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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오는 장터, 구수한 된장과 달달한 믹스커피

by 최태경

“뭔 비가 이리 온댜. 오늘 장사는 글렀네.”

사장님의 푸념에도 아랑곳없이, 빗줄기는 천막 끝에서 쉴 새 없이 떨어져 빗길을 만든다.


오일장이 열리는 장터 안, 잔치국수와 보리밥을 파는 작은 식당.

‘노포 맛집’이라 부를 만한 곳이다.

어릴 적 골목 끝에 있던 슬라브 기와집 같은 허름한 식당인데, 이 집 된장찌개 맛에 푹 빠져 수시로 입맛을 다시게 된다.

된장을 팔아 달라 졸라보았지만, 판매용 된장까지 만들 기력이 없으시다 하니 아쉬움이 남는다.


며칠 전 급한 일이 들어와 서둘러 퇴원을 했다.

죽고 사는 병은 아니지만, 칼을 대고 꿰매니 쉽지만은 않았다.

수술부위가 오른손이다 보니 일상생활이 적잖이 불편하다.

이 없으면 잇몸으로 산다고 어찌어찌 해결하고 오늘에서야 숨을 고른다.

뭘 살 것 같지는 않지만, ‘견물생심’이라 하지 않던가.

장바구니를 메고 장화를 신고 첨벙거리며 빗길을 나선다.


이상하게 장에 오면 기운이 난다.

없던 힘이 스멀스멀 올라오고, 삶의 활기가 돌기 시작한다.

비 오는 날에도 길바닥에 좌판을 펼친 할매들.

삶이 녹록지 않다는 푸념조차 사치임을 깨닫게 한다.

빗물이 튀고, 행인들의 우산에서 주르륵 떨어지는 물방울에도 개의치 않고, 마치 투사처럼 꿋꿋이 앉아 아침에 따온 채소를 펼쳐놓았다.


“노각 사가요. 깻순 사요.”

깻순 한 봉지를 3천 원에 건네며 할매는 웃는다.

“오늘 내 마수걸이해줬네.”

정오가 다 되어가는 시간이었다.


장 구경을 마치고 찾은 밥집.

몇 번 오지도 않았는데 사장님은 함박웃음으로 맞아주신다.

식당에 가면 사장님들이 덤을 챙겨주니, 살이 빠질 수가 없다.

비 때문인지 선선한 날씨 덕인지, 식당 앞에는 천막이 쳐져 있었는데 그 운치가 꽤나 좋았다.


보리밥을 다 비웠을 즈음,

“커피 타주까?” 하신다.

손사래를 치며 사양했다가(들어가는 길에 커피숍에 들러 책 읽을 참이었기에) 받아 든 따끈한 믹스커피 한 잔.

평소에는 잘 마시지 않는데, 비 때문인지 좋았다.

호객행위용으로 밖에 내건 스피커에서는 트로트가 쩌렁쩌렁.

좋아하는 장르는 아니지만 가만히 듣고 있노라니, 모진풍파 세상살이ㆍ사랑을 노래하는 가사가 귀에 쏙쏙 들어오는 걸 보니 나이 탓인가 싶다.

구수한 된장맛이 아쉽기는 했지만 달달한 믹스커피 한 잔에 그간의 긴장이 스르르 녹아내렸다.


특별한 사건만이 삶에 특별함을 주는 건 아니다.

좋아하지 않던 음악도, 소소한 장맛도, 장터 할매들의 투박한 덕담도.

푸석한 일상 속에 스며들어 온기를 만들고, 그 자체로 특별해진다.


돌아오는 길.

비가 그치고 기능 잃은 장화도ㆍ장바구니도 무겁다.

이상하지~ 맘은 가볍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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