 한 대가 지나가고, 힘겹게 자전거를 타는 라이더만 보일 뿐이다.

높은 곳에서 내려다 보이는 산자락을 굽어보며 케케묵은 옛이야기에 키득거리며 망중한을 즐겼다.


제법 풀들이 억세지는 시기일 텐데 나무 그늘 풀숲에 숨어 웃자란 쑥들이 야들야들해 보인다.



색감도 어찌 그리 온순해 보이는지

'날 데려가 주세요. 부디 쑥개떡을 만들어 주세요’

이리 속삭였다.(믿거나 말거나 말입니다)

우둑우둑 새순만 잡아 뜯었는데도 잠깐 사이에 솔찬하다.


손으로 쥐어뜯어 강하게 나는 쑥 냄새도, 여름이 다가오는 꽃향기를 머금은 산내음도, 저만치 금강 줄기를 타고 올라오는 시원한 바람에 더없이 근사한 행복을 느낀다.

매일 이런 날만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이제는 안다.

절실히 바람하고 기원한다 하여도 행복은 늘 곁에 있지 않다는 것을, 비바람과 같아서 언제 불현듯 왔다 갈지 모르는 것이 행복이다.

삶을 이리 꿰뚫고 있음은 오랜 시간 많은 것을 겪으며 좌절하고 인내하는 시간을 살아왔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은 나이를 먹으면 노련함도 생기고, 셈이 빨라지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나란 사람은 많이 모자란가보다 매번 셈하기가 어렵고 어리숙한 게, 언제쯤 현명한 사람이 될는지 세상살이가 수월치가 않다.




다리 수술 후, 토실이가 된 딸아이가 내일부터 다이어트에 돌입한단다.

살빼기연합연대에 하필 나까지 합류를 시켰다. 하긴 녀석보다는 내게 더 절실한 일이긴 하지만, 한 끼만 안 먹어도 손이 떨리고, 다리가 후들거리는 걸 니가 알랑가몰것다.

다이어트도 젊을 때 해야 탈도 적으니 빡시게 하라며 응원을 해줬다.


머피의 법칙.


꼭 그럴 때는 생각나지 말아야 할 것들이 생각난다.

얼마 전 만들어 놓은 쑥쌀가루가 냉동실 문짝 선반에 있음을 떠올릴 게 뭐란 말인가.

금괴라도 찾은 양 웰케 반가운지.

옛날에는 매년 해주던 걸, 몇 해를 걸렀으니 딸아이의 반응은 Good~~.

그래 오늘까지만 먹자. 대신 샐러드랑 먹는 거다. 암만, 풀떼기랑 먹는 거니 좀 봐줘야지.


쑥과 멥쌀을 섞어놓은  쌀가루에 뜨거운 물로 익반죽을 한다.

맛난 것을 향한 열정으로 흥이 났는지 딸아이 손에서 찰딱찰딱 찰지게 반죽이 되어 간다.

콧노래까지 간이 섞이니 배꼽시계가 조급한 보챔을 한다.



조물조물 만들기 놀이시간 인양 떡 빚는 딸냄은 신이 났다.

뜬금없이

“조금 하는 건데도 이렇게 힘든데 외할머니는 혼자 떡집을 하셨으니, 얼마나 힘드셨을까?”

세상에서 외할머니가 제일 좋다는 아이의 입에서 나온 얘기에 문뜩 뭉클해진다.

기계의 힘을 빌려 했으니 그나마 수월했을 거야. 말은 그렇게 했지만, 어찌 수월한 일이었겠는가.

바짝 굽은 엄마의 등이 가슴 아리게 떠오른다.


쪼물락쪼물락 ‘넌 할 수 있어!’라는 응원의 말에 날아오르는 아기코끼리 덤보도 만들어지고, 벌꿀을 좋아라하는 귀염둥이 곰돌이 푸, ‘네가 오후 네 시에 온다면, 난 세 시부터 행복해지기 시작할 거야.’ 라고 어린 왕자에게 말하던 사막여우도 빚어지고, 앨리스가 이상한 나라로 따라간 시계토끼도 만들어졌다.


김이 오른.찜기에 올려 10분 정도 쪄준다.



쪼물거리는 건 딸인데 더불어 신이 난다.




모른 채 지나쳐버렸을 쑥을 뜯어 반죽을 만들고 잘 빚어,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찜기에 올려져 알맞은 시간이 지나고 나면, 반지르르 윤기 흐르는 빛깔 고운 쑥개떡이 된다.

참으로 맛나다.(어릴 적 할머니가 맛있는 음식을 드시면 하는 감탄사였다. 음식에 대한 감사한 마음이, 충만함이 배어 있는 말이다. 참으로 맛나다. 고운 은빛 머릿결을 가진 할매요 보고 싶당께요~)

번거로운 일련의 과정들을 거쳐야 한입 가득한 행복한 맛을 느낄 수 있듯이 기다리고 인내하다 보면 필시 호시절이 오리라는 걸 알아줬으면 좋겠구나.



봄내음 가득 머금은 쑥개떡을 콩고물에 콕~ 찍어 내 입에 넣어주는 사막여우보다 더 사랑스러운 너와 함께하는 이 시간이 그지없이 행복하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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