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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면서 쉬웠던 날은 없었다

- 평범 속 반짝임을 찾아서

by 최태경

<살면서 쉬웠던 날은 단 하루도 없었다>


어제부터 내리던 비가 새벽녘에도 요란하게 창문을 두드렸다.
‘비가 오신다.’
찌뿌둥한 몸을 책상에 걸터앉아 작은 다이어리 칸에 짧은 일기를 쓴다.
어떤 날은 저녁에, 어떤 날은 카페에서, 그리고 오늘처럼 마음이 동하는 날엔 이른 새벽에.
몇 자 쓰고 나면 땡이다. 오늘 할애된 칸은 금세 꽉 찼다.

어느 날엔 내뱉지 못하는 말을 글로 쓴다.


이런 날엔 숲이 나를 부른다.
아침을 서둘러 챙겨 먹고, 버스 시간표를 확인한 뒤 길을 나섰다.

비가 요란하다.
호랑이 장가가는지 해 뜨고 비가 내리기도 하고, 잠시 펼쳐진 파란 하늘은 회색 구름에 밀려 빠르게 퇴장한다.
중구난방, 현란한 날씨다.


버스에서 내려 걷는데, 우산이 꺾일 듯 비바람이 몰아친다.
산에서 내려온 물길은 활기차게, 기세 좋게 흘러간다.


산은 늘 신비롭다.
벚꽃 흩날리는 봄에도,
소나기 잦은 여름에도,
사춘기 얼굴처럼 붉게 물드는 가을에도,
하얀 수염의 산타 할아버지처럼 눈이 쌓인 겨울에도.
어느 하루 같은 날이 없으니, 매번 새롭다.

수통골을 찾을 때마다 들르는 카페.
배밭이 보이는 창가 자리는 이른 시간엔 늘 내 전용석이 된다.
카페라테를 주문하며, 한참을 바라보다 결국 본능에 무릎 꿇듯 커다란 빵 하나를 들고 말았다.
달고 느끼해서 다 먹지 못할 걸 알면서도, 나이 들수록 더 귀해지는 ‘제약 없는 먹는 행복’을 오늘만큼은 누려보기로 했다.

따끈한 차 한 모금, 녹진한 빵 한 조각.
그리고 펼친 책 한 권.

<살면서 쉬웠던 날은 단 하루도 없었다>.
2020년 5월 20일, 딸아이가 서점에서 사주며 책머리에 남긴 글귀가 있다.
우린 책을 사면 그날의 마음을 첫 장에 남기는 습관이 있다.


“… 살면서 쉬운 날이 없겠지만, 그런 날들 속에서 이 책이 엄마의 항해를 위한 든든한 돛대가 되길 바라…”

그 글을 읽고는, 그냥 하늘만 한참 바라보았다.


살면서 특별한 일이 늘 있길 바라지만, 되돌아보면 사소한 시간들이 삶의 양분이 되어 나를 살게 해주는 특별함이었다.
과거조차 마음을 바꾸면 달라질 수 있음을, 이제야 조금 알 것 같다.

문득 떠오른 말.
‘평범은 정해져 있지 않다.
내 인생의 자전축은 나.
내가 정하는 기준 안에서 달라진다.’

그렇다. 평범한 오늘도 내 마음 안에서 반짝이면, 내게 특별한 날이 된다.

오후에 다시 비가 온다지만, 산 앞에 서 있는 미루나무는 아랑곳없이 반짝이며 빛을 내고 있다.




나의 핏줄 어느 골짜기엔 재즈가 흐른다.

<Tord Gustavsen Trio – Being There>

https://youtu.be/_vhunOjlWwE?si=JWWDf0TlbMMnT86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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