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눈을 뜨니 습한 기운이 느껴진다. 묵직하고 진한 커피 냄새가 그립다.
온몸이 찌뿌둥한 걸 보니 비가 오나 보다. 언젠가부터 몸이 날씨를 말해 준다. 오늘도 긴 하루가 예상된다. 이런 날은 유독 하루가 더디 간다. 우울함과는 다르다.
며칠 전 SNS를 보다가 바다풀을 듬뿍 넣고 빨간 고추장에 비벼진 해초 비빔밥에 꽂혔다.. 잠이 오지 않는 날이었는데 미치도록 먹고 싶었다. 참지 못하고 그 새벽에 구매를 했다. 비릿한 바람 냄새나는 새벽 바다가 사무치게 그리웠던 걸지도 모르지.
어릴 적 영화를 너무 많이 봤나 보다. 얼어 죽을 감성은 시도 때도 없이 고개를 내민다. 살아내기 바빴던 예전에는 염치없이 들이대는 센티함을 봐주지도 못하고 ‘나중에 꺼내 봐야지’ 주머니에 찔러 넣고는 한 번, 두 번... 여러 날... 여러 해가 되어 쌓이는 줄도 모르다, 머리에 흰 새치가 나려는지 가려워 긁적거리던 손을 무심코 주머니에 넣었더니 숨겨놨던 감성이 손에 잡혔다. 가슴앓이. 네게 미안해. 후회하지 마. 살아간다는 건 다 힘들 거야. 잘 견뎌내느라 애썼다. 꾸깃꾸깃 구겨 넣었던 것을 조심스레 꺼내 펴본다. 쓰라린 시간이 밉지 않아졌으니 그럼 됐다.
해초밥인지, 밥해초 인지도 모르게 밥알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듬뿍 해초를 넣고, 싱싱한 미나리 한 줌 송송 썰어 넣어, 붉은 고추장에 들기름 휘~ 둘러 푸짐하게 비벼 먹는다.
바다기운~ 봄기운~ 다리에 힘이 들어간다.
음악이 있어 좋다. 허밍으로 흥얼흥얼 추억을 노래한다.
서랍장에 묵혀있던 레이스 장식의 붉은 속옷(선물 받아 놓고 어색해서 입지 않고 넣어 두었던)을 꺼낸다. 옷 정리를 하면서도 선뜻 꺼내지 못하고 매번 밀쳐놨었다.
까짓~ 누가 내 속옷을 보는 것도 아니잖아.
예쁘게 원피스를 차려입고 장화를 신는다. ㅎ비가 오잖아. 비 오는 날 신는 장화가 좋다.
누가 보는 것도 아닌데 왠지 쑥스럽다. 그런데 이상하지. 기분이 좋다. 남들은 모르는 작은 비밀. 이런 기분이었다면 일찍 꺼내 입을 것을 바보 같으니라고.
기분이 짱~ 좋아졌다. 무거운 장화도 가뿐하다. 조그맣게 생긴 물웅덩이를 톡! 톡! 톡! 밟아 본다. 동그랗게 동그랗게 잔물결이 동그라미를 그린다.
거리가 내려다보이는 카페 창가에 자리를 잡고 커피를 마신다. 테이블 위에는 읽을 책이 있고, 커피가 있으니 행복하다.
행복이 뭐 별거야. 가슴 설레이게 야한 속옷을 입고, 진한 커피 한 잔이 내 맘을 이리 싱글거리게 만들면 그만이지.
임재범<너를 위해>