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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태경 Jan 27. 2023

제일 맛있을 때

반세기를 여자로, 엄마로 살았으니 얼마나 많은 요리를 했겠는가.

요즘이야 남자니 여자니 하며 성별을 가르는 것이, 편견이다 싶겠지만 내 세대만 해도 집안에서 요리를 한다는 것은 여자 몫이었다. 유교사상 투철하신 한복 입은 할아버지 그늘 밑이었으니, 내가 어렸음에도 남동생이 배고파하면 귀찮아 몸부림치고 입을 대빨 내밀어봐야 상차림은 내 몫이어야 했다.



한식, 일식, 중식, 양식, 나름의 노하우를 뽐내며 퓨전요리에 담금 술, 장아찌를 비롯한 저장음식들과 철마다 풍성한 과일로 만든 잼.

어릴 때는 바쁜 부모님을 대신해서, 가정을 이루고는 시댁 사촌들까지 불러들여해 먹이는 일은 즐거운 일이었다.




내 엄마는 뭐든 못하는 게 없었다.

요리 또한 엄마의 손을 거치기만 하면 별스러운 재료를 쓰지 않았음에도 바닥을 닥닥 긁어가며 대가족 숟가락이 열일을 하게 했다.

그런 엄마 곁에서 숟가락 놓으며 상차림을 돕다가, 딱히 붙들려서 요리를 배운 적이 없었음에도 그럭저럭 요리가 재미있고 쉬웠다.


잦은 모임으로 술자리가 많아 거나하게 취하셔서 들어오시는 아부지는 야식 해장으로 얼큰한 김치수제비를 좋아하셨다.

까슬한 턱을 비비며 술냄새를 잔뜩 풍기는데도 싫지가 않았다.

장손에 대가족 대들보로 사시다 보니 자식사랑을 눈에 띄게 하실 수 없었던 분이, 술을 자시고 들어오시는 날에나 하셨던 자식사랑. 그래서 늦은 밤 술 드시고 들어오시는 아부지 곁을 주인 찾은 강아지 마냥 맴돌기를 했다.

“우리 딸내미가 끓여주는 뜸벙수제비를 먹어볼까”

새콤하게 잘 익은 김치를 썰어 넣고 부르르~ 끓어오르면, 조그만 손으로 뚬벙뚬벙 수제비를 떠 넣는다.

늘 양 조절을 실패해서 한 그릇을 끓여야 하는데 매번 냄비 한가득을 만든다.(여적 나이가 먹어도 뭘 하든 손이 크다. 실제로도 손이 곰발바닥ㅎ) 숟가락에 담기지도 않는 커다란 수제비 덩어리를 늦은 밤 아부지 곁에서 먹던 기억이, 일찍 세상을 달리하신 아부지와의 따신 추억이다.

그런 기억이 더해져 난 지금도 얼큰한 김치수제비가 좋다.(지금은 육수도 우려내고, 김치에 콩나물을 넣는데 이게 또 일품이다. 비 오는 날이나, 아파서 입맛이 없고 기운이 딸리는 날이면 의례 생각이 난다)


국민학교(ㅎ난 이 단어가 좋드라)6학년쯤이다.

티브이에서 감자크로켓을 하길래(<김영란의 오늘의 요리>가 드라마보다 재미있었으니까) 어찌어찌 따라 만들었다.

입 짧은 동생이 나를 보스로 추앙하게 만들 기회가 되었으니, 양껏 만들어 냉동실에 채워놓고, 구린 일거리가 생기면 조금씩 꺼내서 튀겨준다. 케첩을 듬뿍 찍어 먹고 나서는 마다하지 않고 기꺼이 부하가 되어주었다.


전국구로 흩어져 사시는 친척들(때는 중학교. 10명은 넘었던 거 같다)이 오래간만에 우리 집에 모이셨다.

끼니때마다 대가족 먹이느라 힘드시니 오랜만에 친지들과 회포를 푸시라고, 잡채며 매운탕을(엄마가 미리 사다 놓았던 재료들) 끓여 상을 차려 드렸다.

어른들이 침이 마르게 하시는 칭찬이 왜 그렇게 좋았는지. 그 칭찬에 만개해지는 엄마 얼굴은 어찌 그리 고우신지.

엄마는 늘 힘드셨다.

시부모에, 줄줄이 사탕 건장한 3명의 시동생(작은 공장을 했으니 딸린 가족들은 다 직원이었다), 죽순처럼 크며 늘 목마른 삼 남매, 수시로 드나들며 밥상을 같이 했던 사람들까지 챙겨야 했다.

힘들어도 힘들다 한마디 없이 속으로 삭이시는 엄마 맘이 헤아려졌기에, 지인들과의 수다로 잠시나마 평안한 엄마 모습은 내 행복이기도 했다.

기특하다시며 짭짤한 용돈으로 칭찬도 해주셨으니 일거양득이다.

요리도 재미있었지만 어린 맘에 칭찬받는 게 신이 났었다.

맞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

친구들과 놀러 가서도 요리를 마다하지 않았다. 내가 한 음식을 맛나게 먹어주니 그것으로 좋았던 거다.

전생에 수라간 무수리였을지도 모르겠다ㅎ.


아이들 한참 크면서 잘 먹을 때는 손이 큰 게 도움이 되었다.

끝봄에 박스 때기로 사서 냉동실에 뭉탱이 물탱이 쟁여 놓은 딸기로 사계절 찌릿~하게 뒷골 땡기는 슬러시(그 때문인지 우리 아이들은 밖에서 딸기 음료를 시켜 먹는 건 왠지 손해 보는 거 같단다)를 일 년 내 먹을 수 있었다. 꼬맹이 친구들이 놀러 오는 날이면 형형색색의 레인보우를 뿌려, 투명한 용기에 담아준다. 지금이야 가까운 카페만 가면 다양한 음료들이 넘쳐나지만 그때는 문구점에서 파는 콜라, 오렌지 색깔 선연한 슬러시만 있었으니, 우유에 핑크빛으로 갈린 달달구리한 딸기 음료에 공룡ㆍ 하트ㆍ 별모양을 뿌려주면

“이야~~~ OO이는 좋겠다.”

내 아이 어깨에 뽕이 잔뜩 들어간다.


어느 날 큰아이에게 소원이 뭐냐고 물었더니 철가방에 배달되는 짜장면을 먹어보는 거란다.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어미로 당연한 일이고, 내가 좋아서 하긴 했어도 지눔 해 먹이느라 골 빠지게 수고했드만)

수타면 뽑을 자신까지는 없었고, 좋아하는 고기는 크게, 싫어하는 야채는 눈속임으로 작게 춘장에 까맣게 범벅이 되니 감자인 줄 알 것이고, 고기만 큼지막하게 씹히면 장땡.

옛말에 호강에 겨워 요강에 응가를 한다더니.

그렇다 해도 소원(그런 게 소원 거리였을 때가 좋았는데, 지금은 소원이 뭐냐고 묻는 것 자체도 겁난다)이니 시켜줘야지.

철가방 들고 온 헬멧(독수리 오형제 켄으로 보였으리라) 쓴 아저씨를 꿀이 떨어지게 쳐다봤다. 촌놈이 따로 없다.

초등학교 저학년이었는데도 짜장면 곱빼기를 순삭 하며 입주위가 까만 춘장으로 처발처발 난리가 났는데도 행복해하는 녀석을 보며, 내심 서운하면서도 웃음이 나왔다.

그 후로는 다행히 자장면을 시켜달라는 추가 주문은 없었다.

이유인즉슨 엄마가 해준 자장면이 고기가 크고 많이 들어가서 맛있다는 거다.




요리 관련해서 참으로 신박한 방법들이 넘쳐난다.

요리방법도 다양해진 만큼 도구들도 신기한 것들이 많이 생겼다.

그중에 에어프라이기는 혁명이다. 가지고 있던 오븐을 장식품으로 전락시켜 버렸다.(당근마켓에 내놔버릴까 고민 중)

조리도구들이 많은들 뭐 하겠노.

새로운 레시피들이 넘쳐난들 뭐 하겠노.

근래에는 아이들도 장성해서 얼굴보기 힘들어지고, 내 몸이 예전 같지 않아 지면서 지인들을 불러들여 음식을 한다고 북적거릴 일도 없어졌다.

그럼에도 서점에 가면 요리 관련 책자도 둘러보고, 핸드폰을 들고 시간을 보낼 때에는 요리 영상을 찾아보게 되는데…

우짤고 써묵을 일이 없으니 애석하기만 하다.

예전에 식당을 해보지 않겠냐는 제안을 허투루 받아들였는데, 몸 성할 때 그거나 할 걸 그랬나 싶다.




근처에 유성 오일장이 서는데 시장구경 가는 재미가 쏠쏠하다.

골목을 돌아 돌아 집에 오는 길에는 매번 양손에 한가득 비닐봉지가 들리게 된다.

아직은 녹슬지 않은 칼질 소리에 오래간만에 리듬이 실리고, 신명이 난다.

지지고 볶아 세팅까지 이쁘게 똭~~~~~

퇴근하고 집으로 올 줄 알았던 식솔은 약속이 있으시단다.

부산스럽게 움직인 데다 요리하면서 냄새로 질리고, 간 본다고 찔끔거리며 맛보기를 했으니 뻔한 맛.

혼자 먹으려니 맛이 날 리가 없다.


근사한 분위기에 폼 내고 앉아 마주했던 플레이팅 고급 져 먹기도 아까웠던 인생 첫 스테이크.

호텔 레스토랑 분위기에 취하며 설렘으로 접한 고깃덩이.

손바닥보다 작은 도톰한 고기는 익힌 게 맞는지 싶게 붉은빛이 돌았다.

나이프로 쓰윽~ 칼질과 함께 배어 나오던 벌건 피는 그 후로 트라우마가 되어, 영화에서 부럽기만 했던 장면은 상상 거기까지가 끝이었다.

아무리 플레이팅을 근사하게 해 놓은 사진을 봐도 스테이크는 식욕을 자극하는 메뉴에서 제외되었으니, 배고플 때 먹는 사발면에 김밥만 하겠는가.

고기를 먹지 못했어도 잠시 심쿵했던 그 사람과 함께 했기에 기억만은 간질거리고 상콤하다.


상다리 휘어지게 풍성한 음식들이 앞에 차려진다 해도 혼자 먹는다면 맛이 나겠는가. 별스럽지 않은 음식이라도 누구와 함께 하느냐가 중요한 것이다.

좋은 이와 함께 섞박지 아작거리며 먹는 순대 국밥은 행복이다.

돈이 궁하던 시절 라면 하나 시켜놓고 먹던 소주 맛을 잊을 수 없듯이, 더불어 즐긴다는 것, 입으로 먹고, 눈으로 가슴으로 먹는 음식은 내 몸에 살이 되고 피가 되는 것이다.




나이를 먹었나 보다.

옛날 일을 들먹거리며 짠해지는 것을 보면… 아… 시르다.

쭈글거려지는 마음결이.




예고 없던 특별 요리들은 반찬통으로 옮겨져 냉장고로 이송을 마치고, 널브러진 설거지를 하면서 꿀꿀해진 맘을 음악으로 달래 본다.

어디 짱박아 놓은 와인이라도 있는지 뒤져봐야겠다.


내 마음에 노을이 붉게 지고 있다.




-쳇 베이커<I fall in love too easily>

...

MY heart should be well schooled

'Cause I've been fooled in the past

내 마음을 잘 다스려야 해

과거에 난 너무 바보 같았으니까

But still I fall in love so easily

I fall in love too fast

그런데 난 여전히 쉽게 사랑에 빠져버려

너무 빨리 사랑에 빠지지

...


https://youtu.be/3zrSoHgAAW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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